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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문과 소멸' 시대…학문 쏠림의 끝

[취재파일] '문과 소멸' 시대…학문 쏠림의 끝

남승모 기자

작성 2022.02.14 15:1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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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문과 소멸 시대…학문 쏠림의 끝
90년대 초반만 해도 경제, 경영학과 같은 상경 계열은 상대적으로 취업 걱정이 작았습니다. 일부 은행은 신입행원 모집 때 상경 계열 위주로만 지원을 받을 만큼 나름 배타적인 고용 시장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경 계열마저 예전만 못합니다. 인문, 사회계열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학이 취업만을 위한 곳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생계가 보장되지 못하는 그런 학문에 사람이 몰릴 리 없습니다. 몇몇 소신 있는 사람들의 헌신만으로 학문 발전을 바란다면 그건 몽상일 뿐입니다. 지원자가 끊긴 학문, 근근이 맥은 이어간다 해도 그 끝은 '소멸'입니다. 문과의 종말일까요?
 

문과생 직군도 '이공계 패치'

 
선호도 1위라는 삼성전자, 그것도 반도체 부문에 들어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 입니다. 특히나 그게 문과생이라면 더 그렇습니다. 당연히 입사 후에는 희소성을 갖춘 문과생으로서 나름의 자질을 발휘할 것 같지만, 그전에 갖춰야 할 게 생겼습니다. 삼성전자 DS(반도체)사업 부문이 지난해 하반기 공채 신입사원 교육 일정에 코딩 등 소프트웨어 과정을 추가했습니다.
 
디지털, 코딩, 컴퓨터
 
회로나 공정 설계 등을 전공한 이공계 출신과 함께 마케팅, 재무, 인사 등 경영지원 부문에서 일할 직원들도 6주간의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게 된 건데, 파이선, 자바 같은 기초 코딩 언어가 포함된 걸로 알려졌습니다. 이른바 '모든 직원의 개발자화'를 추진하는데 따른 것으로,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사내에서 통용되는 전문 용어들도 많은 만큼 조직 내 케뮤니케이션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문과생들에게 적합한 직군에서 일하더라도 '이공계 패치'가 장착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기 어려운 세상인 겁니다.
 

인문 ∙ 사회에서도 밀려난 문과생

 
취업 시장뿐만이 아닙니다. 대학 안에서부터 문과생들이 설 자리는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처음 도입된 문∙이과 통합 수능 영향도 큽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정경희 의원실(국민의힘)이 서울대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2022학년도 정시 모집 일반 전형 가운데 문∙이과 교차지원이 가능한 인문∙사회∙예체능 계열 최초 합격자 486명 가운데 수능 수학 선택과목에서 미적분이나 기하를 선택한 학생은 모두 216명으로 44.4%에 달했습니다. '미적분'이나 '기하'는 대체로 이과생들이 택하는 분야로, 이는 곧 이과생들의 교차지원이 많았다는 걸 시사합니다.
 
2022 수능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올해 서울대 경영대와 연세대 컴퓨터학과, 또는 서울대 경영대와 지방 약대를 동시 합격한 사례들이 입시 업계에서 거론되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상위권 대학 사정도 비슷해서 인문·사회 계열 학과에서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이과생인 곳도 있는 걸로 알려졌습니다. 이제는 취업 전선 뿐 아니라 입시 경쟁에서도 밀리고 있는 건데, 상경대는 물론 인문∙사회 계열에서도 순수 문과생들은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된 셈입니다.
 

이공계도 '빈익빈 부익부'…학문 쏠림의 폐해

 
하지만, 이공계라고 사정이 다 좋은 건 아닙니다. 문과생들보다야 낫겠지만 이공계 내에서도 엄연히 인기학과가 존재하고 그 사이 경쟁이 치열합니다. 특히, 전문 인력이 달리는 분야에서는 아예 기업이 직접 인재 양성에 나서기도 합니다. 기업이 대학과 손잡고 '계약학과'를 신설해 학생들에게 실무 맞춤형 교육을 한 뒤 졸업 후 채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미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그룹과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등이 이런 방식으로 인재 확보에 나섰습니다.

당연히 취업이 보장되는 이런 학과를 중심으로 경쟁이 치열해지고 인재도 몰리게 됩니다. 같은 이공계 안에서도 순수 학문, 그러니까 기초 과학 분야는 후순위입니다. 이웃 일본에서는 꾸준히 나오는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것도 이런 현상과 무관치 않습니다.

인재 수급에도 수요 공급이란 게 있는 것이고 또 시대 변화에 따라 필요한 인재상도 바뀐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빈익빈 부익부'는 어느 분야에서든 부작용을 낳게 마련입니다. 과학이 경제적 삶을 윤택하게 한다면 인문학은 우리 정서를 풍요롭게 합니다. 취업, 입시의 여파 속에 학문 분야 전반에서 진행 중인 이런 '쏠림 현상'이 우리 사회에 미칠 부작용도 이제는 생각해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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