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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83세지만 강력한 배트맨…우리에겐 없을까?

[씨네멘터리] 83세지만 강력한 배트맨…우리에겐 없을까?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이주형 기자

작성 2022.03.06 09:13 수정 2022.03.06 11:1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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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83세지만 강력한 배트맨…우리에겐 없을까?
  배우 이정재 씨가 말 잘했습니다. 지난 월요일, LA에서 열린 미국배우조합상 시상식. 《오징어게임》으로 TV드라마시리즈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고 나서 그가 말했죠. 한국 콘텐츠, 원래부터 볼만했다고요. 
 
“(한국에는) 오징어게임만큼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 콘텐츠는 기승전결이 빠르고 캐릭터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시나리오도 많습니다”... ”좋은 시나리오를 토대로 자연스럽고 깊은 표현을 보여주는 많은 연기자가 있습니다”
 
기승전결이 빠르다고 꼭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정재 씨의 발언은 한국 영상콘텐츠의 탁월성에 대한 이 시대 한국인의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좋은 영화들을 많이 만들어왔고, 자국 영화가 전체 시장의 50% 넘게 점유한 세계에서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주춤하고 있지만요.
 2년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받을 당시 봉준호 감독도 말했습니다. “1인치 정도 되는 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카데미 수상 소감에서 《텍사스 전기톱 살인사건》을 인용할 정도의 할리우드 키드이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 세계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한국 출신 봉감독의 이유있는 여유였습니다.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많은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에는 《더 배트맨》의 로버트 패틴슨이 출연합니다.
 
'역대 최연소'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더 배트맨》
《더 배트맨》은 3.1절에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개봉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처음으로 20만 명 넘은 개봉 첫날에만 관객이 2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이튿날 1/5 수준으로 줄었습니다만... 역시 한국에서 배트맨은 안되는건가요)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더 배트맨》은 여러 DC캐릭터들과 함께 나온 저스티스리그의 배트맨을 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3부작 이후 10년 만의 배트맨 단독 실사 영화입니다. 그래서 배트맨 팬과 DC코믹스 팬들이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개봉 첫날부터 극장으로 달려나왔겠지요?

영화 《더 배트맨》 워너브라더스 제공

  로버트 패틴슨은 역대 가장 젊은 배트맨입니다. 박쥐 가면 속의 깊은 눈매와 근사한 턱선(배트맨은 턱선이 좋아야합니다), 그리고 배트맨 특유의 어둡고 우수에 찬 듯한 연기는 개인적으로는 역대 배트맨 배우들에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배트맨 수트발도 괜찮았고요. 그동안 배트맨 역은 마이클 키튼-발 킬머-조지 클루니-크리스천 베일-벤 애플랙으로 이어지는 할리우드 최고 인기 배우들이 맡아왔습니다. 
 《더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 망토를 걸친 지 2년차 되던, 사원급 배트맨 시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직은 스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배트맨이 아니라 분노와 트라우마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방황하는 배트맨인 것도 젊은 로버트 패틴슨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할 듯 합니다. 모든 영화에 호불호가 있듯이 《더 배트맨》을 두고도 이런 저런 평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나쁘지는 않다' 쪽인 것 같습니다. 
 
오래됐지만 강력한 캐릭터 '배트맨'
배트맨은 아직도 '영'(young)한 캐릭터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슈퍼 히어로와 인간 사이에서, 선과 악 사이에서, 선의와 복수심("I am vengeance!")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최고의 캐릭터 배트맨이 탄생한지 80년이 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배트맨은 1939년,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에 첫 선을 보였습니다. 만화가 밥 케인이 『디텍티브 코믹스』 27호에 그렸다고 하죠. 월트 디즈니의 미키마우스가 1928년에 탄생한 캐릭터이니 불과 10년여 차이 밖에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배트맨은 지금의 청소년은 물론 성인들에게도 막강한 소프트파워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의 하드파워 국가인 미국은 소프트파워를 '빌드업'하는데도 세계 최강입니다. 짧은 역사를 가진 미국은 이를 상쇄라도 하려는 듯 '역사적인'(historic), '전설적인'(legendary)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쓰는 '역대급'이란 표현도 '고트' (GOAT:  the Greatest of All-Time)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은 유행어입니다. (비표준어입니다) 이 표현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기록을 거론하면서 10여년 전부터 한 야구 커뮤니티에서 많이 쓰기 시작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역대급' 선수의 등번호에 부여하는 '영구결번'(retired number)도 미국에서 온 문화입니다.

