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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들 죽였다" 노모, 2심도 무죄…재판부 "무죄가 더 고통일 수도 있지만"

판사봉 사진
2020년 4월 21일 새벽 0시 53분, 경찰에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됐습니다.
 
"아들이 술을 마시고 속을 썩여서 목을 졸랐더니, 죽은 것 같다. 숨을 안 쉰다."
- A 씨 경찰 신고 내용 -

신고 접수 6분 만에 A 씨 딸의 주거지인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100kg이 넘는 중년 남성이 호흡과 심장이 멈춘 상태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합니다.

"아들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딸과 다투고도 또 술을 달라고 하자 화가 나서 냉장고에 있는 소주병을 꺼내 아들의 머리를 쳤다. 이후 수건으로 목을 졸라 아들을 살해했다."라고 피해자의 어머니인 A 씨는 자백했고, 검찰은 A 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재판에 넘겼습니다.
 

102kg 거구 남성을 76세 어머니가 숨지게 할 수 있었을까?

검찰 (사진=연합뉴스)

1심에서 검찰은 A 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해 판결문에 상세히 적었는데, 102kg 거구의 중년 남성을 76세 고령의 여성이 흔히 쓰는 평범한 수건으로 목 졸라 살해할 수 있겠느냐는 게 한 가지.

술을 달라 한 아들, 그만 마시라며 말린 딸 사이 다툼이 어머니가 아들을 살해할 만큼의 동기로 보이지 않는다며 다른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로 진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또 한 가지였습니다.
 

2심 재판부 "고민이 되는 사건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회생법원

숨진 사람은 있는데, 숨지게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이 사건 2심 선고 공판이 어제(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렸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담한 체구의 A 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섰습니다. "고민이 되는 사건이었고, 감염병 사태 등으로 지체돼 양해를 구한다."라는 재판장의 말과 함께 선고가 시작됐습니다.

2심 재판부는 부검감정서를 작성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 증언 내용 등을 토대로 피해자가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까닭에 수건으로 살해할 수 있었다는 피고인의 진술이 객관적 합리성을 잃었다고 보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범행 동기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들에 대한 악감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게 되고 건강도 좋지 않은 데다가 술만 마시면서 괴로워하는 아들에 대한 연민과, 자신이 아들보다 먼저 죽었을 때 딸이 지게 될 책임에 대한 걱정을 고려하면 범행 동기나 살해 배경이 이해된다고 보았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의문…사건 당일 현장엔?

하지만, 재판부는 "1심에서 던졌던 의문 중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게 남았다"며 사건이 벌어진 그날 밤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 공소사실의 전제는 피고인이 소주병으로 피해자 머리 내려치고 수건으로 목을 감기 전에 이미 A 씨 딸이 자녀들과 함께 집을 떠났고 그때까지는 피해자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있었단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전제 사실에 대해서는 피고인 진술 외에는 딸의 진술만 있어서 딸의 진술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고 하면, 범죄의 실행이 (딸이 떠난) 밤 12시 반 이후에 피고인과 피해자만 있는 상태에 범행이 이뤄졌다고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재판부는 A 씨 딸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 집에 있었던 시간 동안의 상황을 시간순으로 정리해서 설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통화 기록 등 사실관계와 다른 진술을 하는 등 딸의 진술을 온전히 믿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날 범행 현장에 A 씨와 피해자인 아들만 있었다는 부분에 대한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본 겁니다.

뿐만 아니라, 범행 직후 방이 너무 깨끗이 치워져 있었던 점, 깨진 소주병 위에 피해자가 쓰러졌을 텐데 피해자의 등이나 바닥에 닿았을 몸 부분에는 상처가 없고 왼쪽 종아리 바깥쪽에 얕게 베인 상처 하나밖에 없는 점에 대한 의심도 해소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1심이 무죄인 판결에 대해 항소심에서는 어떤 원칙을 갖고 판단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1심이 일으킨 합리적 의심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을 정도에까지 이르지 아니한다면 그와 같은 사정만으로 범죄의 증명이 부족하다는 제1심의 판단에 사실오인의 위법이 있다고 단정해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해선 안 된다."

2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제1-2형사부(엄상필 심담 이승련 부장판사)의 결론도 A 씨는 '무죄'라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자백이나 딸의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고, 검사가 제출한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이 사건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 결론이 정당하다고 본 겁니다.
 

"무죄 판결이 더 고통일 수도"


재판부는 "피고인이 보기에는 판결의 결론이 이상할 수도 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피고인이 유일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죄를 선고받고 나온 A 씨에게 기자라고 밝히며 질문하려 했지만, 아무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2020년 4월 21일 새벽 인천 미추홀구 A 씨 딸의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 길이 없지만,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하다는 확신이 있어야 유죄로 인정할 수 있다는 재판부의 결론과 함께 선고가 마무리됐습니다.
 
"피고인의 자백이 맞다면, 어쩌면 내가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법원에서 안 믿어주고 딸을 의심하면서 무죄 판결 하는 게 교도소에서 몇 년 살고 나오는 것보다 더 고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고하는 무죄판결이 형사재판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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