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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러시아 식민 치욕' 핀란드인들, 우크라 난민을 품다

"엄마, 나 캐나다로 이민 갈 거야!"

우리 집 막내가 갑자기 돌발 선언을 했다. 좀 엉뚱한 발언이기는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아이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음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벌써 한 달째 핀란드 신문은 전쟁 관련 기사로 도배되고 있다. 유류비와 식자재 가격이 많이 올랐고 주변에 헤드랜턴, 휴대용 라디오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핵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에 대비해 요오드 사재기가 벌어져 약국의 요오드는 동이 났다. 거리에서 마주친 동네 할머니는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나자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봐 주변을 긴장시켰다. 20세의 젊은 청년이 72시간 동안 버틸 수 있는 생필품을 배낭에 넣어두고 위기 상황에 대비 중이라는 기사도 나오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어느 방공호로 대피해야 하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핀란드 전국이 마치 유사 전시 체제에 돌입한 듯하다.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바짝 긴장하는 이유는 핀란드가 우크라이나와 지리적 거리가 가깝기도 하거니와 심리적 거리는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20년 전 출간된 핀란드 전 대통령 마우노 코이비스토(Mauno Koivisto)의 『Venäjän idea(뜻: 러시아의 생각)』란 책이 요즘 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책에 "러시아는 한번 정복했던 나라는 항상 자신의 영토라고 생각한다"는 문장이 있다. 19세기 초~20세기 초까지 100여 년 간 러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로서는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이다.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핀란드 일부에서는 러시아의 다음 타겟이 핀란드가 될 거라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1930년대 말,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은 핀란드를 병합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추운 겨울에 벌어져 '겨울 전쟁'으로 불린다. 핀란드 국민은 러시아 외상 몰로토프에게 주는 칵테일이라며 '몰로토프 칵테일'이라고 이름붙인 화염병을 던지는 등 맹렬하게 맞섰다. 결과적으론 소련이 승리했지만, 당초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었고 무엇보다 소련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약소국 핀란드를 침범했다는 비난이 쏟아지며 국제 연맹에서 축출되기도 했다. 반면 핀란드는 독립국가 지위는 지킬 수 있었지만, 일부 영토를 빼앗겼고 민간인 사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열심히 싸웠지만 끝내 아픈 역사로 남았다. 과거의 '겨울 전쟁'은 여러 측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흡사하다. 핀란드 국민들은 기시감을 느끼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남의 집 불구경'으로 여길 수 없는 것이다.

겨울 전쟁 당시 폭격으로 대피소로 이동 중인 헬싱키 시민들. (사진=SA-KUVA)
'겨울 전쟁' 당시 폭격당한 헬싱키 시가지 모습. (사진=SA-KUVA)
'겨울 전쟁' 당시 화염병으로 무장했던 핀란드군. (사진=Wikimedia)

핀란드 국가대표 농구 선수 유호 네노넨(Juho Nenonen) 씨는 우크라이나 난민 가족에게 헬싱키에 있는 집 전체를 내주고 자신과 가족은 지방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극히 이타적인 이같은 행동에 대해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과거 핀란드 헬싱키가 소련의 폭격을 받을 때 피난을 갔고, 할머니도 당시 부모와 생이별한 뒤 스웨덴으로 보내졌다. 전쟁에 휩싸인 핀란드의 부모들은 아이의 안전을 위해 스웨덴 가정으로 아이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 후 부모에게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로 핀란드 사람들은 여전히 눈물짓는다.

핀란드 국가대표 농구 선수 유호 네노넨 씨. (사진=HS 온라인 뉴스 캡쳐)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또한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고 있다. 핀란드 국민들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직접 해결사로 나서고 있다 . 올해 74세인 야르모 피까라이넨 (Jarmo Pikkarainen) 씨는 핀란드에 거주하는 가족들과 만나고 싶다는 우크라이나 용접공의 눈물어린 인터뷰를 보고 결심을 했다. 먼 길을 직접 버스를 운전하여 용접공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난민을 핀란드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가는 길에 난민들에게 전달할 구호품을 구매했고 8,000유로(한화 약 1,070만 원) 정도의 큰 돈이 들었다. 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찬 금액이었지만 주변 친척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난민들에게 구호품을 전달하고 그들을 옮기는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송할 버스와 함께 포즈를 취한 야르모 삐까라이넨 씨. (사진=aamuposti지 온라인 뉴스 캡쳐)
헬싱키 도착 후 한 우크라이나 난민과 포옹하는  야르모 삐까라이넨 씨. (사진=aamuposti지 온라인 뉴스 캡쳐)

스피드 보트 레이싱 선수인 티모 강사스티에 (Timo Kangastie 34세) 씨도 몇 주째 난민 수송에 전념하고 있다. 자신을 포함해 3명의 운전자가 2대의 버스를 교대로 운전하며 편도 20시간을 달려 난민을 싣고 오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고 한다. 한번 왕복하는데 4,000유로 (한화 약 535만 원)가 들고 모두 합쳐 경비로만 대략 25,000 유로(한화 약 3,350만원)가 드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난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모든 비용을 자신이 감당하고 있다. 다행히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사이 발트해를 넘는 뱃삯은 현지의 선박회사가 무료로 지원해주어 도움을 받고 있다. 티모 씨 본인도 부유한 형편은 아닌데 지금 난민들을 위해 쓰는 돈은 새 보트를 사려고 몇 년 동안 저축한 돈이라고 한다. 결국 그는 올해 새 보트를 장만하지 못해 레이싱 출전을 포기한 상태다.

티모 강가스티에 씨. (사진=iltalehti지 온라인 뉴스 캡쳐)
함께 도와주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티모 씨는 가장 왼쪽 분. (사진=티모 씨 인스타그램 캡쳐)

본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그가 난민을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티모 씨는 이웃을 도울 때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버스에서 난민들이 모두 함께 우크라이나 국가를 합창했을 때, 이동하는 동안 생일을 맞은 아이가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작은 선물을 받고 뛸 듯이 기뻐했을 때, 그에게 이런 기억은 돈보다 훨씬 값지고 소중하다고 말했다.

행복한 사람이 모두 남을 돕는 것은 아니지만, 남을 돕는 사람은 확실히 그만큼 더 행복해지는 것 같다. 5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된 핀란드의 대표 시민들로부터 또 한 수 배운 날이다.



#인-잇 #인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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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핀란드판 '인생은 아름다워'
인잇 이보영 행복을 연습하며 사는 전 셰프,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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