 이처럼 캐릭터와 장르에 의미와 서사를 덧붙이고, 역사성을 부여해 전설적이라며 세공하는 것이야말로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특기, 소프트파워인 것 같습니다. 일종의 설정일 뿐인 마블의 MCU(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와 DC의 DCEU(디씨확장유니버스)에 지나치게 의미부여하는 것을 보면, 헛헛한 인생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건가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200여년 역사에 불과한 미국이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의 문화 자산을 흡수하고 자신들의 상상을 조합해 만들어내는 소프트파워의 힘은  놀랍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돌파한 유일한 글로벌 흥행 영화가 바로 마블의 스파이더맨입니다.   
  이들은 그렇게 만들어낸 캐릭터를 사골국물처럼 우리고 또 우려냅니다. 프리퀄, 시퀄, 스핀오프로 변주한 세계에 확장우주·다중우주 같은 개념을 레이어하면 무궁무진한 공시적·통시적 엔터테인먼트 세상이 펼쳐집니다. (선진국은 ‘개념’을 만들어내는 나라입니다) 스파이더맨의 거미집 같은 '유니버스'는 진입장벽이 있는 대신,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듭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그동안 '유니버스'를 파악하느라 시간과 비용, 노력을 쏟기도 했거니와 그러면서 애정도 생겼기 때문이죠. 그러니 프랜차이즈 영화가 새로 나오면 다시 극장으로 달려갑니다. 
 
왜 지금 한국 콘텐츠가 주목받을까
그런데 반만 년 역사의 우리에게는 과연 배트맨처럼 확장가능한 캐릭터가 없을까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등 한반도에 존재했던 나라에는 다양한 신화와 설화가 있고, 가까운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홍길동, 전우치 등은 물론이고 찾아보면 확장과 변주가 가능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는 또 어떻고요. 그리고 우리 건 아니지만 『삼국지』에는 프리퀄, 시퀄, 스핀오프로 다룰만한 주인공급만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많아서 아마 영화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동안 만들고도 남을만한 캐릭터들이 쏟아질 겁니다. 
 
  그러니 이정재 씨의 말이 맞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미 오징어게임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는 좋은 시나리오, 좋은 감독과 배우들이 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영화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영화의 스케일이 커지고, 그래픽 수준도 높아지고, 장르도 다양해지고, 제작의 완성도도 올라갔습니다. 가성비도 좋습니다. 한국영화 한 편의 최고 제작비는 300억원에도 못미치는데, 이는 역대 배트맨 영화 제작비 중에서도 4위에 그칠뿐인 《더 배트맨》 제작비의 20% 수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영화와 한국콘텐츠가 최근 몇년 사이 주목받은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잘 하고 있었는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그들의 어떤 필요에 의해) 이제 발견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그 과정에서 넷플릭스를 필두로 한 스트리밍 서비스의 세계화와 이에 따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재편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의 필요가 어떤 것인지, 왜 이 시점에서 한국콘텐츠가 먹히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어떤 점이 평가를 받고 있는건지, 3년 여에 걸쳐 이뤄지고 있는 한국 콘텐츠의 해외 수상 릴레이 속에서 이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살펴볼 시점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필요는 무엇인지도 냉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노를 젓고 있는데 물이 들어왔고 물이 들어오니 더 열심히 젓고 있지만 물 빠지면 어떻게 될지도 생각해봐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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