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협의도 전에 '과징금'부터…부처 간 싸움에 기업 등 터지나

[취재파일] 협의도 전에 '과징금'부터…부처 간 싸움에 기업 등 터지나
공정거래위원회가 국내외 23개 해운사에게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 962억 원을 부과했습니다. 이들 해운사가 15년간 한국~동남아 항로의 해상운임을 담합한 것이 법이 허용하는 범위를 넘어선 것이란 게 공정위 판단입니다. 당초 공정위 심사관은 최대 8천억 원의 과징금 부과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공정위 전원회의가 산업 특수성 등을 감안해 과징금 규모를 대폭 줄였다고 합니다.
 

공정위 "120차례 운임 담합"

공정위는 이들 해운사들이 2003년 12월∼2018년 12월까지 541차례 회합 등을 통해 한∼동남아 수출·수입 항로에서 모두 120차례 운임을 합의했다고 봤습니다. 이들의 담합을 도운 동남아정기선사협의회(동정협)에도 시정명령과 과징금 1억6천500만 원 부과를 결정했습니다.

공정위에 따르면 고려해운, 장금상선 등 주요 국적선사 사장들이 2003년 10월 한∼동남아, 한∼중, 한∼일 3개 항로에서 동시에 운임을 인상하기로 교감하면서 담합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동정협 소속 기타 국적선사, IADA(아시아 항로 운항 국내외 선사들 간 해운동맹) 소속 외국적 선사들도 가담했습니다. 이들은 최저 기본 운임, 부대 운임의 도입과 인상 등을 합의하고 실행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개별 선사의 자체 판단으로 운임을 결정했다'고 알리며 담합 사실을 숨겼는데 의심을 피하려고 운임 인상 금액은 1천 원, 시행일은 2∼3일씩 차이를 뒀습니다. 공정위가 확보한 2017년 3월 16일 당시 선사 영업팀장 단체 채팅방에서 동정협 관계자는 화주 측 신고가 들어왔다는 해수부 연락을 받았다며 '운임회복은 철저히 개별선사 차원의 생존을 위해 시행한 것으로 대응해달라'고 요구했고, 일부 선사들은 화주에 대한 '보복'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해수부 "공동행위 불법 아니다"…해운법 29조가 뭐길래

공정위 설명을 보면 완벽한 담합입니다. 하지만, 해운업계는 공정위가 절차상 흠결을 빌미로 해운기업들을 부당공동행위자로 낙인 찍었다며 행정소송을 예고했습니다. 당사자이니 반발하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나 싶지만 관할 부처인 해양수산부 입장을 보면 그게 아닙니다.

해양수산부는 공정위 발표 후 "공동행위가 해운법상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과징금 부과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공정위와 해수부의 입장이 정반대인 건데 쟁점은 해운사들의 행위가 법이 인정하는 범위 이내인가 하는 것입니다. 논란이 된 법 조항은 해운법 29조입니다.
 
제29조(운임 등의 협약) ① 외항화물운송사업의 등록을 한 자(이하 "외항화물운송사업자"라 한다)는 다른 외항화물운송사업자(외국인 화물운송사업자를 포함한다)와 운임ㆍ선박배치, 화물의 적재, 그 밖의 운송조건에 관한 계약이나 공동행위(외항 부정기 화물운송사업을 경영하는 자의 경우에는 운임에 관한 계약이나 공동행위는 제외하며, 이하 "협약"이라 한다)를 할 수 있다.


1항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해운법은 해운사들이 운임 등에 관해 공동행위를 할 수 있게 허용하고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상황 자체가 애매한 겁니다. 해운업계는 EU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대형 선사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중소 선사를 도산시킨 뒤 운임을 대폭 올리는 일이 반복되자 1974년 유엔이 정기선 헌장을 통해 해운업계의 담합을 국제적 관행으로 인정했고 우리나라도 1978년 해운법을 개정해 지금까지 40여 년간 이 방식대로 운항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공정위도 법에 명시된 공동행위 자체를 문제 삼진 않았습니다. 다만, 선사들의 공동행위는 해운법이 정한 요건 하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며 선사들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해운법상 30일 이내에 공동행위를 해수부 장관에게 신고해야 하는데 120차례 합의를 해수부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관할 부처인 해수부는 기본적으로 정한 범위 내에서 하는 수시 가격 조정은 신고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나아가 선주들이 화주들과 최초 합의한 것보다 오히려 더 낮은 운임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불법 담합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해수부 관계자는 "공정위 제재를 보면 해운법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위법성을 판단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부처 간 이견 조율은 좋은데…과징금은 누가

낡은 관행 뒤에 숨어 담합을 일삼는 행위까지 제재하지 않으면 비싼 운임을 물어야 하는 수출 기업들이 보호할 수 없다는 공정위와 해운업 특성상 공동행위를 막으면 글로벌 대형 선사들이 가격 후려치기로 시장을 교란시켜 오히려 피해를 키울 수 있다는 해수부의 의견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해운법 개정을 놓고 부처 간 협의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다만 부처 간 이견 조정도 끝나기 전에 기업 제재부터 한 게 맞는지는 의문입니다. 과징금 부과가 정당할 수 있고, 또 그렇지 않다 해도 해운업계의 항소나 해운법 개정 결과에 따라 과징금은 취소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만 괜찮으면 다 되는 걸까요? 민간에 조치를 취하기에 앞서, 정부 부처 간 의견부터 정리가 필요해 보입니다.

(사진=연합뉴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