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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핀란드의 어느 행복한 괴짜 이야기

스노우 아티스트 얀네 쀠꾜

오랜만에 햇빛 반짝이던 2월의 어느 날, 핀란드의 한 설원이 신비로운 수중 세계로 변했다. 지름이 무려 220m나 되는 대형 불가사리와 그 주변을 헤엄치는 거북이, 문어의 모습이 눈 위에 마치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페루 나스카 사막에 새겨진 '지상 최대의 수수께끼'로 유명한 거대한 그림처럼 외계인이 또 다녀간 것일까? 다행히 이번에는 미스터리가 쉽게 풀렸다. IT 컨설턴트로 일하는 얀네 쀠꾜(Janne Pyykkö · 57)씨 가 '저지른' 일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동안 그는 겨울이 되면 눈 위에 그림을 그리는 특이한 취미에 푹 빠져있다. 그에게 처음으로 영감을 준 사람은 세계 최초의 스노우 아티스트(Snow Artist)인 사이몬 벡(Simon Beck)씨다. 알프스 설원에 펼쳐진 그의 스노우 아트를 처음 본 순간, 얀네 씨의 마음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얀네 씨는 관련 정보를 수집하면서 기하학적 공간 감각만 있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장르임을 알게 됐다. 그 뒤로는 거침이 없었다. 눈 쌓인 곳이면 언 호수, 빈 골프장, 추수가 끝난 들판 등 어디든 찾아다녔다. 스노우 아트를 위해 필요한 도구는 붓 아닌 눈 신발(snow shoe)이다. 눈 신발을 신고 눈 위를 한 발자국씩 거북이처럼 전진하며 윤곽을 만들고 면을 메꾸며 그림을 완성해 나갔다.



스노우 아트는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그리기 어렵다.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먼저 컴퓨터로 도안을 완성한 후, 길이를 정확히 잰 끈을 준비한다. 현장에 도착하면 끈 한쪽은 카메라 삼각대로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을 잡고 돌면 정확한 원을 그릴 수 있다. 끈 길이를 조절하면 크고 작은 원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크기가 다른 원을 여러 번 겹치면 다양한 패턴을 만들 수 있다. 스노우 아트에 참여하는 사람은 도중에 그림을 확인할 수 없다. 완성된 모습은 나중에 드론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그래서 나중에 완성된 사진을 본 뒤 감동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이는 이런 경험을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했다. 둘 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맹목적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얀네 씨는 지난해까지는 모든 작업을 거의 혼자 했지만, 요즘은 작품이 알려지면서 조력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조력자 수가 늘며 작품 규모도 더 커졌다. 지난 2월 그가 완성한 씨월드 테마의 스노우 아트는 그 크기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자태로 해외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13명이 7시간 동안 6만 보 이상 열심히 걸은 결과이다. 눈 위를 걷는 것은 맨땅보다 2배로 힘들다. 그렇게 환산하면 참가자들은 각각 10km 이상, 총지휘를 맡았던 얀네 씨는 20km 이상 걸은 셈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노력을 기울여 완성했지만 안타깝게도 스노우 아트는 오래가지 못한다. 녹거나, 바람이 불면 멋진 모습이 쉽게 망가진다. 다시 눈이 내리면 그야말로 백지로 돌아간다. 이에 대해 얀네 씨는 상당히 '쿨'한 입장이다. 결과물이 지구상에 인공적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더 환경친화적이라 생각한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스노우 아트의 완성물이 아닌 과정이다. 새로운 분야를 탐구하고 배우며 자아 개발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제는 자아 개발을 넘어 소셜게더링(사회적 모임)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도 80세가 될 때까지 스노우 아트에 몰입할 예정이다. 그림을 그리는 방법, 테마 등 아직도 공부하고 탐구할 것이 화수분처럼 넘쳐난다는 것이 그 이유다. 스노우 아트는 걸을 힘만 있으면 즐길 수 있어 나이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는 단순한 스노우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올해 초에는 수도권 교차로 근처에서 야영 생활을 즐기는 사람으로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교차로에서의 야영은 숲속에서 텐트를 치고 즐기는 낭만적 캠핑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귀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엔진소리가 파도 소리, 강물이 흐르는 소리, 혹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로 들리고 심지어 꿀잠을 자기도 한다. 블로그를 보니 지난 가을에는 며칠간 핀란드 북쪽 라플란드 구릉지를 하이킹할 때 마치 애완견처럼 대형 짐볼을 데리고 다녔다.

대형 짐볼을 가지고 하이킹하는 얀네 씨.
헬싱키 수도권 교통 혼잡 지역에서 밤에 야영 중인 얀네 씨.

그는 왜 이런 괴짜 같은 행동을 하는 걸까? 태생적으로 그는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그의 관심의 대상은 너무 평범해서 사람들은 도통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다.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그는 어떤 하찮은 일이라도 진심을 다한다면 의미 있는 일이 된다고 믿고 있다. '기행(奇行)'처럼 보이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누구든지 평범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살아나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서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행복하신가요?"

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긴 생각을 한 뒤 이런 대답을 했다.

"저의 다소 우스꽝스럽고 괴짜 같은 행동에 핀란드 사람들이 비웃거나 수군거리지 않아서 고맙습니다. 아마도 핀란드에서 태어난 것이 전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핀란드에서는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인정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회가 나를 제한하고 한계 짓지 않습니다. 스스로 나에 대해 한계를 만들지만 않으면 됩니다."

얀네 씨와의 짧은 통화는 긴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 전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주말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빈 골프장에서 스노우 아트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미리 보내준 도안에는 올리브 가지를 물고 날아가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날은 바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이었다.


인-잇 이보영 얀네
비둘기를 테마로한 평화를 염원하는 스노우아트.
평화를 테마로한 스노우아트에 참석한 핀란드 분들과 함께.

지난 주말, 눈 신발이 없어 옵저버 자격으로 현장을 방문했다. 눈 덮인 골프장 설원에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됐다. 그림에 담긴 뜻을 물으니 짐작대로 평화에 대한 염원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다른 핀란드 참가자들의 제안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터진 상황에 불가사리나 거북이 보다 더 의미 있는 그림을 그리자는데 모두 합의했다고 한다.

가까운 곳에서 잔혹한 전쟁이 벌어지는 지금, 눈 위에 그림 그리는 행위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하찮아 보이는 눈 위의 비둘기 그림도 진심을 다해 그릴 때, 얀네 씨의 말처럼 의미의 날개를 달고 비상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사진=Janne Pyykk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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