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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박주영 법정의 얼굴들 [북적북적]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박주영 법정의 얼굴들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32 :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박주영 <법정의 얼굴들>

"당연한 말이지만, 단 한 사람도 놓쳐선 안 된다. 모든 명제는 딱 한 개의 반증으로 깨진다. 펭귄이 날지 못한다는 명제는, 하늘을 나는 펭귄 한 마리만으로 깰 수 있다. 마약을 이겨낸 사례가 단 한 개만 있어도 마약중독자의 치료는 포기하기 어렵다. 그런 사례가 몇 개만 모이면 절대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수사(修辭)가 아니라, 나는 정말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한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 <단약한 의지>에서

대선이 끝나고 열흘, 어쩌면 '내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양대 후보의 득표 수는 비등했고 전후로 어수선했습니다. 결과가 정해졌으니 이젠 대립보다는 통합으로 나아가는 시간이 마련되면 좋겠으나 쉽진 않겠죠.

흔히 당선된 후보에게 던진 표가 아니면 죽은 표 된다고 하여 '사표'라고 부르죠. 통상은 소수정당 후보의 표를 일컬었는데 정의대로라면 당선 후보가 아닌 이에게 한 투표는 전부 사표죠. 이번 선거 투표수 3천4백만 중에서 당선인 표를 제한 1천7백만 표가 사표가 된 셈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 표의 의미가 죽어서 사라진 건 아니라는 점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석패한 후보에겐 다음 행로를 모색할 기회가 있고 진보정당 후보들의 득표는 나름의 밑거름이 될 것이며 허경영 후보의 28만 표 또한 적잖은 의미가 있습니다. '승자독식'이라고 해도 온전한 독식만은 아닌 겁니다.

그러고 보면 판결도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싶었습니다. 형사 사건에 유죄냐 무죄냐 하면 단순한 듯하지만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징역형인지 벌금형인지, 실형인지 형이 유예되는지... 판결문 내용에 따라서도 다르게 느껴지는 면들이 많습니다. 결국은 사람의 행위에 대해 사람이 판단하고 결정하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하나의 판결이 묵직한 건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인 듯도 싶습니다. 오늘 가져온 책은, 판결에 가려져 있는 사람에 주목한 한 판사와, 그 사람을 담고 있습니다. 박주영 판사가 쓴 <법정의 얼굴들>입니다.

작가의 전작이자 첫 책인 <어떤 양형 이유>를 2년 반 전에 읽었습니다. 판사는 주로 판결문을 쓰겠으나 책을 쓰는 게 그렇다고 아주 드문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전의 책이나 이번 책이나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판사는 고독하다, 혹은 고독해야 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피고와 피고인, 검사, 원고, 변호사, 갖은 증인들의 말을 듣고 관련 증거와 서류를 검토하고 배심원의 의견도 듣지만 최종 판단은 본인이 해야 합니다. 기댈 곳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판단의 책임은 자신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 과정과 근거를 글로 정리해 남겨야 하고 이를 낭독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직업군과 유사한 면도 있습니다.
 
"나는 판단자임과 동시에 관찰하고 기록하는 자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내가 본 세상의 일부가 사라진다. 고통과 슬픔을 넘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기억뿐이다. 고통은 우리가 건널 디딤돌이다. 잊는 순간 고통은 사라지겠지만 딛고 건널 디딤돌도 사라진다. 아니, 아예 건널 생각조차 잊어버린다. 기록만이 고통과 절망의 시공을 건너가는,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길이다. 이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프롤로그>에서

조금 놀라웠던 건 그러고 보니, 판사와 기자, 특히 방송기자와 유사한 면이 적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럼에도 판사의 책임감이 더욱더 막중할 것 같습니다. 기자의 취재와 기사에도 판단이 개입되고 때로는 그 파급력이 엄청날 수도 있지만 그 기사가 어떤 법적 효력을 지니는 건 아니니까요.
 
"비록 하찮아 보일지라도 생의 기로에 선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은, 그저 그에게 눈길을 주고 귀 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지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런 믿음을 그에게 심어줄 수만 있다면, 그는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삶 역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한 개의 이야기인 이상,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 그 이야기는 멈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혼잣말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혼잣말하는 사람들>에서

'혼잣말하는 사람들'에서 다룬 자살방조미수 사건은 실제 박주영 판사가 2019년 말 처리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대통령 탄핵 같은 역사적 사건의 판결문이 아닌 이상, 일반 형사사건 판결문이 화제가 되거나 회자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박주영 판사가 쓴 판결문은 그 드문 경우에 속할 때가 있습니다. 판결문을 일종의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판사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언젠가 코로나19도 어떤 형태로든 수습되고 세상은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가 존재한 이래 범죄는 종식되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외부 바이러스에 의한 공격이라면, 범죄는 인간 DNA에 내재된 특성이다. 코로나19 시대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살해되고, 학대받고, 강간당할 것이다. 인류라는 바이러스가 몰고 오는 범죄의 팬데믹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취할 최선의 태도는, 꼼꼼히 기록하고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록과 공감이 소수에게만 집중되도록 해선 안 된다. 그 소수는 반드시 무감해지거나 부서지기 때문이다."
-<어떤 부고>에서

이 책은 '공감'과 '선의'로 마무리됩니다. 박주영 판사의 (조금) 유별나 보이는 말과 행동을 규정하는 단어 두 개가 이 '공감'과 '선의' 아닐까 합니다. 이는 판사뿐 아니라 기자도 그렇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덕목이 될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고 하지만) 선한 의도와 마음으로 남의 아픔을 내 것에 가깝게 느끼면서 공감하는 태도, 어디에나-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출판사 모로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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