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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78장짜리 도박…전설의 테니스 자매 만든 아버지 '킹 리차드'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윌 스미스의 세 번째 오스카 도전 "킹 리차드"
  내일 아카데미상 시상식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윌 스미스가 주연한 “ 킹 리차드” 는 전형적인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입니다. 이 영화가 오스카 작품상을 탈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고기와 지방이 잘 섞인 투뿔등심처럼 작품성과 대중성이 적절하게 안배돼 이 영화를 보러가면 실패할 가능성은 낮다,는 쪽이지요.
 “ 킹 리차드”는 작품상을 비롯해 남우주연상, 각본상, 편집상 등 아카데미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있습니다. 주연인 윌 스미스는 골든글로브와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이미 남우주연상을 받아 배우 생활 처음으로 오스카를 거머쥐게 될 확률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습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흑인 배우인 그는 “ 알리(Ali, 2001)”와 “ 행복을 찾아서(Pursuit of Happiness,2006)”에서의 빼어난 연기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올랐지만 상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전 세계적인 흥행작 “ 맨 인 블랙(Man in Black)”에서 천방지축 20대였던 그가 벌써 50줄 중반에 접어들었다니 세월이 무상하네요.

영화 "킹 리차드" 중 리차드와 두 딸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 킹 리차드”를 보면서 “ 행복을 찾아서”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실직한 의료기기 외판원인 윌 스미스는 돈이 떨어져 어린 아들과 함께 화장실에서 노숙을 해야할 정도의 삶을 살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피나는 노력 끝에 부자가 되죠. “ 킹 리차드”도 아이들이 주렁주렁 달린 한 가난한 흑인 가장이 각고의 노력 끝에 두 딸을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성장시켜 부와 명예를 거머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위대한 아버지, 즉 ‘킹’의 이름은 리차드 윌리엄스. 두 딸 ‘프린세스’의 이름은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레나 윌리엄스입니다. 테니스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두 자매 선수는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세계 여자 테니스계를 말 그대로 ‘지배했던’ 위대한 선수들이죠. (솔직히 큰 대회 결승전을 거의 매번 둘 중 하나 또는 두 사람이 맞붙는 일이 계속되자 좀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계획이 없다면 실패는 보나마나야"
  아버지 킹 리차드는 이 두 자매가 태어나기도 전에 78장에 이르는 챔피언 육성 계획을 짭니다. TV에서 우연히 테니스 경기 우승자가 상금으로 4천 달러를 받는 걸 보고 말이죠. 테니스는 개인 종목으로는 세계 최대의 시장을 가진 스포츠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에 도전해보기에 좋은 스포츠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리차드 가족은 리차드와 아내가 투잡을 뛰어야할 정도로 돈이 없습니다. 부모는 시간을 쪼개 방과 후 아이들에게 직접 테니스를 가르치는 한편, 리차드는 특유의 넉살과 친화력 그리고 아이들의 재능을 발판 삼아 당대의 일급 코치들을 섭외합니다. (말이 섭외지 찾아가서 허풍을 떨고 거의 떼쓰는 수준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아이에게 일급 코치를 붙인 킹 리차드는 이상하게도 엘리트 스포츠 풍토는 거부합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도 해야하고 압박감을 받아서는 안된다며 코치가 권유하는 주니어대회도 못 나가게 하죠. (대회에 나가서 압박감을 받지 말고 훈련만 하다 바로 프로로 전향하자는 게 리차드의 계획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균형을 강조하는 리차드이지만, 모순적이게도 자신의 뜻은 무조건적으로 가족에게 관철시키는 독단성도 보여줍니다. 학업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빗속에서 자매들에게 스파르타식 훈련을 시키다 이웃에게 아동학대로 고발당하기도 합니다. “계획적으로 살지 못하면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If you fail to plan, you plan to fail)”라는 게 그의 신념입니다. 자매는 주니어대회에 나가 자신들의 실력을 재보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고, 훈련 중에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코치의 말보다 아버지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교육을 시킨 건지, 자매가 원래 그런 성품인지 이들도 별 반항 없이 아버지를 잘 따릅니다. 이 영화를 자식 교육에 관한 영화로 본다면, 그래서 이쯤 보고나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자식 가진 부모들이 헷갈리기 시작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리차드는 100% 헬리콥터 꼰대 아버지 같은데, 자매는 결국 알다시피 전설적인 성공을 거둡니다. 팝스타 비욘세가 부른 “ 킹 리차드”의 주제가 “비 얼라이브(Be Alive)” 처럼 말이죠. “ 킹 리차드”는 이 곡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우리는 보통 ‘음악상:오리지널 스코어’와 구별하기 위해 '주제가상'이라고 번역합니다) 후보로도 올라 있습니다. 가사의 주요 대목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길은 금으로 포장된 길이 아니었어
하지만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일궈냈어
우리 말고 누가 해낼 수 있겠어
THE PATH WAS NEVER PAVED WITH GOLD
WE WORKED AND BUILT THIS ON OUR OWN
AND CAN’T NOBODY KNOCK IT IF THEY TRIED

