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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우크라이나 탈출한 355만 난민…우리는 수용할 수 있을까?

정부, "난민법상 난민 아냐" 난색

3,557,245

3,557,245명.

이 숫자는 유엔난민기구(UNHCR)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지난 21일까지 약 3주간 집계한 우크라이나발 국외 난민의 숫자입니다. 러시아군의 무차별 민간인 포격이 이어지자 전체 4천300만 우크라이나 국민 가운데 무려 8%에 이르는 숫자가 전쟁 시작 한 달도 안 돼 피난민으로 인접 국가에 쏟아졌습니다. 포화를 피해 떠나온 이들을 유럽연합(EU)에서는 일단 적극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EU에선 지난 3일 우크라이나 난민에 대해 '일시 보호명령제도'를 가동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피란민에게 최대 3년 거주 허가권과 취업 접근권을 내주기로 했습니다. 인접국인 폴란드에서는 아예 주민등록증을 발급해주고 무료 국영 의료 서비스와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18세 미만 자녀를 둔 가족에게는 1인당 우리 돈 14만 원 정도의 수당도 지급됩니다. 독일 외무장관도 이달 초 몰도바-우크라이나 국경의 피란민 캠프를 찾아 피란민 2천500명을 즉시 독일로 데려가겠다며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어린이 난민

어려움에 빠진 이웃 국가를 돕는 국제사회의 모처럼 온기 어린 이야기입니다만.. 난민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폴란드에는 200만 명 이상이, 루마니아에는 53만 5천 명, 헝가리에는 31만 2천 명이 입국했고, EU 비회원국인 몰도바도 36만5천 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장 크리스토프 뒤몽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이주부서장은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를 통해 "지난 달 24일부터 폴란드가 받아 들인 난민 수는 이미 2014~2017년 EU가 받아 들인 난민 전체를 넘어섰고, 헝가리로 들어온 난민 수는 헝가리가 연평균 수용하는 난민의 5배가 넘는다"고 말했습니다. 수용 한계치를 넘기다 보니 각국 여론도 심상찮습니다. 두 팔 걷어 부치고 피란민을 도왔던 폴란드에선 최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유입돼 범죄를 일으키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흑색 정보가 퍼지는 등 내부 갈등 조짐도 보이는 양상입니다. 외신에선 유럽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난민 위기를 겪고 있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피란민들

급기야 최근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선 이런 분석이 실리기도 했는데요.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만은 <'푸틴의 플랜B vs 바이든·젤렌스키의 플랜A'>란 제목의 칼럼에서 유럽으로 대규모 유입된 난민은 푸틴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항복을 받아 낼 수 있게 하는 플랜B 전략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지도부만 제거하면 우크라이나 국민이 러시아의 침공을 환영할 거라는 당초 플랜A가 먹혀들지 않았으니, 차선책으로 민간인을 포격해 대규모 난민 문제를 만들어냈단 겁니다. 프리드먼은 플랜B의 핵심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들에 대규모 난민이 유입하는 사태라고 했습니다. "유럽에 난민이 대거 유입되면 나토 회원국들이 결국 푸틴이 휴전을 위해 요구하는 어떤 조건에도 동의하도록 젤렌스키 대통령을 압박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어느 국가든 대규모 난민이 국내 정치적으로 큰 불안과 긴장을 야기해왔던 전례를 생각하면 일리 없는 얘기는 아닙니다. 서유럽 뿐 아니라 복지국가 북유럽에서조차 신나치주의를 앞세운 극우 정당을 부활하게 만들었던 주요 원인이 인구 대비 많은 수의 난민을 받아들였던 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요. 앞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 동·서유럽에 유입되는 난민의 숫자는 더 늘어날 테고, '난민'이 가진 국내 정치적 속성이 결국 푸틴 대통령의 셈대로 국제 정세에 영향을 주는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크라이나 피난민, 우리나라로 올 수 있을까?

