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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편견'과 싸워온 야구 인생 25년, 유희관

[그사람] '편견'과 싸워온 야구 인생 25년, 유희관

윤춘호(논설위원)

작성 2022.03.12 07:30 수정 2022.03.12 09:0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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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편견과 싸워온 야구 인생 25년, 유희관

1. 반 박자 빠른 은퇴

지난 1월 은퇴를 선언하고 두 달이 넘게 지났지만 25년을 운동한 몸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에 충분한 시간은 아니다.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는데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 될 거 같은 마음이 든다고 했다.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때가 있어요. '지금 운동하러 가야 되는데' 그러다가 정신 차려 생각하면 '나 은퇴했지' 이러는 거죠. 제 몸이 25년 동안 야구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활에 아직은 적응이 안 되는 거 같아요."

지난해 하반기 이미 마운드에 계속 서는 게 힘들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볼이 더 이상 타자들에게 통하지 않고 있었다. 타자들은 이 사람 볼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지난해 5월 9일 99승을 거둔 뒤에 대망의 100승까지 가는 데 넉 달 열흘, 130일이 걸렸다. 아홉 수가 아니라 쌍아홉 수라 그런 거라며 지인들이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1승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마운드에 서기만 하면 승리는 당연한 것처럼 따라오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승리 투수가 되는 게 점점 아득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해 두산의 가을야구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봤다. 실력이 부족하니 저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프로야구선수에게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1군 선수, 선발투수, 승리 투수 같은 말들이 더 이상 당연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때부터 은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했다. 야구를 시작한 이후 큰 부상이 없었고 아직 체력도 버틸 만했다. 두 해 정도만 더 뛴다면 장호연이 가지고 있는 109승이라는 두산 투수 최다승 기록도 깰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내려놓을 때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늦으면 자신의 모습이 우습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팀에도 누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왔다. 남들의 요구에 떠밀려 내려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슬펐다. 지난 1월 8일 은퇴를 발표하고 집에 가서 혼자 펑펑 울었다.

두산베어스 투수 유희관 (사진=연합뉴스)
베어스 유니폼을 벗기로 한 날, 집에 가서 혼자 펑펑 울었다

2. 유망주 소리 한 번 못 들었던 중·고 시절

공을 가지고 노는 일은 다 잘했다. 축구도 잘 했고 농구는 더 잘했다. 키는 작았지만 운동 신경이 남달랐고 어지간해서는 남에게 주눅들지 않는 성격도 운동하기에 적당했다. 여러 가지 운동 중에서 야구는 특히 더 좋았다. 학교만 끝나면 집 근처 주차장으로 달려가 동네 형들과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강속구를 뿌려대는 LG 이상훈 투수가 이 사람의 영웅이었다. 이상훈을 보기 위해 LG 트윈스 연간 어린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틈만 나면 1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들고 잠실야구장으로 달려갔다. 그 돈으로 햄버거 하나 사 들고 야구를 보면서 주말을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친구가 야구선수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 유니폼이 너무나 멋져 보였다.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사업을 하는 아버지는 하나뿐인 외아들이 공부해서 대학 가고, 월급 받아 사는 평범한 인생을 살기를 원했다. 야구선수를 하기에는 아들 체격이 너무 작았다. 초등학교 때 키순으로 출석을 부르면 앞에서 두세 번째였다. 몇 날 며칠을 울며 졸랐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었다. 야구를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부모님은 야구선수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평범한 선수였다. 야구부가 있는 서울 방배초등학교로 전학까지 하면서 야구를 시작했지만 일찍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170cm가 안 되었으니 운동선수 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도 작은 편이었다.

"중학교 때 부모님이 제가 키도 안 크고 실력도 남들보다 부족하고 하니까 저 모르게 감독님과 면담을 여러 번 하셨더라구요. 어차피 안 될 거 같은데 희관이 야구를 그만 둬야 될 거 같습니다. 그때 감독님이 '아직은 어리고 나중에 키가 커서 실력이 한순간에 올라갈 수 있으니 저를 믿고 한번 해보자'라고 하셨대요."

은사를 따라 고등학교 때 또 전학을 했고 그 학교에서는 나름 에이스였지만 개인 성적도 시원치 않았고 그가 다녔던 장충고등학교 성적도 그저 그런 편이었다. 전국대회 16강 진출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 흔한 유망주라는 말조차 듣지 못한 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드래프트 시장에서 나섰지만 어떤 팀도 이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실망이 컸다. 살면서 겪은 최초의 좌절이자 패배였다.

