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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인생의 양면을(Both sides) 노래하는 소녀 '코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20

  윌 스미스가 망쳐 놓았지만 94회 아카데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카데미가 이 영화에 작품상을 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영화를 안봤을 겁니다. (물론 이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감이냐를 놓고는 설왕설래가 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내 취향은 아니다 싶었던데다, 개봉한 지도 6개월이 지나 지금 보긴 좀 애매했거든요. 꼭 상을 받아야 보는 건 아니지만 선택이 망설여질 때 상은 나름 편리한 기준이 됩니다. 

바이링구얼 소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코다"
  영화 “코다(CODA)”는 한 ‘이중언어사용자’(바이링구얼 · bilingual) 소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계와 저 세계에 모두 발 딛고 있는, 그래서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하지만 씩씩하게 자신의 앞길을 헤쳐나가는 어느 ‘코다 소녀’ 이야기입니다. 보통 ‘바이링구얼’이라고 하면 모국어와 또다른 언어에 모두 능통한 이를 가리키지만 저는 여기서 모국어와 모국어 수어에 둘다 능숙하다는 뜻으로 썼습니다.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는 농인(聾人) 부모를 가진 자녀를 일컫는 말입니다. 

  17살 루비(에밀리아 존스)는 농인 부모와 오빠의 귀와 입으로 살고 있는 청인(聽人) 여고생입니다. 어려서부터 아빠(트로이 코처·아카데미 남우조연상·농인 배우), 오빠와 함께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합니다. 잡은 물고기 가격을 놓고 어시장과 흥정할 때도, 이웃들과 소통해야 할 때도 루비가 꼭 있어야 합니다. 가족 중에서 루비만이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수어로 통역할 수 있으니까요. 어려서부터 혼자서 나머지 가족과 세상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온 루비는 종종 지쳐 보입니다.  
영화 "코다" 중 루비가 수어를 함께 쓰면서 노래부르는 장면 ⓒ애플TV+
 생선 냄새난다고, 농인 가족이라고 학교에서 은근히 놀림을 받는 루비의 유일한 취미는 노래 부르기입니다. 합창반에 지원했지만, 친구들 앞에서 쭈뼛대기 일쑤인 루비에게 츤데레 음악교사는 묻습니다. “할 말이 없는 예쁜 목소리는 차고 넘쳐. 너는 할 말이 있니?” 루비는 수줍게 답합니다. “네” 

 가끔씩은 삶에 지쳐 폭발할 때도 있지만 착한 딸 루비는 코다의 숙명을 받아들입니다. 루비를 아끼는 음악교사가 대학은 안 갈거냐고 묻자 루비는 자신은 공부도 잘 못하고 대학 갈 형편도 안된다며 내년에도 아마 아빠랑 일할 게 될 거라고 말합니다. 장학생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며 교사는 또 묻습니다. 

“노래 부를 때 어떤 느낌이야?”
“글쎄요, 설명하기 힘들어요…” 
“그래도 해봐”

머뭇대던 루비가 말 대신 수어로 설명을 시작합니다. 가슴 속에서 응어리진 뭔가가 솟아올라 고양되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감정을 수어로 표현하는 루비…(대본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습니다. ‘she SIGNS. Her two fingers make a figure standing still while her other hand circles to become the “universe,” which spins and grows out of her hands into the air around her.’)
 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글로 설명했지만, 이건 글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그냥 영화를 봐야 합니다. 말은 대부분의 경우 수어보다 의미를 전달할 때 효율적이고 정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장면에 설득된 저는 수어가 말보다 훨씬 더 정확할 수도 있고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박유림의 수어 연기처럼요.

루비의 선곡은 "Both Sides Now"
하지만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통역이 꼭 필요한 루비의 가족은 버클리 음대를 지원한 루비를 차마 놓아주기 힘든 상황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오디션 당일 겨우 버클리 오디션장에 도착한 루비. 부모와 오빠가 2층 객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평가관들 앞에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때 루비가 부르는 노래가 바로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불리는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입니다. 이 노래를 이 영화에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 기억은 거의 20년 전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중 엠마 톰슨 ⓒUIP코리아
이제는 뉴 클래식이 된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저는 이 노래를 사실상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실제 첫 만남은 1993년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는 카피로 기억되는 빈폴 광고에서 입니다)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에서 엠마 톰슨은 남편이 자신에게 주기 위해 산 줄로만 알았던 목걸이 대신(이 목걸이는 남편의 바람 상대인 여비서에게 갑니다)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 앨범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습니다. 엠마 톰슨은 남편의 외도를 확신하지만 가족에게는 티를 내지 않고 안방에 잠시 혼자 들어가 마음을 진정시킵니다. 울부짖지도 어깨를 들썩이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눈물 한방울로 이 막막한 감정을 연기해내는 엠마 톰슨에게 지금도 찬사가 쏟아지는 명장면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Both Sides Now”가 배경음악으로 흐릅니다. 
 
