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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기적의 사나이' 이승훈, 아직도 기적은 진행형

베이징 출격을 앞두고 밝혔던 이승훈의 속내

[취재파일] '기적의 사나이' 이승훈, 아직도 기적은 진행형
*한국 동계 스포츠 최다 메달의 역사를 쓴 이승훈이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SBS와 단독 인터뷰를 했습니다. 방송 뉴스에서는 모두 소개하지 못했던 그의 솔직한 속내를 중심으로 '인간' 이승훈, 그리고 '기적의 사나이' 이승훈을 돌아봤습니다.

2010년 1월 처음 만났을 때 이승훈은 자신이 흘린 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승부사 기질이 넘쳤습니다.
 
이승훈 (2010년 1월)
"저는 정말 누구보다 독하게 (훈련)할 자신이 있고요. 저는 승부욕이 좀 지나칠 정도로 강한 것 같기도 해요. 정말 같이 (레이스)하는 사람한테만큼은 지고 싶지 않은데, 이런 게 경기력에는 오히려 장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장거리 선수는 끈기가 있어야 되잖아요. 제가 장거리를 하는 데 그런 부분들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2010년 1월의 이승훈 선수

그리고 한 달이 지난 2월 14일, 이승훈은 대한민국 빙상계에 가장 달콤한 밸런타인 선물을 줬습니다.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m에서 2위에 올라, 아시아 선수에게는 불가능하다던 장거리 종목에서 사상 첫 메달을 거머쥔 겁니다. 불과 10개월 전까지 쇼트트랙 선수로 올림픽 출전을 꿈꿨던 선수가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급하게 종목을 바꿔 기적을 연출한 겁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열흘 뒤 이승훈은 10,000m에서 메달 색깔을 금빛으로 바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이때까지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종목에서는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한국의 선수가 세계 최강국 네덜란드의 선수(키에프트)를 한 바퀴 이상 따라잡는 최고의 하이라이트를 연출하고, '빙속 황제' 스벤 크라머가 코스를 잘못 타서 실격되는 행운까지 겹쳐지며 만든 최고의 기적이었습니다.

이승훈 밴쿠버 올림픽 10,000m 우승

'상식으로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기적은 4년 뒤에도, 그리고 다시 4년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이승훈은 소치에서는 한국 팀 추월 사상 첫 올림픽 은메달을 이끌고, 평창에서는 2회 연속 은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승훈 소치 올림픽 팀추월

3명의 선수가 400m 트랙 8바퀴를 돌아야 하는 팀추월은 중장거리 종목에 약하고 선수층도 얇은 한국이 이전까지 엄두도 못 낸 종목이었지만 이승훈은 후배들을 이끌고 연거푸 역사를 썼습니다. 후배들의 선전도 빛났지만, 역시 이승훈의 역할이 가장 컸습니다.

팀 추월에서 바람을 맞으며 가장 많은 힘을 써야 하는 맨 앞자리는 보통 3명의 선수가 공평하게 2바퀴 반에서 3바퀴씩 책임지지만, 이승훈은 5,000m와 10,000m까지 장거리 개인 종목에 모두 출전하면서도 팀추월 모든 경기(8강, 4강, 결승)에서 홀로 절반(4바퀴) 이상 맨 앞자리를 맡아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여기에 평창 올림픽에서는 신설 종목 매스스타트 금메달도 목에 걸었습니다. 평창에서만 4종목에서 무려 37,400m(10,000m + 5,000m + 팀추월 3경기(9,600m) + 매스스타트 2경기(12,800m)) 마라톤 풀코스에 가까운 거리를 질주하며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를 따낸 겁니다.

이승훈 평창 매스스타트

이런 비상식적인 체력은 비상식적인 훈련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승훈은 보통 장거리 선수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하루 30,000m의 빙판을 지쳤고,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느껴지면 역도를 비롯한 다른 훈련 방식을 추가했습니다. 2017년 결혼식을 올렸지만, 평창 올림픽을 위해 신혼여행도 미뤘습니다. 본인이 돌이켜 봐도 아찔할 만큼 혹독한 훈련이었습니다.
 
