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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쉽] 이빨 빠진 나토(NATO)는 푸틴을 멈출 수 있을까?

- 푸틴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 할까?

우크라이나.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어디 있는지 짚어 보라고 하면 맞게 짚을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국민 열 명 중 얼마나 될까? 그런 낯선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중국과 타이완과 대한민국이 있는 이곳에도 상당한 시사점을 준다. 미국 주도 서구 위주로 짜인 국제질서에 지역패권을 추구하는 강국이 도전하며 파열음을 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17일 "(미국은) 러시아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안보 문제상의 우려를 중시하고 해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나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2월6일자 '어소시에이션 오브 유러피안 저널리스트'는 러시아와 중국이 각각 우크라이나와 타이완을 노리고 있는 풍자만화를 실었다.

[그림] 지난 2월6일자 Association of European Journalists 카툰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연방의 주요 구성국이었으며, 러시아의 서남쪽에 자리잡은 큰 나라다. 러시아와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키예프 루스'라는 조상을 공유한다. 국토면적은 대한민국의 6배 크기로, 유럽대륙에서 러시아 다음 가는 규모다. 토질이 비옥해 세계 최대 곡물 생산국 중 하나로 꼽힌다.
[사진] 우크라이나의 하늘과 황금빛 밀밭을 찍은 사진. 출처: bne intellinews. 실제로 우크라이나 국기는 하늘빛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 시절 군수산업 기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주요 핵무기 배치지역 중 하나였다. 러시아의 천연가스(LNG)를 독일 등 서쪽 국가들로 실어나르는 길목이다. 러시아의 서방 국경 중 가장 긴 부분(1,974km)이 우크라이나와 맞닿은 국경이다. 러시아가 남쪽으로 흑해를 통해 지중해 세계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다.
[뉴스쉽]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입지 (지도 가공)
우크라이나는 그런 나라다. 이 나라가 미국 쪽 서방의 동맹(나토, NATO)으로 넘어가느냐 러시아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느냐가 이번 사태의 핵심이다.

푸틴은 과연 우크라이나 국경에 배치한 15만 넘는 병력에게 진격 명령을 내릴까. 푸틴은 1990년 동독이 무너질 때, 소련 KGB 동독지부의 중견 간부였다. 베를린 장벽이 뜯겨나가고 소련군이 속절없이 철수하는 과정을 함께 하며 언젠가 이 수모를 갚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의 평생 목표는 대 소련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의 영화를 재건하는 걸 필생의 과업으로 내걸고 권력 강화- 대외 강경정책을 추진해 온 것과 비슷하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근본적으로 '위대한 러시아의 일부'로 생각한다는 역사 인식을 지난해 글과 발언을 통해 밝힌 바 있다.
[뉴스쉽] 푸틴의 역사 인식-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땅

러시아는 이미 2000년대 중반부터 크림 반도, 동부 돈바스 지역 등 우크라이나의 여러 곳을 무력으로 차지했다. 서방 국가들의 안보동맹인 나토는 그때마다 단호한 응징을 공언했지만 실제 힘으로 러시아를 막은 적이 없다. 그런 나토를, 세계의 미디어들은 '이빨빠진(toothless)'이라는 형용사를 써서 비판 또는 풍자해 왔다. 푸틴은 '두고 보자는 놈 치고 무서운 놈 없던데?'라고 말하듯 차근차근 러시아의 위세를 복원해 왔고 말이다.

러시아가 이번에 우크라이나의 북,남,동에 포진시킨 병력은 15만이 넘는다. 미국이 파병하는 병력 규모는 8천5백명 선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러시아군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우크라이나에는 미군을 보내지 않았다. 폴란드에 4천7백명 등 주변 동유럽 국가들에만 병력을 주둔시킨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에서 했듯이, 위급상황에 처한 미국 시민을 대피시키기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에 직접 병력을 보낼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미-러가 서로 총질을 하면 세계대전이 난다는 것이다.