당장은 끝이 안 보이는 전쟁입니다. 대규모 난민 사태가 전쟁의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하지 않도록 하려면 인접국뿐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적극적인 피난민 수용에 나서 짐을 나눠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실제로 대규모 피난민 발생 이후 캐나다, 뉴질랜드, 필리핀 등 40개국 가까이가 일정 숫자의 난민을 수용하겠단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그간 난민에 대해 극도로 폐쇄적이란 평을 받았던 일본도 총리가 나서서 "난민을 신속하게 수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요. 이후 실제로 우크라이나 피난민에게 1년간 체류하며 일할 수 있는 '특정 활동 비자'를 발급하고 입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후에도 관방장관 등이 나서 "피난민이 문제없이 입국할 수 있도록 검토하겠다"고 거듭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외교부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과 관련한 그 어떤 입장도 나온 적이 없습니다. 지난달 말 우리나라에 이미 체류 중인 우크라이나 인 3천800여 명에 대한 체류를 법무부가 한 차례 특별 연장해 준 정도입니다. 그런 와중에 지난 22일 대한변호사협회에선 난민 수용 촉구 성명을 냈습니다.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인도적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에 적극 나서라"는 내용인데요, 기존 인원 체류 연장으로는 부족하고 "국제적 위상과 경제 규모에 걸맞게 인류 공통의 기본적 인권 보호와 국제 인도주의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을 적극 수용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는 촉구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정부 당국에 물어봤습니다.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에 관한 논의가 내부적으로 이뤄지고는 있는 건지를요. 정부 당국은 "논의되고 있는 바가 없다"고 답했습니다. 설명한 이유는 여러가지였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국행 희망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난민법상 제3국에선 난민 신청이 어렵고 우리나라 국경까지 와서 난민 신청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 난민 신청자나 우리나라로 정착하길 희망하는 수요, 요청이 없어서 이걸 논의할 여지가 없었단 겁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몇 명을 난민으로 받겠다는 식의 쿼터를 제시하는 것도 우리 정부 정책상 맞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들을 헬기로 실어 나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나라 난민법상으로는 이들을 난민으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도 덧붙였습니다.
 
난민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난민의 지위에 관한 1951년 협약」(이하 "난민협약"이라 한다) 및 「난민의 지위에 관한 1967년 의정서」(이하 "난민의정서"라 한다) 등에 따라 난민의 지위와 처우 등에 관한 사항을 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이하 "상주국"이라 한다)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한다.
제5조(난민 인정 신청) ① 대한민국 안에 있는 외국인으로서 난민 인정을 받으려는 사람은 법무부 장관에게 난민 인정 신청을 할 수 있다. 이 경우 외국인은 난민인정신청서를 지방출입국ㆍ외국인관서의 장에게 제출하여야 한다. <개정 2014. 3. 18.>


아프가니스탄 사례처럼 우리나라 정부 기관 등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특별기여자' 형태로 받아 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당국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례는 우리와 함께 일했다는 이유로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박해나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었던 특수 사례이고, 우크라이나는 전쟁 피란민이라는 일반적 상황이기 때문에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현재로서 국내 체류 우크라이나인의 가족을 초청해 사증을 발급해주는 정도가 최선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피란가는 우크라이나 시민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관계부처들 설명이 꽤 한가한 소리로 느껴졌습니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쪽에서 특별한 요청이나 수요가 없어 검토를 안 했다는 건데…. 난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우리의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국행 희망자도 생기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입니다. 우리 난민법이 준용한 UN 난민협약에서도 내전, 혹은 전쟁은 '난민'의 인정 사유가 아닙니다. 개별 국가의 국내법 사정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적 난민 지위 등을 따지기 이전에, 가족을 잃고 고향을 잃고 쫓겨 온 피란민들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비록 그게 떠밀리듯이었더라도요) 임시 지원 조치를 마련하고 이들을 다소 얼마 간이라도 난민으로 수용하겠단 입장을 제각기 표명한 것일 테지요. 국제사회의 책무로 느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관계부처들이 각자 검토해서 하고 말고 할 사안은 아닙니다. 정치적 결단이 있고 난 뒤에야 각 부처에서 후속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거겠죠. 결국은 정치적 입장 표명이 필요한 문제인데 제주도 예멘 난민의 전례에서 보듯 난민이 워낙 우리나라 국내 정치적으로 부정적 파급력이 큰 사안인 만큼 지방선거를 앞둔 지금, 안타깝지만 어느 한 쪽에서 구태여 멀고 먼 우크라이나 땅의 피난민을 적극 수용하자는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결국, 참담한 이번 전쟁이 끝나면 우리나라는 "한때 국민 대다수가 피난민이었지만, 경제 10위 대국이 되어서는 피난민을 외면한 나라"라는 부끄러운 꼬리표를 달아야 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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