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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생활인'의 쿠바살이 - 어쩌다 쿠바 [북적북적]

'사랑에 빠진 생활인'의 쿠바살이 - 어쩌다 쿠바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33 : '사랑에 빠진 생활인'의 쿠바살이 - <어쩌다 쿠바>
 
"정전과 단수가 일상이고, 뭐라도 하나 사려면 몇 시간씩 줄을 서야 하며 인터넷 사용이 자유롭지 못해서 비싼 데이터 비용을 지불하지만, 천국이라고 모든 게 좋을 수만 있겠나? 이런, 방금 전기도 나가버렸네."

이제 '초봄'은 '조금씩 따뜻해지긴 하지만 뿌옇고 혼탁한 대기 속에서 마스크를 끼고 걷게 되는 시기'로 그냥 굳어져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 듯 합니다. 화창한 남국의 이야기라고 손짓하는 이 책의 샛노란 표지를 서점에서 봤을 때 유독 끌렸습니다.

블로그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올리다가 책으로까지 펴내게 되는 분들이 요즘 적지 않습니다. 오늘의 책도 그렇게 탄생했습니다. 희뿌연 이 주말,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지난 2월말 출간된 [어쩌다 쿠바]입니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서 '쿠바댁 린다'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작가는 불현듯 떠났던 쿠바 여행에서 난생 처음 만난 14살 연하의 쿠바 남자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남자친구를 한국으로 초대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와 함께 하는 인생을 위해서 자신이 쿠바로 가서 살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어쩌다 쿠바]에는 작가가 브런치에 연재했던 이들 부부의 만남과 결혼, 쿠바살이의 이모저모가 담겨 있습니다. (작가 부부는 지금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다고 합니다.)
 
"치이이이이, 카드 영수증이 뽑혀 나왔다.
캐셔 담당자 외에 세 명의 관련자들이 영수증이 나오는 것을 주시하고 있었고,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나지막한 감격에 속으로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슈퍼마켓에서 카드결제라니!
2020년 7월 20일 월요일 오전 10시경의 모습이었다." ('쿠바의 슈퍼마켓에서 카드결제라니!' 中)


" "교수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가 필요한데 어디에서 발급받을 수 있을까요?"
"어디에 쓰려고?"
"한국에 가는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서 필요해요."
"아, 외국 가는 데 필요한 서류를 신청하면 서류 상관없이 무조건 장당 200쿡(24만 원)을 받아. 나도 그래서 지난번에 서류를 못했어."
"네? 장당 200쿡이요?"
"……"
쿠바는 외국 혹은 외국인과 관계 있는 모든 서류는 아주 비싸서 상상을 초월한다." ('또 하나의 산, 비자 받기' 中)


이 책이 마음에 와 닿았던 건 또 한 커플의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야기,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이야기'임이 진솔하게 전해져서였습니다. '쿠바'는 종종 모종의 로망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이야기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쿠바'라는 지명과 '로망'이라는 단어를 같이 쓸 때, 그것은 '(괄호 치고) 짧은 휴가/휴식/관광으로는 뭔가 끌어당기는 나라'라는 뜻의 범위를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정작 쿠바라는 나라에 가서 생활인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보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주일에서 길게는 몇 달 정도, 바깥 세상에서 가져온 돈을 쓰면서 스쳐 지나가는 관광객으로 들렀다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삶을 꾸린다고 하면 말입니다.
쿠바는 사실 우리에게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 상당히 괴리감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속적인 기준으로) 풍족하지 않거나 사회체제가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는 것도 경계할 일이지만, 우리 기준에서의 얄팍한 '로망'을 쉽게 덧씌우는 것도 그만큼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쿠바에는 독특한 줄 문화가 있다. 바로 '울띠모(Ultimo)' 시스템이다. '울띠모'는 스페인어로 '마지막' 혹은 '마지막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는 데마다 줄을 서다 보니 땡볕에 한 줄로 몇 시간씩 서 있는 건 고역이라 줄 서기 전에 마지막 사람과 그 앞 사람이 누구인지만 확인을 한다. 그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면 상점 근처에 있는 그늘을 찾아서 기다리기도 하고, 잠시 다른 곳에 볼일을 보러 다녀오기도 한다. 줄이 너무 길어질 때에는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오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쿠바의 상점 앞을 보면 사람들은 많은데 한국처럼 가지런히 한 줄로 서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쿠바의 슈퍼마켓에서 카드결제라니!' 中)


'쿠바댁 린다' 님은 쿠바를 딱히 미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녹록지 않았던 쿠바에서의 삶에 대해서 탄식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평탄한 삶을 통째로 벗어던지고 정착하려 노력했던, 하늘이 아름다운 나라. 그 안에서 맞닥뜨린 삶의 고단함과 불편함까지도 자신이 선택한 삶을 꾸려가기 위해 기꺼이 겪었던 삶의 일부임을 씩씩하고도 담담하게 전할 뿐입니다. 희끄무레한 하늘로부터 탈출해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기분이 드는, 마음에 봄바람이 불까 말까 하는 요즘 같은 때에 왠지 친밀한 기분으로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누군가의 사는 이야기'입니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먹을 것과 생필품을 구하기도 힘든데, 건너편 집 여인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른다. 처음에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는 게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힘든 상황에 대해서 불평하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찾아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게다가 지난주에 천둥 번개가 아주 심하게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나무판자로 만든 여인네 집 창문이 '뚝' 하고 떨어져서 이제 비가 오면 닫을 창문이 없는데도 여인은 그저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어쩌면 나는 인생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닐까?
그동안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생활의 기준에 맞추어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나는 당신들과 달라요, 라는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거나 그들의 세상을 깊이있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내 기준으로만 그들에게 섞이려고 했었다.
이제는 달라져 볼까 한다. 내가 있는 이 천국에서 똥도 밟아보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춰 보아야겠다. 좀 더 유연한 사고로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봐야겠다. 이곳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누릴 수 있는 건 다 누려봐야 나중에 미련이 없겠지?
온 세상이 암흑 같은 지금도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며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 그동안 그런 이들을 보면 생각 없이 산다고 여겨졌는데, 생각을 고쳐먹으니 그들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말이다. 늘 그렇듯 정전이 되면 더워서 집 밖으로 나왔고, 심심하니까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튼 것뿐이었다." ('귀인과 천국에 살고 있습니다' 中)


우리에게는 굉장히 일상적인 일들이 모험이 되고, 사소한 일들이 엄청난 장애물로 다가오기도 하는 쿠바살이 속에서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생활인의 시선에 동참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여행객의 시선에서 기대해봄직한 순간들에 좀더 부합하는 장면들도 꽤 나오고, 웬만한 관광서적 못지않은 다채로운 사진들도 실려 있어서 이모저모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낭독에서는 '쿠바댁'의 이 생활감을 중점적으로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평범하지 않은 삶을 선택한 부부의 이야기이지만 또 그만큼 평범하기도 하고, 우리가 각자의 입장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쉽지 않은 하루하루들을 헤쳐 나가듯 이 부부도 서로와 함께 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그저 하루하루를 헤쳐 나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과 감정들은 모두 하나같이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쿠바댁 린다' 님이 지구 반대편에서 잔뜩 얻어온 깨달음도, 이 책을 통해 나와 다른 삶을 들여다보고 싶은 우리들의 깨달음도 말입니다.
우리 중에선 가본 이들보다 가보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은 쿠바의 푸른 하늘과 바다, 이글거리는 태양을 [북적북적]과 함께 그려보면서, 이 희뿌연 주말을 시원하고도 뜨겁게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푸른향기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SBS 디지털뉴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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