[뉴스쉽] 바이든 미국 대통령, 러시아와 총구 맞대면 세계대전

미국과 유럽국가들의 군사동맹체인 나토(NATO)는 이번에도 마치 학폭 지킴이처럼 '멈춰!'를 외치고 있다. 군대를 보내 러시아군과 직접 교전할 생각은 없지만, 최근 수년간 볼 수 없었던 수준으로 단호하게, 단합해서 러시아의 무력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수를 쓰고 있다. 이빨 빠진 사자에게도 발톱은 있다. 과연 나토(NATO)는 이번엔 푸틴을 멈출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에서 중국이라는 외교안보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도 작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뉴스쉽- 대표 썸네일] 이빨 빠진 나토(NATO)는 푸틴을 멈출 수 있을까
그러면, 나토는 어떤 동맹체이고, 어떻게 확장해 왔으며, 러시아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이기에 이번 일을 일으켰는지 알아보자.
(* 이 기사 본문과 그래픽은 18일(금요일) 오후에 작성되었다. 우크라이나 상황이 워낙 급박하게 바뀌고 있어서 작성시점을 밝혀둔다.)

[그게 뭔데?] 나토(NATO)의 결성과 확장

나토는 1949년 4월 4일 체결된 북대서양 조약에 의해 창설되었다. 그래서 정식명칭이 '북대서양조약기구(The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다. 회원국이 비가입국의 공격을 받으면 자동으로 상호방위에 나서는 집단군사동맹체제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소련이 동구권을 급속히 공산화하자 위협을 느낀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결성했다. 나토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조항이 나토 헌장 제 5조다.
"유럽이나 북미에 있는 어느 일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공격이 있을 경우 유엔헌장 제51조에서 인정한 독자적 또는 집단적 방위권한을 행사하여 각 회원국들은 집단적 또는 독자적으로 공격받는 국가를 상호원조한다."

- 나토 헌장 제5조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뒤 아프간에 쳐들어 갈 때 유럽 국가들이 함께 한 것이, 이 집단안보조항이 발동된 첫 사례였다.

소련 입장에선 그런 나토를 견제해야 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랬다고, 1953년에는 나토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스탈린이 죽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다. 스탈린과 함께 히틀러를 굴복시킨 철혈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나토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토 회원국들은 1954년 '동맹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며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2000년에는 옐친에 이어 러시아의 최고권력자에 오른 푸틴이 대통령 권한대행 신분으로 '나토 가입 가능성'을 거론했다. 여기에는 '나토가 군사동맹에서 정치동맹으로 전환하고, 러시아가 미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다면' 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에 별 진전 없이 유야무야되었다.

서유럽에서 시작한 나토는 점차 소련(러시아)를 향해 동쪽으로 확장했다. 그 추세를 연도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지도가 나온다. 청색이 어두울수록 일찍 가입한 나라, 밝을수록 최근에 가입한 나라다. 움직이는 그래픽으로 표시했다.

뉴스쉽] 나토의 동진, 확대, 연도별 추이 NATO

1990년 동독이 나토로 넘어왔다. 1999년에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가 나토에 가입했다. 2004년 3월에는 발트3국 (북유럽쪽에 붙어있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가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2009년 이후로는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이 추가로 나토에 합류했다. 자유세계의 동방 확장으로 볼 수도 있지만, 푸틴 입장에서 보면 홍수가 코앞까지 차오르는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스웨덴은 중립국이다. 핀란드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가입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되면?


자, 이렇게 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토에 가입할 때 무력행사를 하지 않았던 러시아가, 왜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유독 전쟁을 불사하면서 강력히 반대할까? 먼저,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이 글의 첫머리에 썼던 소개를 다시 상기해보자.
- 거대한 곡창지대
- 구소련 군수산업기지, 핵무기 배치 지역
- 유럽으로 LNG를 수출하는 길목
- 지중해를 향해 남하하는 길목
- 2,000km에 육박하는 육상 국경을 맞대고 있음.

몇가지만 짚어봐도, 동구권의 다른 작은 나라들과는 무게감이 다르다. 게다가 지도를 보면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까지는 기갑부대가 마음껏 쓸고다닐 수 있는 거대한 평원이다.

[사진]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평원. 구글어스 캡처.
이 거대한 평야지대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서구세력의 영향권으로 넘어가서는 안되며, 모스크바 등 심장부를 보호할 완충지대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건 러시아 안보전략의 기본 전제다. 러시아 입장에선 그래서 진작부터 나토의 동진(동쪽으로 확장함)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경고해 왔는데, 러시아가 힘이 약해졌을 때는 귀담아 듣지 않고 러시아를 무시,모욕했다는 것이 푸틴의 불만이다.