"프로야구선수라는 꿈을 가지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노력을 했는데 제가 가고 싶어하는 데를 못 간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막막했던 거 같아요. 언젠가는 프로에 갈 수 있을까, 만약에 여기서 야구를 그만 두면 뭘 해야 되지,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니 대학을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할 수도 없었어요. 여기서 야구를 그만 두면 뭔가 패배자가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누구나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 같은 강속구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타고 나는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사람의 최고 구속은 130km를 넘기 어려웠다. 투수가 아닌 타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런 적은 없다고 했다. 크게 나아질 거 같지 않고 달라질 거 같지도 않았지만 야구를 포기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고 무엇보다 야구를 너무 좋아했다.

그사람 유희관 편

3. 선택받지 못하는 아픔을 아는 사람

중앙대학교 야구부에 들어가면서 키가 부쩍 자랐다. 입학할 때는 170cm가 안됐는데 졸업할 무렵에는 180cm까지 성장했다. 체중도 늘면서 볼의 속도도 나아졌다. 그래 봐야 최고 구속이 130km를 겨우 넘는 정도였다. 자신은 선천적으로 140, 150km의 공을 던질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속도가 안 되면 제구력으로 승부를 보자는 생각을 했다. 속도는 크게 늘지 않았지만 공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하면서 대학 야구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대학 4년 통산 2점대의 방어율을 보였고 중앙대의 에이스로 2008년 전국대학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2007년 야구월드컵에서는 대학 선수로는 유일하게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다. 대학 야구에서는 손에 꼽히는 투수였지만 그래도 볼이 느린 선수, 투수로서 결정적인 한계가 있는 선수라는 편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친구들과 함께 피시방에 가서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상황을 지켜봤다. 그 때도 지명 받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자기 앞으로 41명의 선수들의 이름이 불린 뒤에야 유.희.관.이라는 이름 석 자가 호명됐다. 두산이 이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두산에서 제 이름을 지명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에 꽉 막혀 있던 것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어요. 너무 기뻐서 부모님께 전화를 했죠. 두산에 지명됐다고 하니까 부모님도 울고 저도 같이 울고 너무 좋았어요."

하늘의 별을 딴 기분이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는 없었다. 동기들 가운데 지명을 받은 사람보다 지명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제 동기들 8~9명 가운데 저랑 다른 친구 한 명만 지명이 되고 나머지는 지명이 안 된 겁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천국과 지옥이에요. 저는 정말 좋아서 날아갈 거 같은 기분인데 좌절하고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보면 제가 마냥 좋아할 수는 없는 거죠…. 스포츠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고 이게 극명하게 갈리니까요."

선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아픔, 이기지 못하는 선수의 아픔을 안다. 자신의 프로야구 1군 첫 경기를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2009년 5월 이야기인데 어쩌면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할까 싶었다. 그날 부산 사직구장을 꽉 채운 2만 관중 앞에서 이 사람은 잔뜩 얼어붙었다. 가뜩이나 느린 볼이 이 날은 더 느렸다. 불과 두 타자를 상대하고 강판당했다.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정말 한심하다, 정말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야구인데 그게 뭐라고 거기서 떨고 있냐… 정말 제 스스로가 한심하더라고요. 기회가 누구한테나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2군에만 있다가 그만두는 선수들도 많거든요. 그런데 저는 남들보다 4년이라는 시간을 (대학에서) 허비했잖아요. 제가 야구를 못 해서… 나이는 점점 먹어가고 팀에서는 기회를 많이 안 주고. 게다가 저는 그때까지 군대에 갔다 오지 않아서 제가 뭔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언제 잘릴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토요일 날 1군으로 올라와서 불과 두 타자 상대하고 월요일 날 2군으로 방출되었다. 이 사람이 다시 프로 1군 무대에서 승리 투수의 기회를 잡는 데는 그로부터 4년이 더 걸렸다.
 

