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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조언을 가장한 참견, 건강하게 거부하는 법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인-잇] 조언을 가장한 참견, 건강하게 거부하는 법
이번 설에는 고향에 다녀오셨나요? 폭설에서도 귀성길 정체가 그다지 없었다는 뉴스를 보면 방문을 자제하신 분들이 꽤 많았던 연휴가 아닐까 싶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친척들 간의 모임이 부쩍 줄어든 지 벌써 2년째,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으시지만 내심 반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특히 청년 세대는 대체로 반색이지요.

명절 직후 진행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19로 인해서 안 봐도 될 이유가 생겨 명절 스트레스가 줄었다'라는 응답이 77.3%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2030 청년 세대의 52.7%는 명절 스트레스의 핵심이 '가족, 친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라고 대답했는데요. 스트레스를 주는 주체는 '사촌과 부모님의 친지'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명절 직전, 청년들이 자주 방문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친척을 '빌런(영화나 만화 속 악당)'으로 묘사하는 게시물이 참 많이 올라옵니다. "친척은 빌런이다" 실제로 상담 현장에서도 많이 접하는 표현이지요.

코로나19 이전까지, 저희 상담사들은 청년들에 이런 요청을 많이 받고는 했습니다. "명절 스트레스 대비 집단상담 같은 프로그램이 필요해요." 명절 직전에 '내려가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집단상담'이라던가, 또는 명절이 끝난 후 '비교와 질문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디톡스 상담' 같은 것들 말이지요. 상담을 진행해보면 친척들의 질문 공세와 사촌끼리의 비교평가는, 단순히 '짜증 유발'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담에 참여한 한 청년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많은 또래에게 공감을 일으켰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 누구나 기대 반 불안 반 그런 심리잖아요? 근데 친척들은 불안을 더 가중하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내 걱정을 해준다기보다,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심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걸 어떻게든 교정해주는 게 어른이라는 착각도 느껴지고요. 그런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서, 한 해를 시작하고 싶진 않거든요."

어찌 보면 핵심을 찌르는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짜증 난다 라는 느낌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불안'을 더욱 가중하는 촉매 역할을 하는 거죠. '걱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말입니다. 걱정을 가장한 불안 조성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명절에 모인 친척들 말고도 참 많은 존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직장 동료, 가족, 친구, 때로는 나 자신까지.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라고 운을 떼는 말 치고, 내 마음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지 않나요? 이렇게 수많은 불안을 마주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대처하시나요? 그냥 삭혀버리시나요? 또는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하시나요?


그런 것이 쉽지 않을 때, 저는 '지우개 테라피'를 권하고는 합니다. 내 안에서 스스로 생겨난 불안보다는, 외부에서 타인의 '말'을 통해 들어오는 불안을 대하는 것에 적합한 방법인데요. 단순합니다. 흰 종이 위에 남들이 나에게 했던, 불안을 조장하는 말들을 연필로 쭉 써놓고, 지우개로 하나씩 지우면서 "이건 그 사람 생각일 뿐이야."라고 입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 지운 종이 위에,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내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덮어쓰는 것이지요. 아무리 빡빡 지워도 완전히 하얗게 되돌아가지는 않는 그 자리에, 내가 나를 위해 쓰는 응원의 메시지를 얹어주는 겁니다.

누군가의 말을 마음속에서 지우고, 받아들이지 않고, 건강하게 거부하는 연습을 시각적으로 수행해 보는 이 과정은, 단순하지만 직관적인 만큼 꽤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눈앞에서 그 말들이 지워지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는 경험을 통해서, 마음속에서 비워내는 것 역시 한결 더 수월해지는 것이지요.

한 해를 시작하는 지금, 여러분에게도 누군가가 '걱정을 빙자한 불안'의 화살을 쉼 없이 던진다면, 지우개로 싹 지워 나가보면 어떨까요. 시니컬하지만 단호하게 "그건 네 생각이고."라고 되뇌면서요.


인잇 장재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 청년 3만 명을 상담하며 세상을 비춰 보는 마음건강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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