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권의 전문가, 소위 선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예상은 달랐다. "TV 토론은 득점을 하는 곳이 아닌 실점을 줄이는 곳"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세간의 예상과 달리 TV 토론이 여론에 큰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누군가는 TV 토론을 통해 실점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상대방보다 더 큰 실점을 하기도 한다. 현재와 같은 박빙의 승부, 진영 대결 구도 선거에서 치러지는 선거에선 1, 2점의 실점이 성패를 가른다.
문제는 실점의 기준이다. 선거는 야구나 축구가 아니다. 어떤 것에 실점인지, 어떤 것이 득점인지를 가눌 명확한 기준이 없다. 시민의 마음은 유동적이고 제각각이기에 어떤 부분에서 호감을 갖는지, 어떤 부분에서 비호감이 줄어드는지 명확히 않다. 선거가 어려운 이유다.
다만, TV 토론과 관련해 정치권 선수들이 득·실점 여부를 판단하는 암묵적 기준은 있다. 각 후보의 토론에 대한 기대치다. 그리고 그 기대치는 단순히 후보의 콘텐츠뿐만 아니라 토론을 임하는 후보의 태도, 화법, 표정과 몸짓 등 비언어적 표현이 상당한 영향을 준다는 게 공통된 해석이다.
'국민의 기대치'라는 보이지 않는 허들
어제 주요 4개 정당 대선 후보들 간의 첫 TV 토론회. 각 당은 자당 후보가 토론에서 선전했다는 관전평을 내놨다. 아전인수 격 해석이긴 하지만, 관전평 속에 숨은 진심이 담겨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해 볼 필요는 있다.
민주당은 "이재명 후보는 시종일관 토론 의제를 민생의 장으로 이끌고, 대전환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이 나아갈 미래를 함께 찾고자 힘썼다"는 공식 논평을 내놨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윤석열 후보가 시종일관 차분하고, 듬직한 자세로 국가 지도자다움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정의당은 "심상정 후보는 시대정신도, 비전도 없는 진영대결과 네거티브만 난무하는 비호감 대선 판을 시민의 삶과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 경쟁으로 이끌어냈다"는 입장을 밝혔고, 국민의당은 "흠결 많은 양당의 후보가 아닌 국정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된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만이 진정한 대통령의 자격을 갖추었음이 이번 토론회를 통해 증명됐다"는 공식 논평을 냈다.
"특검 뽑는 자리가 아니다"…발끈한 이재명
하지만, 토론은 정견 발표가 아닌 상대가 있는 경기인 법. 상대방이 정책 대결이 아닌 검증 공방으로 몰고 갈 때,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이슈를 회피하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사이다 이재명'이라는 세간의 기대치는 이재명 후보 전략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대장동 의혹 공세에 이 후보는 정책 대결을 하자고 화제를 전환하려다가 이윽고 "특검 뽑는 자리가 아닙니다"라고 발끈했다. 정책 대결로의 프레이밍에 실패한 순간이었다. 경선 과정에서의 "바지 한 번 더 내릴까요"라는 발언과 마찬가지로 평정심을 잃은 듯 한 실책의 순간이었다. 그래도 국민의 높은 기대치와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는 토론의 타이밍을 감안할 때 이 후보 입장에선 선방한 토론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 신인'이라는 기대치는 넘었지만, 실망감은 극복 못한 윤석열
국민의힘 측은 이 후보와의 토론을 '검사 대 검사 사칭범'의 구도로 몰고 갈 것임을 공공연하게 밝혀 왔는데, "특검 뽑는 자리가 아니다"는 이 후보의 토론 발언과 민주당 논평까지 더해지면서 국민의힘이 의도한 토론 구도는 어느 정도 달성 됐음이 반증된 걸로 해석된다.
다만, "지도자다움을 보여줬다"는 당내 평가와 달리 "대선 후보 윤석열은 안 보였다"는 민주당의 평가는, 상대의 평가임에도 윤 후보에게 뼈아플 것으로 보인다. 당내 경선에서 경쟁자들은 윤 후보를 상대로 장학 퀴즈식 토론 전략을 펼쳤고, 특히 청약 통장과 관련해서 곤혹을 치렀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동산 문제가 주제인 토론회에서 청약 통장과 관련한 질문은 예상 질문 속에 있었을 테다. 하지만, 청약 점수와 관련한 질문 답변엔 '또' 실패했다. 청약 통장과 관련한 과거가 데자뷔 되면서 시청자들의 실망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출전권 얻은 심상정 · 안철수…과거의 굴레
하지만, 예년에 비해 어딘가 힘이 빠진 듯 해 보였다. 이재명 후보와의 공방은 진행되다 맥이 끊기는 듯 했고, 윤석열 후보와의 토론에서도 매섭게 상대방을 몰아붙이던 과거의 심상정은 모습은 뭔가 사라진 듯 했다. 여론 조사 지지율 정체 상황과 최근의 선대위 개편 등의 내홍이 미친 여파였는지, 연륜과 관록이 쌓인 심상정의 자연스러운 변화였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과거 토론회에서의 심상정의 모습은 아니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여러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다. 서서히 다가오는 큰 위기, 모두가 알고 있는 문제임에도 당장 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피해 왔던 연금 개혁이라는 회색코뿔소. 안 후보는 TV 토론에서도 연금 개혁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며, 개혁 필요성에 대한 후보들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 토론회에서 안철수가 가장 빛난 순간이었다.
하지만, 안 후보는 국민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데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조곤조곤 자신의 이슈를 이야기하며, 토론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임팩트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국민들이 과거와 다른 안철수를 바랐다면, 그 바람을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국정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해박한 지식'은 인상적이었지만,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의 자격'과는 어딘가 거리가 있어 보였다. 물론, '국민이 바라는' 대통령의 자격이라는 말 자체가 논쟁적인 개념이지만, '강한 리더십'을 바라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현실에 비춰볼 때 국민의당의 논평은 '진정한 대통령의 자격'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