4. 피나는 노력? 그런 것은 없었어요

2013년 5월 3일 엘지전 선발은 원래 니퍼트였다. 경기를 앞두고 니퍼트가 갑자기 담이 결려 출전이 어려워졌고 중간계투 요원이던 이 사람이 부름을 받았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경기가 제게는 가장 의미 있는 경기가 된 거 같아요. 첫 단추를 잘 끼웠기 때문에 그게 이어져서 101승이란 기록까지 온 거 잖아요. 니퍼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니퍼트 만나면 '네가 담이 안 결렸으면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 네 담한테 항상 고맙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후로는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그해 10승을 거뒀고, 2015년에는 18승으로 다승 2위, 2016년에는 15승을 거두며 두산의 선발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2020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올렸다. 이 기록은 한국 프로야구 40년 역사 가운데 이 사람을 포함해 오직 4명의 투수만이 가지고 있는 기록이다.

2013년 시절 양의지와 환호하는 유희관(왼쪽). 이때부터 승승장구였다 (사진=연합뉴스)

-2015년 18승, 2016년 15승 할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타자들이 내 볼 제대로 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까.
"있었어요. 그때는 있었습니다. 일단 팀원들이 워낙 좋아서 뒤에서 잘 막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요. 제 공이 느리다고 해서 뭔가 주저하거나 주눅들거나 기 싸움에서 지고 들어가면 제가 아무리 좋은 공을 가지고 있다 해도 저는 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항상 마운드에서는 남들보다 빠른 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경기에 임하려고 했습니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스트라이크존을 9개로 나눠 자신이 원하는 구종과 구질로 원하는 곳에 꽂아 넣을 자신이 있었다. 가상의 점을 찍어 놓고 거기에 공을 집어 넣는다는 기분으로 던졌다. 관중들은 시속 130km가 되지 않는 이 사람 볼을 왜 못 치느냐고 아우성이었지만 타자들은 스피드건에 찍히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느껴지는 이 사람 볼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실 3년 차까지는 다른 선수들이 유희관 선수 공을 못 치는 것을 제일 자존심 상해 했었어요. 그런데 3년 이상 지나고 나면 선수들끼리는 리스펙트하는 게 생기거든요. 1~2년은 운이 좋아서 할 수 있지만 3년 이상 꾸준히 성적을 내면 그때는 절대 운이 아니고 진짜 실력이라고 인정을 하는 거지요." / 이예랑 리코스포츠에이전시 대표

투수로서 볼 스피드가 느리다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부족한 재능을 메꾸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했으려니 싶었는데 이 사람은 그런 것은 없다고 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나 눈을 감고 있을 때나 오직 야구 생각뿐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 않단다.

"저는 야구장 떠나서는 야구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요. 왜 그러냐면 할 때만 해도 벅차고 그때만 집중해도 힘든데 굳이 야구장을 떠나서도 야구 생각을 하는 것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되는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야구장 나와서도 야구 생각을 많이 하겠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놀 때는 열심히 놀았다. 술도 좋아한다. 술 사주겠다는 '형'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도 단칼에 자른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지만 관계 자체를 끊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당신처럼 노력 한다고 누구나 8년 연속 10승 이상도 할 수 있고 100승 투수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뭔가 당신만의 비결이 있지 않느냐고 거듭해서 물었다. 남들보다 성과를 냈다면 각별한 노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을 듣고 싶었는데 다소 답이 궁한 표정이었다.

이 사람은 묻는 이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잘 아는 눈치였다. '부족한 재능으로 정상에 서기 위해 저는 죽으라고 노력했습니다. 남들이 100개를 던질 때 저는 200개의 볼을 던졌고 제구력을 갖추기 위해 잘 때도 손에서 공을 놓지 않았습니다' 같은 말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말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텐데 이 사람은 굳이 그 말을, 그런 식의 표현을 하지 않으려 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남들보다 그렇게 더 노력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남들이 저보다 더 노력했던 거 같아요.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만들려면 만들 수 있죠.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주작하면 안 되잖아요. 솔직하게 해야죠. 저는 솔직한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뭐 그렇게 안 했으면 안 한 거고. 물론 남들 보이지 않게 노력을 했다면 한 거지만 누가 있는 데서 보여주기 식으로 했던 것은 아닌데요 어차피 그거는 누구나 하는 거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아요."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32명만이 이룩한 100승 투수의 금자탑을 쌓았다면 천재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당신이 천재인 거 같다고 했더니 지금까지 37년 살면서 천재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고 했다. 유별난 노력을 하지 않고도 남들이 거두지 못한 성과를 얻었으니 어쨌든 '천재' 아니냐고 했더니 '맞네요, 그럼 천재네요'라고 받았다. 굳이 자기를 천재라고 부르고 싶으면 불러도 되지만 자기 정도의 재주를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고 싶은 듯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주말이면 잠실구장을 찾던 어린이야구단 회원 출신이다. 서울 강남에서 태어나 풍요와 여유를 만끽하며 자란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쌍팔년도식 성공 스토리를 뒤집어 씌우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나는 노력', '뼈를 깎는 훈련' 같은 말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이 사람은 그런 것은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운동을 안 했으면 어떻게 그런 성적을 냈겠어요. 그렇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거죠. 제가 매일 집에서 놀다가 나가서 경기를 한 것은 아니잖아요. 제가 남들보다 노력이 부족해 보이고 부족할 수 있었지만 저만의 노력과 저만의 재주가 있는 거죠. 운도 많이 따랐고요."

