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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화도 아니고 판화가 이 가격…실화?

판화의 모든 것

지난달 케이옥션에 출품된 일본 작가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 콜라주 작품이 1억5백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2000년에 만들어진 프린트 작품으로 가로 21cm, 세로 27cm의 작은 크기입니다. 전체 135장 중 35번이라고 번호가 붙어있죠. 산술적으로만 보면 쿠사마 야요이의 이 프린트 작품 총액은 135억 원이 넘는 셈입니다.

쿠사마 야요이, 호박(2000)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이스트 요크빌 월드게이트의 봄맞이, 2011년'은 지난해 11월 서울옥션에서 무려 2억5천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역시 25개 중 3번 번호가 붙은 작품이었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아이패드 드로잉


미술시장이 호황을 맞으면서 국내 유명 작가들의 프린트 작품 가격도 함께 치솟고 있습니다. 박서보 화백의 '묘법' 시리즈 판화는 지난달 케이옥션에서 5천만 원 가까운 가격에 거래됐습니다. 이우환 화백의 '조응'이나 '다이얼로그' 시리즈 역시 판화 가격이 수천만 원입니다. 데이비트 호크니의 판화 작품들도 3~4천만 원은 기본이죠. 적게는 수십 장, 많게는 수백 장씩 찍는데도 이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통 일률적으로 '판화'라고 얘기하지만 그 안에는 다양한 형태와 기법이 존재합니다.

민중미술가 오윤처럼 창작 방식 자체가 판화인 경우를 제외하면, 판화는 희귀하거나 값이 비싼 원화 작품을 여러 사람이 소유할 수 있도록 다량으로 복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화 작품의 성격에 따라 석판화나 실크스크린 방식을 주로 사용하는데, 판화를 위한 원판을 만들어 일정량을 찍어낸 뒤 그 원판은 폐기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15/100> 같은 '에디션 넘버' 형식으로 표시되며, 100장의 판화 중 15번째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에디션 넘버를 작가가 직접 표기하고 자신의 서명을 함께 해서 소유의 '가치'를 더해주는 것이죠. 원화 그림이 수십억 원 하는 대가들의 작품을 싼 가격으로 집에 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판화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원본 작품의 디테일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도 판화 소장 욕구를 더해줍니다. 이우환의 다이얼로그 시리즈는 원본 작품의 미묘한 그라데이션까지 잘 살려냅니다. 특히 젖은 한지를 긁어내 두터운 질감으로 표현해낸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는 '믹소그라피아'라는 입체 판화 기법으로 올록볼록한 문양까지 그대로 복제해내 실제 원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박서보 묘법 시리즈 판화 (케이옥션)

에디션 넘버가 붙어 있다고 해서 모두 원본 상태의 그림을 판화로 다시 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데이비드 호크니의 에디션 넘버는 작품에 따라 그 성격이 다릅니다. 호크니는 2010년 이후 아이패드에 그림을 그려서 지인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중 일부 작품들을 프린트해서 에디션 넘버를 붙였습니다. 원화가 따로 없이 아이패드로 그린 디지털 파일이 원본인 것이죠. 지난달 케이옥션에서 1억6천만 원에 낙찰된 호크니의 작품은 '포토그래픽 드로잉'이라는 사진 콜라주 작업입니다. 역시 별도의 원본 그림은 없고 사진처럼 디지털 파일이 원본입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포토그래픽 드로잉

얼굴 없는 작가 뱅크시도 원본은 그래피티 형식의 벽화이거나 디지털 파일이기 때문에 뱅크시의 에디션 작품들은 보통의 판화와도 또 다릅니다. 지난해 3월 NFT가 처음 관심을 끌었을 때, '바보들'이라는 뱅크시의 작품을 NFT 작품으로 바꾼 뒤 원본 그림을 불태우는 퍼포먼스가 있었습니다.
뱅크시 '바보들' 프린트 소각 퍼포먼스
그런데 이 '바보들'이라는 작품은 500개의 에디션이 존재하고 이날 불태워진 작품은 그중에 205번 작품이었습니다. '원본을 불태웠다'는 주장은 단지 주장일 뿐,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죠.

이미 사망한 대가들의 유명한 작품을 판화로 찍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후 판화'라고 하는데, 작가가 에디션 번호를 매긴다든가 친필 서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아무래도 '소유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작권법상 작품의 지적재산권은 작가 사후 70년으로 규정돼 있기 때문에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같은 작가의 그림은 누구든 얼마든지 프린트할 수 있습니다. 다만 파블로 피카소(1881-1973)나 마르크 샤갈(1887-1985) 같은 작가들은 아직 사후 70년이 지나지 않아 저작권이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상속권자나 재단이 일부 작품을 한정판 프린트로 찍는 것입니다. 이 경우 작가의 서명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디지털로 인쇄한 서명을 자신들이 보증한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아무리 한정판이라고 해도 작가의 친필 사인이 없는 '사후 판화'의 가격은 '생전 판화'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저렴합니다. 실제로 이베이 사이트에 샤갈의 1915년 작품 '생일'을 한정판 프린트로 제작해 에디션 넘버를 붙이고, 복사된 샤갈의 서명까지 넣은 작품이 판매되고 있는데 가격은 우리 돈 7만 원 정도입니다.
이베이 화면 캡쳐

판화에 가치를 부여하고 가격을 결정하는 것 역시 시장의 논리, 즉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됩니다. 원본을 갖지 못해 판화를 소유하는 것이지만, 원본만큼은 아니더라도 진정한 한정판'이어야 단순한 '복제품'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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