달과 6월과 대관람차. 
모든 동화가 현실처럼 느껴지는 춤추는 듯 아찔한 느낌. 
난 사랑을 그렇게만 봐왔죠.
하지만 이제 보니 그건 또 다른 쇼일뿐. 
당신은 그들이 웃게 내버려두고 가죠.
하지만 신경쓰인다면 그들 모르게 하세요.
당신을 다 드러내지 마세요.
난 이제 사랑을 양쪽에서(both sides now) 보죠. 
주는 것과 받는 것으로요. 하지만 어쨌든
내가 떠올리는 것은 사랑의 환영일뿐이예요.
난 정말 사랑이 뭔지 모르겠어요.

  버클리대 오디션 무대에 선 루비가 피아노 반주에 맞춰 “Both Sides Now”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엠마 톰슨이 가슴으로 흐느끼던 장면과는 달리 2층에 앉아 있어도 딸의 노래를 듣지 못하는 가족들을 향해 밝은 표정으로 수어와 함께 노래를 전합니다. 수어로 표현되는 가사는 너무도 직관적이어서 다소 내적 독백처럼 추상성이 강한 "Both Sides now"의 가사를 훌륭하게 보완, 아니 표현해냅니다. 
 
매일 살아가면서 뭔가를 잃고 뭔가를 얻기도 하죠.
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죠.​
이기는 측면과 지는 측면. 하지만 어쨌든
​내가 떠올리는 것은 인생의 환영일뿐이예요
난 정말 인생이 뭔지 모르겠어요.
 
​난 이제 인생을 양쪽에서 보죠.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하지만 어쨌든.
​내가 떠올리는 것은 인생의 환영일뿐이예요
난 정말 인생이 뭔지 모르겠어요.

“Both Sides Now”는 조니 미첼이 불과 스물 세 살 때 비행기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구름을 내려다보면서 쓴 노래입니다. 당시 그녀는 노벨상 수상작가 솔 벨로의 “비의 왕 헨더슨”을 읽고 있었다고 하죠. 책에서 헨더슨 역시 아프리카로 가는 비행기에서 구름을 보았죠. 조니 미첼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스물 세 살이 썼다고 하기엔 애늙은이 같은 내용이지만 천재라서 가능했을까요. 1절에서는 땅에서 올려다봤을 때 아이스크림 성 같던 구름이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람들에게 비나 눈을 내리고 태양을 막는 방해꾼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물의 양쪽을 본 것이죠. 

수어로 확장되는 언어
 루비가 첫 번째 음악시간에 노래를 불러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쭈뼜대다 달아나기까지 한 건 학교에 처음 왔을 때 그녀가 말을 이상하게 한다며 놀림을 받은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농인 가정에서 자라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하지만 루비는 비장애인과 음성대화도, 농인과 수어도 다 잘하는 소녀로 자라났습니다. 인생의 양쪽을 일찍부터 본 거죠. 그런 그녀였기에 어떤 순간에는 수어로 자신의 마음을 더 잘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음성과 수어에 동시에 실어 보낼 줄 알았습니다. 비장애인인 저로서는 엄청난 언어의 확장을 목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올해 77세로 무려 53년 전에 이 노래를 썼던 조니 미첼은 실제로 영화 “코다”를 보고 에밀리아 존스가 부른 “Both Side now”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연기였다며 트위터를 통해 찬사를 보냈습니다. 
 
  아카데미에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Both Sides Now”를 이 당찬 소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을요. 소통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평소와는 다른 시선에서 느껴보고 싶으신 분들께 영화 “코다”를 추천합니다. 이 영화가 대단한 작품성을 가진 영화는 아닐지라도 인간에게는 음성 언어 외에도 다양한 언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우리는 소통의 확장, 언어의 확장, 양쪽에서 인생을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코다”는 양쪽에서(Both Sides) 보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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