  그런데 저는 “킹 리차드”의 주제는 너무나 뻔한 내용의 이 노래보다는 영화 중반쯤 나오는 '더 갬블러(The Gambler,1978)'라는 노래에 압축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갬블러'는 리차드 가족이 테니스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플로리다로 털털거리는 폭스바겐 미니버스를 타고 먼 이주에 나설 때 흘러나오는 노래입니다.
  2년전 타계한 미국 컨트리음악의 대부, 케니 로저스에게 그래미상을 안긴 히트곡 '더 갬블러'는 한편의 장편(掌篇)소설과도 같은 가사가 인상적입니다. 마치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로 시작하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처럼 “더 갬블러”는 한폭의 그림 또는 영화같은 서사적 구조와 가사를 갖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밤 행선지도 모르는 기차에서 타짜를 만났지
우린 둘다 잠도 안올 정도로 피곤해서 창밖의 어둠을 보고 있었어
무료함에 지쳐갈 때쯤 타짜가 입을 열더군 
On a warm summer's evenin' on a train bound for nowhere, I met up with the gambler; we were both too tired to sleep.
So we took turns a starin' out the window at the darkness 'Til boredom overtook us, and he began to speak.


이봐 젊은이, 나는 평생 사람들 표정을 읽으며 살았어. 그들의 눈을 보고 패를 읽었지.
자네가 괜찮다면 솔직히 말하지, 자네 별 거없는 신세인 거 같은데
위스키를 좀 주면 내 자네에게 조언을 좀 해주지.
He said, "Son, I've made my life out of readin' people's faces, And knowin' what their cards were by the way they held their eyes.
So if you don't mind my sayin', I can see you're out of aces. For a taste of your whiskey I'll give you some advice."


자네 게임을 하려면 제대로 배우고 시작할 것이 있네
"If you're gonna play the game, boy, ya gotta learn to play it right.
자네가 반드시 알아야 할 건 이거야. 
언제 카드를 들고 있을지, 언제 패를 접을지, 언제 판을 털고 일어설지 알아야해.
그리고 카드판에 앉아서는 돈 세지 말게. 게임 끝나면 돈 셀 시간이 넉넉할테니.
​You got to know when to hold 'em, know when to fold 'em Know when to walk away and know when to run You never count your money,
when you're sittin' at the table There'll be time enough for countin', when the dealin's done

  일상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도박판과 다름없는 게 인생입니다. 작게는 오늘 무슨 옷을 입을지부터 크게는 대선에서 누구를 찍을지까지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언제 붙어볼지, 언제 포기할지, 언제 튀어서 다른 방법 찾아볼지 매순간이 도박처럼 긴장됩니다.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빡세게 돌리는 게 좋은지, 적당히 자율에 맡기는 게 좋은지, 돌리면 돌리는 대로, 자율에 맡기면 맡기는 대로 불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근시안적으로 입시만 보는 게 아니라, 자녀의 인생 전체를 놓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어쩔 수 없이 지금 던져야 하는 수(手)는 도박판과 마찬가지로 실력과 운으로 뒤섞여서 분간하기 힘든 안개속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도박입니다. 내가 좋은 패를 갖고 있어도 상대가 더 좋은 패를 갖고 있으면 지기도 하고, 나는 별거 없는 패를 가졌는데 상대편은 더 형편 없는 패를 가져 이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항상 더 어려운 것은 패를 언제 들고 있을지보다, 언제 접을지입니다. 물론 자기 확신의 화신 킹 리차드는 접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판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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