이승훈 (2022년 1월 28일)
"(예전 했던 훈련은) 말도 안 되는 운동량이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훈련은 진짜 독하게 했던 것 같아요. 그걸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걸 어떻게 했지 싶어요. 그런 운동량을 '와, 어떻게 했지?' 싶은 생각이 많이 드는데 다시 하라면 지금은 못 하죠. 하하~"

쉼 없이 달려가던 이승훈은 평창 올림픽 직후 처음으로 쉼표를 찍었습니다. 해외 대회 참가 도중 후배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자격 정지 1년의 중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자숙의 시간을 갖게 된 이승훈은 네덜란드로 떠나 클럽팀에서 빙판을 지쳤는데, 이 기간 스케이팅에 대한 마음가짐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네덜란드 선수들이랑 어울리고 운동을 하면서 많이 좀 느꼈던 것 같아요. 거기서는 한국에서 하듯이 스케이트를 하루에 두 번씩 타고, 지상 운동하고 다른 운동도 하고 이렇게 하지 않았거든요. 일주일에 두세 번 스케이트 타고 주말에 시합하고 그리고 나머지 훈련은 또 자유롭게 하고 그런 분위기에서 하다 보니까 이렇게 (운동)하면 정말 즐겁게 할 수 있겠구나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이전에는 스케이트를 하루라도 안 타면 불안했던 마음이 있고 경기력이 떨어질 것 같다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면 (네덜란드를 다녀온) 이후에는 '떨어지면 어때'라고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즐겁게 타는 게 일단 더 중요하다' 약간 이런 마음으로 바뀐 것 같아요. 쉬고 싶고 하기 싫을 때는 쉬자 그런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찍어야 했던 쉼표 덕분에 이승훈은 스케이트를 더 즐기게 됐고 마침표는 더 늦게 찍게 됐습니다.
"(네덜란드 스케이팅은 우리와) 문화가 너무 많이 다르다는 거를 느꼈는데, 예를 들면 (네덜란드에서는) 연습이 끝나면 우리 팀원이랑 코치들이 모여서 스케이트장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나 핫초코 마시면서 막 얘기를 해요. 시합에 대한 얘기 아니면 다른 잡담, 농담, 막 웃으면서… 그런 분위기 너무 좋았고… 그리고 매주 토요일이 시합이거든요. 근데 시합이 끝나면 같이 맥주를 한 잔씩 마셔요. 그러면서 '아, 고생했어' 얘기하는 그런 문화도 좋았거든요. 근데 지금 우리(한국 선수)가 시합 끝나고 맥주 마신다고 생각을 해봐요. 그러면 난리 나죠. 시합이 끝나면 성인 선수들이 맥주 한 잔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단은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자 문화잖아요. 거기서는 저보다 나이 많은 선수들이 운동을 재밌게 하는 거 그리고 (다른) 일하면서도 (운동)하는 거 그런 부분이 너무 좋았어요. 일하면서 운동하고 40대인 선수들도 (빙상) 마라톤을 막 뛰고, 일하고 와서 저녁에 와서 (스케이트) 타고 그런 거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오랫동안 재밌게, 그냥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평창 끝났을 때 즈음에는 다음 올림픽까지만 하고 진짜 그만하자 그 마음이 제일 컸어요. 근데 네덜란드 가서 운동도 하고 그다음에 다녀와서 굳이 그만둘 이유가 없겠다 싶더라고요. 이렇게 재미있게 탈 수 있고, 그냥 계속 타면 되는데 이 재밌는 걸 왜 그만두지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케이팅) 하다가 재미없어지면 언제라도 그만둘 거거든요. 저 자신한테 이게 즐거운 일이냐 아니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만약에 제가 쉬지 않고 평창 이후에 쭉 (한국에서 훈련)해서 보냈다면 아마 베이징이 진짜 거의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예전처럼 쭉 했다면. 대신에 아마 지금보다는 더 훨씬 잘 탔겠죠. 성적도 좋았을 수도 있고… 근데 다녀온 이후에, 네덜란드에 다녀온 이후에 (선수) 수명이 길어졌죠."