미국, 나토 동쪽 확장 안한다던 약속 어겼나? ...논란

게다가 서방은 '나토의 동쪽 확장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으나 배신했다는 게 러시아쪽 주장이다. 사연은 이렇다.
1990년초, 동독의 붕괴와 동서독 통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동독 지역엔 38만 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유혈사태를 막으려면 미국은 일단 소련을 안심시키고, 소련이 조용히 병력을 철수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말로 이런 약속을 한다.

[뉴스쉽] 미국 베이커 국무장관 to 고르바초프, 나토 동쪽 확장 1인치도 안한다

그러나, 조지 H.W. 부시 당시 미국대통령은 생각이 달랐다. 공산주의 블록이 무너지는 게 당시의 세계사적 현상이었는데, 나토가 서독에만 못박혀 있는다는 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소련군이 물러간 공백은 자연스럽게 나토 군이 채웠다. 당시는 소련 자체의 사정이 엉망으로 악화하던 때라 소련도 반발할 정신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독일 통일과 그 이후 국제질서를 다룬 조약문서에 '나토 동진 없다'는 약속은 기록되지 않았다. 미국은 그래서 '협상 초기에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제와서 배신 운운 하는 건 말이 안된다. 그리고, 베이커-고르바초프 대화는 동독에 한정된 얘기였지 우크라이나 등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약속을 어긴 건 미국과 서방측'이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해 서방은 '약속을 깬 건 러시아도 마찬가지'라고 맞비난을 하고 있다. 러시아는 1994년 미국 영국 우크라이나와 부다페스트 협정을 맺었다. 우크라이나에 배치돼 있던 구소련의 핵무기를 넘겨받아 폐기하고, 미국영국은 경제지원을 하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국경과 안보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2004년 크림반도를 힘으로 빼앗고 동부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계 민병대를 부추겨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스스로 약속을 깼다.

[푸틴의 속내는?] '나토, 러시아의 앞마당에서 나가라'

이번 사태를 일으킨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나토에 요구하는 것(안보우려 해소)는 다음과 같이 요약 가능하다.
1.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포기하고 이를 문서로 확약할 것
2. 나토의 미사일과 군대를 1997년 이전 상태로 후퇴시킬 것

러시아 입장에서는 서방과의 사이에 거대한 완충지대를 확보하겠다는 것이지만, 보통 문제가 아니다. 먼저 1번. 우크라이나는 2019년 개헌을 통해 헌법에 나토 가입 추진을 명시해 놓은 나라다. 나토 가입 포기를 문서로 약속하려면 또다시 개헌을 해야 할텐데, 과연 가능할까?

2번은 사실상 거의 모든 동유럽 국가에서 나토의 군사력을 서쪽으로 물리라는 요구다. 왜냐하면 1997년 이후 나토 회원국이 된 나라들은 통일독일 동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기 때문이다: (북유럽 가까운 쪽에서부터 남쪽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지도에 표시하면 이렇게 된다.

[뉴스쉽] 러시아가 나토군 철수를 요구하는 동유럽 국가들 (지도)
이 나라들에서 물러나라는 요구를 미국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전에, 해당 국가들은 이런 주권 침해성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푸틴은 이런 속내를 드러내기까지 20년 이상 절치부심하며 군사력을 복원하는 한편,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지길 기다려 왔다. 구소련 붕괴 이후 껍데기만 남고 속으로 무너져내렸던 러시아군을 조지아 침공, 시리아 내전 등 다양한 실전을 거치면서 장비부터 편제까지 모든 것을 뜯어고치며 실전 강군으로 부활시켰다. 유럽내 나토 국가들의 목에는 천연가스 파이프라는 올가미를 걸어 놓았다. 미국에는 트럼프라는 괴물 대통령이 등장하도록 공작을 벌임으로써 미국과 유럽간 사이를 이간질했다. 중국이 충분한 힘을 기르고 미국에 맞서기를 기다려 연대를 강화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아프간에서의 수치스런 철수 등 실패가 겹치면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됐다. 푸틴은 드디어 모든 상황이 갖춰졌다고 본 것 같다.

