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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이 터널' 입구서 성사된 윤-안 단일화…역대 성적은

'깜깜이 터널' 입구서 성사된 윤-안 단일화…역대 성적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가 대선을 불과 6일 앞둔 오늘(3일) 후보 단일화를 전격 선언하면서 역대 대선의 단일화 효과에도 관심을 쏠립니다.

직선제로 개헌된 이후 1987년 13대 대선부터 지난 19대 대선까지 7차례 선거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14대 대선(1992년)을 빼고 매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가 변수가 됐으나 성공·실패 사례가 둘 다 존재한다는 점에서입니다.

특히 이번 단일화는 처음으로 여론조사 공표금지기간에 성사되면서 바로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여론조사 공표는 2005년 이전에는 선거운동 기간 중, 그 이후에는 선거 6일 전부터 금지돼 왔습니다.

역대 대선 후보 단일화에서 대표적인 성공 사례는 1997년 15대 대선에서의 이른바 'DJP 연합'입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를 이끌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자유민주연합 김종필(JP) 총재는 97년 11월 3일 대선후보 단일화 합의문에 극적으로 서명했습니다.

호남과 충청, 진보와 보수가 손을 잡은 DJP 연합에 힘입어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 당시 총재는 국무총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2002년 16대 대선도 단일화가 선거 주요 이슈가 됐습니다.

노무현 후보는 당시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파란을 일으키며 대선후보로 선출됐지만, 대선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에 줄곧 약세였습니다. 그러나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D-24일 조사에서 단숨에 지지율 43.5%로 첫 역전을 이뤘습니다.

2002년, 민주당 노무현 후보(오른쪽)와 국민통합21 정몽준 의원 (사진=연합뉴스)

이후 정 후보가 대선 하루 전날 '노무현 지지 철회'를 선언하면서 단일화는 사실상 깨졌지만, 정 후보의 지지 철회가 오히려 대대적인 진영 결집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 당시 후보가 대선에서 극적으로 승리하게 됐습니다.

반대로 2012년 18대 대선의 경우는 야권이 후보 단일화를 했음에도 패배한 사례입니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단일화 논의 과정에서 갈등을 겪다가 11월 23일, 안 후보가 전격 사퇴하는 형식으로 후보가 단일화됐습니다.

그러나 한쪽의 포기로 불완전하게 이루어진 단일화는 충분한 시너지를 내지 못했습니다.

양측의 화학적 결합으로 이어지지 않은 '절반의 단일화'는 결국 안 후보 지지자들의 반발로 이어졌고, 18대 대선은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단일화 이슈가 불발된 사례도 있습니다.

가령 2017년 19대 대선에서 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대세론을 등에 업고 독주하자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 보수진영 단일화, 또는 보수진영 내 국민의힘 홍준표-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를 단일화하는 방안이 정치권에서 나왔으나 구체적으로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앞서 1987년 13대 대선 때도 군사독재를 마감하고 민주정권 탄생을 바라는 국민적 염원 속에 야권의 유력주자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단일화 협상 테이블을 차렸지만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김종필 전 총리까지 합해 '1노 3김' 구도 속에서 결과적으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승리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역대급 안갯속 판세에다 여론조사 공표 금지 상태에서 성사된 이번 단일화가 대선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둘러싸고는 해석이 엇갈립니다.

초박빙 구도 속에 성사된 야권의 막판 단일화가 대선 판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는 가운데 시기적으로 늦은 점 등을 들어 효과가 제한적일 것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민주당 쪽에서는 야권 단일화가 지지층의 위기감을 고조시켜 오히려 여권 결집 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내놓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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