한 해 드래프트 시장에 나오는 프로야구 지망생이 1천 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100명 정도가 프로야구팀의 지명을 받는데 이들 중에서 1군 무대에서 제대로 활약을 하는 사람은 1~2명에 불과하다. 스타 대접을 받는 선수는 이들 가운데서도 극히 소수다. 야구를 좋아하고 야구에 재주가 있다는 사람들이 경쟁을 통해 추려지고 추려지는 과정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이 사람에게 재주와 노력에 못지 않게 운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도 같다.
 

5. 편견과 싸워온 사람

운동선수 몸은 근육질이어야 한다는 편견, 재능이 부족한 사람은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편견,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 공이 빠르지 않으면 투수를 할 수 없다는 편견, 운동선수는 운동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편견과 싸워온 사람이다. 운동선수의 몸은 어떠해야 한다는 상(像)이 있다. 종목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배가 나온 운동선수는 우리들 머릿속에 없다. 이 사람의 몸은 그런 대중의 기대를 배신했다.

2020 포스트시즌 플레이오프 첫 경기 하루 전 몸 푸는 유희관(왼쪽)-플렉센 (사진=연합뉴스)

-유희관 선수의 몸이 운동선수의 전형적인 몸과는 거리가 있잖습니까.
"원래 체형이 좀 그런 거 같고요. 또 먹는 걸 워낙 좋아해요. 운동량이 많으면 힘 드니까 더 먹는 거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술 마시면서 점점 살이 더 찐 거 같습니다. 대학교 때까지는 술을 못 먹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술을 먹게 되었고 먹다 보면 밤 늦게 먹고 거기에 야식 먹게 되니 살이 찐 거 같습니다. 제 몸매 때문에 악플 같은 것도 있고 편견도 많았어요."

근육질 몸에서 가장 좋은 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 가장 좋은 공을 던질 수 있는 몸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어떤 몸 상태에서 베스트 컨디션이 나옵니까.
"92kg 정도가 제일 좋은 상태 같아요. 저는 컨트롤 투수잖아요. 컨트롤이 좋으려면 밸런스가 좋아야 되는데 살이 찌면 밸런스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 체중을 유지하려고 많이 노력했던 거 같아요."

남들의 관심을 받는 것에 익숙하고 그것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다. 운동선수가 안 되었으면 더 일찍 연예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 같지가 않다. 어디에서도 눈에 띄는 헤어 스타일만 봐도 이 사람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머리 스타일은 왜 그렇게 하셨어요.
"몇 년 전에 했는데 이게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요. 저만의 트레이드 마크랄까. 머리를 많이 기억하시더라구요."

이 사람 머리 스타일을 개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남의 관심만을 의식하는 사람, '관종'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운동선수는 운동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터뷰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응하고 예능프로그램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야구하는 모습도 중요하지만 야구 외적으로 뭔가 다른 것을 보여드리는 것도 야구 팬들에게 재미를 드릴 수 있는 요소인 거 같아요. 운동선수들은 운동만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달라진 거 같아요."

그사람 유희관 편

이 사람 야구 인생은 편견과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에서 이긴 적도 있지만 진 적도 있다. 볼이 빠르지 않으면 국제 대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편견 때문에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지 못했다. 2015년 18승을 거두며 다승 2위를 했을 때조차 대표 선수로 선발되지 못했다.

