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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기분…'마이너 필링스' [북적북적]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기분…'마이너 필링스'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26 :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 기분…<마이너 필링스>

"엄마가 건조기에서 하얀 토끼 모양의 실루엣이 찍힌 빨갛고 큼직한 티셔츠를 꺼내던 것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그 티셔츠가 대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버지에게 선물로 들어온 옷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이민자인 우리 엄마는 그 로고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이튿날 엄마는 일곱 살이던 내게 그 플레이보이 티셔츠를 입혀 학교에 보냈다."

메이저(Major)와 마이너(Miner),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대뜸 미국 프로야구의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부터 생각하는 분도 있겠고 저처럼 언론계에 있다면 메이저 언론, 마이너 언론부터 나올 수 있겠죠. 주류와 비주류, 소수자-마이너리티를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40대에 이성애자 남성, 4년제 대학을 나왔고 사무직 회사원이면서 정규직에 기혼자, 여기에 서울에서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빼도 박도 못한 주류-메이저에 속하겠죠. 그렇긴 하지만 저는 그래도 제게 약간은 마이너리티의 감성이 있다고 느낍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조금은 그런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 더욱 그러했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특성이 달라지진 않았으나 저는 이방인에, 아시아인이기도 했으니 소수자로 이런저런 감상을 갖게 되더라고요. 코로나 시국을 틈타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 아시안 헤이트, 증오범죄를 접하니 더욱 그랬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살고 있다면 어떨까,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고 싶은 책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인 캐시 박 홍이 쓴 <마이너 필링스>입니다. 한국어로 번역된 책에 붙은 부제는 '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입니다. 작가의 부모는 한국에서 살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작가를 미국 LA에서 낳았습니다. 이민 2세, 한국계 미국인이죠. 네이티브 미국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어려서는 집에서 한국어만 쓰며 살아서 학교에 갈 때까지 영어를 거의 몰랐다는 이력은 꽤 특이해 보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인이 아닌 듯한 묘한 감정, 작가가 그 이유를 인종주의에서 찾습니다.

한국에서 출간된 건 작년 8월이지만, 미국에서는 그보다 1년여 전인 2020년 2월에 나왔습니다. 코로나가 미국에 본격 상륙하기 직전이었죠. 책이 나온 뒤에 코로나가 번지면서 아시안 혐오로 이어지는 그런 상황이 전개되면서 이 책이 더욱 주목받게 됐습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아시아인들은 더 이상 해충이나 짐승처럼 취급받지 않고 '모범 소수자'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즉, 흑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거나 빈곤하지 않은, 근면하고 '우등한' 소수자라는 뜻이었다.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받아들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의 위계질서에서 봤을 때 모범 소수자라는 고정관념은 아시아인이 백인만큼 우등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시아인은 흑인과 비교했을 때에 한해서만 우등하다는 의미였다." - <한국 독자들에게>에서

'마이너 필링스'는 뜻 그대로 사소하고 작은 감정들이란 뜻이지만 마이너리티, 소수자가 느끼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듯이 백인 외에도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 등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있지만 인종주의를 의식한 정책이든 방안들은 주로 흑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느낌을 저조차도 어느 정도 받았습니다. 이는 아시안이 받는 '마이너 필링스'는 더더욱 주목받지 못해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아시안이 당하는 차별이나 범죄를 애써 인종 혐오나 증오 범죄가 아니라고 하는 당국의 입장에서도 드러납니다.
 
"아무 생각 없는 백인에게 인종 문제를 참을성 있게 가르치기란 정말 고되고 피곤하다. 내가 가진 설득의 능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한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유나이티드>에서

"트라우마를 겪고 이곳으로 이민 온 많은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감수한다. 사람을 속인다. 아내를 구타한다. 노름을 한다. 그들은 생존자이고, 대다수의 생존자가 그렇듯, 지독한 부모가 된다. 나는 다오를 보면서, 당신의 아버지가 집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다. 역사를 통틀어 강제로 질질 끌려가던 아시아 사람들을 생각했다. 태어난 고향 집에서, 제2의 고향 집에서, 태어난 고국에서, 제2의 고국에서 쫓겨나고 내쳐지고, 퇴출, 퇴거, 추방되던 그들을 생각했다." - <유나이티드>에서

코로나로 여러 모로 달라진 세상이 대개 부정적이지만 그나마 긍정적인 건 가려져 있던 어떤 민낯이 드러났다는 점입니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가 위기상황을 맞아 손쉽게 분출됐다고 할까요. 이 책이 나온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읽힙니다.

뉴욕에 아시안 대상 범죄가 여러 건 발생하면서 가족이나 친지들이 안부를 묻는 연락이 종종 왔습니다. 괜찮다고 했지만 실은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집 근처에 '타겟'이라는 대형 마트에서 겪은 일입니다. 생필품 살 게 있어서 둘러보고 있는데 '퉤' 소리가 들렸고 살펴보니 제 신발과 다리에 액체가 달라붙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침을 뱉은 것이었죠. 저쪽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한 백인 여성이 그런 것으로 보였습니다.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 잠시 멍하니 있노라니 그 여성은 제 쪽을 슬쩍 쳐다보고는 인상을 쓰면서 급히 가버렸습니다. 제게 침을 뱉은 게 확실해 보였습니다.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말씀드리면, 침 닦아내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렇게 비겁하게 자리 떴던 이유는, 이를 입증하기 위한 과정의 지난함에 비해 제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이 기껏해야 사과 정도라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냥 가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해서 그랬지만 반 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날 그 더러웠던 기분은 아직 남아있습니다. 제가 아시안이라 그랬을까요? 그런 것일까 싶지만 알 수 없습니다. 저라는 사람의 인격이나 특성과 관계없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누군가로부터 혐오를 받는 대상이 됐다는, 혹은 될 수 있다는 건 꽤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국계 미국인, 혹은 아시안이 당하는 문제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소수자들이 겪게 되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조금씩 버전을 달리하면서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일 같다는 거죠. 다소 장황하게 제가 겪은 사소한 사건을 이렇게 길게 말씀드린 것도 그래서입니다. 저에겐 불쾌하지만 의미 있는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마이너 필링스, 그 감정과 기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에 늘 있었던 존재"라는 책 말미의 문장이 마음 깊이 와닿았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은 무슬림이나 트랜스젠더처럼 보이지만 않으면 다행히 심한 감시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일종의 연성 파놉티콘 속에 산다. 이것은 아주 미묘해서 우리는 이것을 내면화하여 자기를 감시하며, 바로 이것이 우리의 조건부 실존을 특징짓는다. 우리가 여기서 4세대째 살았어도 우리의 지위는 여전히 조건부이다. 만족을 모르고 사들이는 물질적 소유물이든 주류 사회에 편입했다는 마음의 평화로서의 소속감이든 빌롱잉(belonging: 소유물, 소속감)은 언제나 약속되며, 아슬아슬하게 손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우리가 유순하게 처신하도록 유도한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의식이 해방되려면 우리는 이 조건부 실존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 <빚진 자>에서

*출판사 마티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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