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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레드라인'의 범람…'대북 레드라인'이란 무엇인가

[취재파일] '레드라인'의 범람…'대북 레드라인'이란 무엇인가

레드라인이란 무엇인가

지난 24일 오후 북한에서 ICBM급 장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정상 각도로 발사하면 사거리 1만 5천km가 나오는, 미국 본토 전역에 닿는 위력의 미사일입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선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표현이 범람했습니다. '사실상 레드라인을 넘었다', '또 레드라인을 넘었다' 표현도 가지각색입니다. 통일외교팀 출입 2주 차인 저도 무심코 '레드라인'이란 표현을 썼다가 문득 '대체 레드라인이 뭐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의 지인들도 묻더군요. "이번 도발은 얼마나 더 심각하다는 거야."

레드라인이 ICBM급 미사일의 시험발사라면 이미 화성 14형, 15형을 발사한 2017년에 레드라인을 넘은 것 아닌가? 당장 지난달 27일, 지난 5일, (실패했지만) 16일에도 ICBM급 미사일을 쏘지 않았던가? 레드라인은 넘어선 안 될 금기선인데, 여러 번 넘어선 레드라인을 레드라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어느 시점이 유의미하게 레드라인을 넘어선 시점인 것인가? 이런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의문을 갖고 계실 분들을 위해 전문가 자문을 받아 레드라인의 의미와 한계를 다시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레드라인을 둘러싼 갑론을박

국제 사회에서 레드라인은 넘어선 안 될 금기선입니다. 상대 국가에 도발의 금기선을 정해놓고 이 선을 넘어서면 기존의 외교적 수단에서 군사적 대응을 포함한 비외교적 수단으로 전환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일종의 분기점인 거죠. 상대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 레토릭으로 줄곧 사용돼 왔습니다.

레드라인을 분명히 그어 놓고 외교 전략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요약하면, 외교 전략으로서 '레드라인'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 선을 넘었을 때 어떻게 군사적 맞대응을 할 건지가 수반 되어야 하는데, 이는 실은 엄포를 놓는 쪽에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미 브루킹스 연구소 국제정치 학자 라이언 하스는 2017년 북핵 위기 당시 PBS 인터뷰에서 "북한에 레드라인을 긋지 말아야 한다. 레드라인은 곧 자동적 맞대응을 의미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른 변수를 고려할 수 없다. 또 레드라인을 넘지만 않으면 북한이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리사 콜린스 국제전략연구소(CSIS) 연구원은 "북한에 레드라인을 긋는 건 위험하다. 북한은 그 선을 결국 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군사적 맞대응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모든 동맹국들, 특히 한국과 일본에 재앙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경고의 수위를 극대화하기 위해 '레드라인'을 공언할 때도 있습니다. 2013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시리아 정부군에 민간인에게 화학무기를 쓰는 걸 레드라인으로 규정하고 군사 개입할 것이라고 공언했었죠. 결국 시리아 정부는 민간인에게 대량 화학무기를 썼고 미국은 끝내 군사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레드라인'이란 외교적 수사가 강력한 이유는 이처럼 수사를 쓰는 쪽에서도 많은 걸 감수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양날의 칼이기 때문입니다. 칼을 쓴다고 엄포는 놨지만 결국 칼을 뽑아 들지 못할 경우, 안 쓰느니만 못한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북핵 위기 당시 "전 세계가 보지 못했던 화염과 분노를 보게 될 것"이란 격한 표현을 동원해 북한을 압박하면서도, 백악관 브리핑에서 숀 스파이서 당시 백악관 대변인은 "모래밭에 어떤 레드라인도 긋지 않고 적절할 때 단호한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리아 공습 때 '레드라인'을 그었지만 잘 작동하지 않았단 사실도 언급하면서요.

트럼프 정신건강, 화염과 분노

우리의 경우,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북 레드라인을 언급하면서 처음 레드라인이 공식화 됐습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북한이 ICBM급 미사일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무기화하는 것을 레드라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걸 두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레드라인이다, 전략성 모호성을 버렸다, 레드라인의 필요충분 조건인 맞대응책이 빠졌다 등 논란이 나오기도 했었죠. 당시 외교부는 대변인 정례 브리핑을 통해 "북한의 핵능력 고도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상황의 엄중성과 시급성에 대한 심각한 인식에 따라 이 같은 언급을 한 것으로 본다"라고 군사적 맞대응을 의미하진 않는단 취지로 진화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젠 '레드라인'이란 수사를 걷어내야 할 때

정리하면 '레드라인'은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한 채 암묵적으로 상대에게 "넘지 마, 넘지 마"하면서 심리적 압박을 가하든가, 아니면 명확히 레드라인을 긋고 이를 넘을 시 뒤따를 군사적 맞대응을 분명히 밝혀 위협의 수위를 극대화하든가 하는 식으로 사용돼 온 외교 전략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한 건 전략적 모호성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위협의 수위를 극대화해 상대의 행동을 무력화시키는 식도 아니었던 것 같고요. 그래서 지금 남게 된 건 결국 '레드라인'이라는 수사 그 자체뿐인 것 같다는 결론입니다. 북한의 도발, ICBM급 미사일 발사에 다가서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말이 과용되어 온 모양새를 살펴보면 그렇습니다.

북한 미사일

성기영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실장은 25일 SBS와의 통화에서 "ICBM급 미사일 발사는, 공개만 됐고 시험발사는 하지 않았던 화성13형부터 실제 발사했던 14형, 15형도 있었다. 기술적인 진전을 가지고 그때마다 '레드라인을 넘었다'는 용어를 쓰는 것에 대해 우려와 의구심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 실장은 "지금 시점에선 '레드라인'이라는 외교적 용어가 엄밀한 정의 없이 굉장히 (많이) 쓰이고 있다"며 "레드라인을 넘는 순간 행위자로 하여금 판이 바뀔 수 있다는 걸 명시적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레드라인을 절대 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줘야 하는데 레드라인이란 말을 자꾸 쓰면 쓸수록 내성을 키워주는 효과를 주게 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더구나 2017년 이후 유엔 안보리에서 이미 최대 수준의 대북 제재를 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현 시점에서 레드라인을 넘는다고 해도 국제사회를 통한 유의미한 추가 응징을 하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27일 긴급 유엔 안보리 공개회의에선 상임 이사국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북한의 ICBM 시험발사를 규탄하는 언론성명을 채택하는 것조차 무산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걱정해야 하는 레드라인은 어디일까요.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25일 SBS와의 통화에서 "한국의 입장에선 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북한의 전술핵 개발이 우리에게 사실상의 레드라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2019년 5월 전술핵을 실을 수 있는 중단거리 미사일 도발을 했을 때 실질적으로 우리의 레드라인을 넘어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겁니다. 미국의 관점에선 2018년 4월 북한이 했던 모라토리움 선언(핵 개발 및 ICBM 발사 유예)을 깨트린 지난달 27일 탄도미사일 발사가 레드라인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 거란 설명입니다.

어떤 쪽이든 북한이 건너선 안 될 강을 건넌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레드라인이란 수사는 북한의 폭주를 막는 데 별 역할을 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젠 레드라인이란 자극적이지만 무용한 수사를 내려놓고 도발의 내용 자체에만 더 차분히 집중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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