-국가대표 못 하셨는데 많이 섭섭하지요?
"아쉽죠.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라면 자기 가슴에 태극마크 다는 거잖아요. 저도 이제 18승, 15승 할 때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최종 엔트리에는 뽑히지 못했죠. 여기서도 뭐 그런 거죠. '공이 느려서 국제 대회 나가면 안 통할 것이다' 그런 편견이 지배적이었던 거 같아요. 제가 부족했으니까 안 뽑혔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많이 아쉽죠. 국가대표가 되었더라면 제 야구 인생에서 좋았을 거 같고 제 야구가 더 늘 수도 있었고 나라를 대표해서 나가는 거니까 그런 부분에서 아쉽죠.

필요한 단어를 필요한 대목에 쏙쏙 꽂아 넣는 솜씨가 대단했다. 서운하다, 아쉽다, 섭섭하다라는 말의 미묘한 차이를 충분히 살려서 이야기했다. 같은 아웃 코스 직구라도 타자에게 다르게 보이도록 던지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비슷한 뜻이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단어를 골라서 말을 했다. 입담이 좋은 사람이니 허풍이나 과장도 적당히 있으려니 했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6. 무플보다는 악플이 나아요

악플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13년의 선수 생활 중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한 적이 없고 팬 서비스도 모범적인 선수였지만 댓글 등을 보면 비난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 이 사람에 대한 공격은 대개 이런 논리다. "너 같이 느린 볼을 던지는 선수가 무슨 100승 투수야", "네 실력으로 8년 연속 10승을 거둔다는 것은 말이 안 돼"라는 식이다. 뭔가 부정한 음모가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희관존'이다. 심판들의 눈을 속이거나 술수를 써서 볼을 스트라이크로 판정받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사람에게만 유독 스트라이크존이 후했다는 것이다.

"저는 타자들이 치기 어렵게 더 정교하게 던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들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제가 남들 뻔히 보이게 스트라이크존 한가운데 던졌으면 희관존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제가 승부욕이 강하다고 했잖아요. 제가 스트라이크 판정이 나오지 않으면 되게 아쉬움을 표시한 적이 많아요. 아쉬움에 주저앉을 때도 있고…. 그런데 그런 동작들은 제가 경기에 너무 집중해서 생긴 행동이거든요."

굳이 비난을 하자면 정교하게 공을 던진 이 사람이 아니라 그 공을 치지 못한 타자들이 그 비난을 들어야 될 일인데 엉뚱하게 이 사람이 돌을 맞는다. 이 사람을 프로야구 입문 때부터 지켜본 야구 캐스터 정우영의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유희관 선수는 다른 투수보다 15km가량 느린 볼을 던지는 선수잖아요.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야 다른 투수와 비슷비슷하게 설 수 있는 거죠. 그런 상황에서 유희관 선수는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활용해야 했는데 그런 아쉬워하는 표정 같은 것도 유희관 선수가 동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 정우영 SBS미디어넷 스포츠 캐스터

악플 다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오기를 품고 더 노력했다. 그 덕에 악플이 꽤 줄었다고 했다. 이제는 악플에서 해탈했다고, 무플보다는 악플이 낫다며 웃었지만 웃는 그 표정이 꼭 웃는 것은 아니었다. 말을 들어보면 마음에 상처가 많은 듯했다.

"만약에 본인의 가족이나 친구라면 그렇게 악플을 달까.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보신다면 그렇게 쉽게… 표현의 자유라는 게 있지만 이런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런 것도 좀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은 있는 거죠."

대화 중에 다른 야구선수 이야기가 나왔다. 필자가 그 선수에 대해 그리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더니 자신은 생각이 다르단다. 이런 말은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던지는 말 한마디에 마음을 다쳐본 일이 많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이 사람 이야기가 뜨끔했다.

"저는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나기 전에, 알기 전에 판단하기보다는 겪어보는 거랑은 다르거든요. 겪어보고 만나보고 대화해보면 이 사람이 갖고 있던 생각들도 알 수 있고 내가 생각하던 거랑 다른 좋은 이미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나쁜 일은 빨리 잊으려 하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애쓴다. LG 김현수와 절친이다. 두산에 입단했을 때부터 수시로 어울렸고 김현수 집에서 자는 일도 잦았다. 김현수는 일찍 두각을 나타내며 스타로 등극했고 가는 곳마다 팬들이 환호했다. 그때 이 사람은 2군 소속이었다.