우크라이나의 비극: 내재된 갈등, 계속돼 온 친러-반러 싸움


과거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사이는 어땠을까? 스탈린이 공산화를 밀어붙이던 초창기에는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농업개혁'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스탈린은 1928~32년 첫 5개년 경제계획에 나서면서 기름진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의 농민들이 토지 국유화와 사유재산 금지에 반발할까봐 10만 명 이상을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추방하거나 처형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유럽》(글항아리)

이후 수십년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소련의 정식명칭)의 일원으로 살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상당히 가까워졌다. 스탈린에 이어 소련의 권좌에 오른 흐루시초프는 크림반도를 러시아에서 떼어 우크라이나에 주기도 했다.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에는 친러-반러 세력간의 내부 투쟁이 계속됐다. 지리적으로 러시아에 가까운 동부지역에선 친러세력이 강하고, 서부로 갈수록 친서방 세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2013년 경제위기- 2014년 유로마이단 시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돈바스 내전 발발 등은 모두 1)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내부 친러 세력 2)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를 서방세계의 일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세력의 투쟁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다.

[사진] 2014년 2월24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에서 열린 유로마이단 시위 희생자 추모 행진. (게티이미지 코리아)

특히 2014년이 사건이 많았던 해로 기록된다. 러시아의 조종을 받는 독재자인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대항해서 벌어진 '유로마이단' 시위대에, 야누코비치는 발포 명령을 내린다. 국민들의 저항이 더 심해지고, 야누코비치는 탄핵당한 뒤 러시아로 도망쳤다. 위 사진의 행진은 그 직후의 일이다. 러시아는 소치 동계올림픽을 마무리하는대로 반격에 나섰다. 크림반도를 힘으로 빼앗고, 러시아계 주민들이 많은 동부 돈바스 지역에서 민병대를 부추겨 친서방인 우크라이나 정부에 저항하도록 한 것이다. 돈바스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아예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한스크 (루간스크라고도 쓴다)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고, 현재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상태다. (국제적 인정은 받지 못했다.)

[뉴스쉽] 돈바스 지역- 루한스크,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러시아 하원의회는 지난 15일, 최근 돈바스 지역의 이 2개 '자치공화국'을 승인할 것을 푸틴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푸틴이 뒤에서 시킨 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러시아는 이들 2개 공화국이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를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이도록 부추겨 오긴 했어도 이들을 '공식 승인'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건 돈바스 내전의 휴전을 위해 체결된 '민스크 협정' 위반이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 프랑스 정상이 푸틴에게 '승인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푸틴이 말을 들을지는 미지수다.

한 나라의 국민적 정체성은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단단해지게 마련이다. 우크라이나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 큰 불만이 없었던 우크라이나 사람도 2014년 이후 벌어진 러시아의 횡포를 보면 반감이 생길 만도 하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014년 이후 러시아어의 제2공용어 지위를 박탈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반러시아 정체성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독립도 추진되고 있다. 종교적으로 우크라이나는 원래 러시아정교회 산하의 국가였다. 2019년, 우크라이나 교회는 '우크라이나 정교회(Ukraine Orthodox Church)'로 독립해, 러시아 정교회와 결별했다.

[사진] 2019년 1월6일 이스탄불. 동방정교회 수장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를 방문해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승인받고 손에 입맞추는 포로셴코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유럽의 역사에서, 교회를 분리한다는 것은 종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로마 카톨릭에서 분리해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나오고, 영국 성공회가 카톨릭에서 분리해 나오는 과정은 각 나라의 주권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진행되었고 수많은 전쟁과 살육이 잇따랐다. 모스크바로서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무기를 구입하는 것보다 우크라이나 교회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 더 신경쓰이는 사안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내부에는 여전히 러시아계 주민도 많고, 정치 경제 문화계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력이 광범위하게 남아있다. 러시아가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러시아와 척을 지고는 국가의 안녕을 지킬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2019년 친서방세력이 주도해 '나토 가입 추진'을 헌법에 명시했지만 나토 가입에 대한 국민여론은 그동한 분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결의 실마리?] 우크라이나 정부, 나토 가입 의사를 고집할까?