다시 한국에 돌아온 이승훈은 지난해 9월, 3년여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달았습니다. 물론 예전만큼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지는 못했습니다. 국제 대회가 아닌 국내 대회에서도 정재원에 이어 2위를 기록했고, 올 시즌 월드컵에서는 단 하나의 메달도 따지 못했습니다. 34살의 나이에 몸 상태와 기량, 주변 상황도 모두 예전 같지 않자, 이승훈 본인도 베이징에서 메달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팀추월에서는) 이끄는 것도 안 되고 지금은 (후배들) 쫓아가기 바빠요. 쫓아가야 돼요. 어떻게 더 이끌어요. 지금 상태에서는."

"제가 허리 디스크랑 목디스크가 있어요. 근데 이게 스케이트를 타면서 오는 직업병인 것 같아요. (스케이팅 자세가) 안 좋은 자세고 허리에. 이렇게 (허리는) 숙이고 있고 항상 목 빼서 들고 있고 이런 동작이 오래 하다 보니까 그게 디스크가 된 것 같아요."

"제가 월드컵을 (이번 시즌에) 4년 만에 나왔잖아요. 그런데 장비도 많이 바뀌고 이런 변화들이 생겼는데 그 공백이 있는 동안 제가 변화를 못 따라간 텀(Term)이 좀 있더라고요 확실히. 그런 부분은 좀 아쉽기는 해요. 그냥 4년 전에 하던 장비를 저는 그대로 가져가는 거거든요. 이걸로 최대한 (올림픽을) 소화해야 되는데.. 그런 부분에서도 4년 전보다는 좀 부족하죠 제가."

"그거는 기적이죠. 이번 올림픽까지 또 메달이 된다면… (기적은) 그동안 많이 보여드렸잖아요. 올림픽마다, 하하. 메달에 대한 욕심은 좀 내려놓았어요."

이승훈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

하지만, 자신의 말과 달리 이승훈은 베이징에서도 다시 한번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12년 전 그랬던 것처럼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다시 깜짝 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예전처럼 1, 2위는 아니었지만, "첫 동메달이라서 컬렉션(Collection)을 맞췄다"며 활짝 웃었고 4년 전 자신의 페이스 메이커로 불렸던 후배 정재원보다 못한 성적이었지만, 함께 시상대에 올라 더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승훈은 이렇게 스케이팅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앞으로도 한동안 빙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제 선수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다음 올림픽 때 (대표) 선발이 안 되면 이번 올림픽이 (올림픽으로는) 끝일 수도 있는 거지만, 일단 생각 없이 그냥 계속 (스케이트) 타는 것 자체를 즐기면서 하다가 (대표 선발) 되면 가는 거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뭐 그런 거니까 '이제 그만 한다' 이런 마음은 없어요."

이렇게 즐기다가 은퇴해도 충분히 '해피 엔딩'일 것 같은데, 이승훈의 스케이트 인생에는 아직 더 많은 챕터가 남은 것 같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이야기하던 이승훈도 이번 베이징 올림픽 장거리 종목(5,000m, 10,000m)에 한국이 출전권을 한 장도 따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한국 장거리 종목(cf. 이승훈은 올림픽 10,000m에 3차례 출전해 메달(밴쿠버)은 한 번 땄지만, 가장 나쁜 성적이 4위(소치, 평창)일 정도로 꾸준히 세계 정상급 기량을 뽐냈습니다.)이 다시 10여 년 전으로 돌아간 데 대해 많이 속상해했고, 자신과 후배들의 분발을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목표를 설정하는 이승훈의 눈빛은 12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승부사의 그것이었고, 4년 뒤 밀라노에서 또 한 번의 기적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우리나라 다른 선수가 (5,000m나 10,000m 출전이) 됐었으면 그래도 나았을 텐데 이제 한국 선수는 (장거리를) 아예 비비지 못하는 종목이 돼 버렸잖아요. 너무 아쉽죠. 그런 부분이 너무 아쉬워요. 다음 올림픽을 제가 (출전)한다면, 만약에 한다면, 메달은 진짜로 그 다음 얘기고, 5,000m, 10,000m에 대해서 출전권은 꼭 따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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