'절친' 김현수와 함께. 2015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 당시 (사진=연합뉴스)

"같은 야구선수인데 김현수한테는 사인해달라고 하고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그런데 저는 멀뚱멀뚱 서 있는 거예요. 저는 못 알아보는 거죠. 저한테 핸드폰 주면서 김현수 선수랑 자기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그러면 사진 찍어드리면서 좀 더 잘해야겠다 저도 같은 야구선수인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런 절치부심 때문이었을까, 멀어만 보였던 스타의 길에 올라섰고 돈과 명예가 자연스레 따라왔다. 입단 첫해 연봉 2천400만 원으로 시작한 이 사람 연봉은 몇 년 동안 거의 수직으로 상승했다. 2013년 2천600만 원이 그다음 해 1억 원, 그다음 해 2억 원, 그다음 해는 4억 원이 되었다. 2017년에는 5억 원을 받아 FA를 제외한 선수들 가운데 최고 연봉 선수가 되었다. 프로스포츠 세상에서 연봉이 높다는 것은 군대에서 계급이 높은 것과 같은 뜻이다. 성적이 좋고 그에 따라 연봉이 높으면 대우가 달라진다. 감독이나 프론트도 이 사람을 특별히 배려했고 그것을 이 사람은 즐겼다.

-해마다 연봉이 수직 상승할 때 세상이 전부 내 것 같은 기분이 드나요.
"그땐 뭐 두려울 게 없었죠. 아쉬울 것도 없고…. 잘할 때는 제가 뭘 해도 아무 말 안 하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남들이 봤을 때 제 행동이 바뀌었을 수도 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좀 더 연구를 하고 노력을 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보수가 성과에 비해 적다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많다고 했다.

"주어진 보상이 저는 많았던 거 같아요.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많은 사랑을 받았고 혜택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뻔한 이야기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진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항상 사소한 거라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7.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습니다

-지난해 같은 경우는 2군에 있던 시간이 길었는데 그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2군에 가 있으면 본인이 초라하게 느껴지나요.
"아니 초라하지는 않아요. 그게 현실이죠. 예전의 유희관, 잘하던 시절의 유희관은 다 소용없어요. 냉정하지만 사람들 눈이나 머릿속에도 예전은 없어요. 사람들한테는 지금의 유희관이 중요한 거예요. 예전의 영광 그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못하면 사람들은 떠나 버리기 마련이거든요. 그래서 초라하지는 않았고 이게 현실이구나. 마무리를 좋게 하자고 생각했어요."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했다. 자기만의 트렌드를 제시했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느린 볼로도 성공한 자신을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단점을 극복하려고 애쓰지 말고 장점을 극대화하라고 조언했다.

"저를 롤 모델로 삼는다고 이야기하는 선수들의 인터뷰 기사를 가끔 봅니다. 그런 거 볼 때 기쁘죠. 공이 느리다고 해서 과연 이 선수들이 야구를 포기해야 하는가? 프로에 가서 과연 내가 성공할 수 있나 하는 고민들이 있을 때 제가 느린 공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을 믿고 열심히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두산 베어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을 지명해준 팀, 자신이 8년 연속 10승을 거두었던 팀, 그 팀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 거라고 했다. 나중에 두산 베어스 감독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두산에서 코치 제의가 있었는데 25년 동안 쉼없이 달려와서 다시 똑같은 생활을 하기에는 겁도 나고 많이 지쳐 있었고…. 그동안 야구를 하면서 지쳤고 수많은 편견,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 이런 것 때문에 많이 지쳐 있었어요. 제가 유니폼을 입고 바로 코치를 하기에는 자신이 없고 지쳐 있었어요. 그래서 야구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서 언젠가는 돌아오겠다 그랬죠."

그사람 유희관 편
그사람 유희관 편

영리하고 재치 있는 운동선수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표현을 해야 할 사람이었다. 폭소가 이어지던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런 당부를 했다.

"제가 어떻게 비쳐질지 조금 걱정이 되는데요…. 승부욕이 너무 강해서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강했고 그래서 자기밖에 모르는 선수라고 비춰질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팀을 위하고 팀의 승리를 위하고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매일 이기고 싶어했던 선수, 유쾌했던 선수로 기억해주면 고맙겠습니다."

3월 12일 시작되는 프로야구 시범경기를 선수가 아닌 해설위원으로 준비 중이다. 가슴이 설렌다고 했다.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진심이라는 것을 야구 해설에서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밝고 유쾌한 모습은 예능에서만 보여주고 야구 해설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역시 반전의 매력, 반전의 힘을 아는 사람이다.

※ 유희관 해설위원과의 인터뷰 풀영상은 오늘(12일) 밤 8시 25분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최초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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