그렇다면, 현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의 침공을 각오하고서라도 서방의 군사동맹에 가입할 것인가? 우크라이나의 영국 주재대사이자 전 외무장관인 바딤 프리스타이코는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나토 가입 노선 포기 가능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뉴스쉽/ 바딤 프리스타이코 우크라이나 영국 주재 대사, 나토 가입 포기 시사 발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같은날 숄츠 독일 총리와 회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나토 가입을 포기할 듯한 발언을 했다.
[뉴스쉽]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나토 가입 포기 시사 발언

그러자, 러시아가 군 병력 일부를 철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실제로는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러시아가 "이제 뭔가 대화가 좀 통하는구만!" 이라고 말하듯 화답의 시그널을 보낸 것으로 읽혔다. 그러나 이 분위기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프리스타이코 대사와 젤렌스키 대통령은 하루이틀 만에 '맥락이 와전됐다'며 발언을 철회했다. 국내의 반러 여론을 의식한 것인지, 그래봤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본 것인지, 다른 계산이 있는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도 도로 침공태세를 강화하는 중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되려면 30개 회원국 모두가 찬성해야 한다. 나토 헌장 5조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할 경우 함께 맞서 싸워줘야 하는 의무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간절히 원하더라도 나토 가입은 성사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낙담한 듯한 푸념이 이를 시사한다. 나토는 러시아 같은 나라의 침공을 막겠다고 생긴 기구인데,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이 높은 나라일수록 나토 회원국이 되기 어렵다는 건 아이러니다.

[사진] 러시아군에 저항하기 위해 사격훈련 받는 우크라이나 민간인 여성들. 지난 5일, 오부키프. 게티이미지.

러시아가 지금처럼 난폭하게 대응하기 전까지, 나토는 일관되게 동쪽 확장 정책을 유지해 왔다. 우크라이나 친서방 세력도 그러니까 가입을 추진해던 것이지, 나토가 싫다는데 가입하겠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주요 회원국들이 우크라이나에게 '가입의사를 철회하라'고 윽박지를 수 있는 형편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우크라이나 스스로 러시아의 침공을 모면하기 위해 -또는 그런 모양새를 갖춰- 가입의사를 철회할 수는 있다.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바란다는 뜻)이라는 말처럼, 관련국들은 우크라이나의 자진 철회가 이번 사태 해결의 단초를 제공해주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일촉즉발의 위기] 과연 푸틴은 진격 명령을 내릴까?


당초 미국 등 서방의 나토 회원국들은 러시아군이 이번주중 16일쯤 우크라이나 영토로 진격할 거라고 목소리를 높여 경고했다. 러시아군의 병력배치를 위성사진과 감청으로 손바닥 보듯 읽고 있을테니 근거없이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러시아는 '나토가 오히려 위기를 부추긴다. 우리는 침공 생각 없었다'며 그 날짜를 넘겼다. 미국 등의 입장에서는 늑대에 맞서 직접 몽둥이를 들고 나서진 않았지만 마을사람들이 함께 모여 소리를 지르는 방식으로 일단 늑대의 습격을 막아낸 셈이다.

[사진] 지난 2월18일, 사격훈련을 마치고 전선으로 수송되는 러시아 탱크들. 러시아 국방부 공개/EPA

이를 두고 일각에선 '러시아가 침공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시점을 놓쳤다'고 보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푸틴의 심중에선 애초에 다른 시계가 돌아가고 있을 수도 있다. 애초에 푸틴이 워낙 의중을 숨기는 데에 능한 권력자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까지 탱크를 진격시키고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정부를 친러 괴뢰정부로 갈아치울 것인지, 아니면 이미 러시아 세력권인 동부 돈바스 지역 위주로 제한적인 무력행사를 하며 정치적 압력을 가중시킬 것인지, 현재로서는 예단하기 어렵다.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 블링컨 국무장관이 전자의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고, 에스토니아 등 인접국 정보당국에서는 후자의 가능성도 거론하고 있다. 미국이 우려하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엄청난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에서 7,000km 이상 떨어진 극동 지역에서까지 부대를 차출했는데, 만족스러운 성과없이 군대를 물릴 것인지는 미지수다.

러시아군이 부상병에게 수혈할 혈액까지 국경지방으로 실어나르고 있다고 미국 오스틴 국방장관이 밝힌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신호다. 침공을 실행할 경우,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쪽에서 먼저 쳤다'는 명분을 조작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전쟁의 역사에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독일군이 폴란드 등 동유럽을 침공할 때,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 등 많은 사례가 있다.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D콘텐츠 제작위원), 장선이 기자 / 디자이너 : 명하은, 박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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