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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한밤 도심의 인질극…10월 '조커'의 악몽

잇따르는 강력 사건으로 불안 확산하는 일본

일본에서는 성년의 날 3일 연휴가 시작된 지난 8일 토요일 밤 10시쯤, 도쿄 도심 한복판인 시부야구 요요기 역 근처에 난데없이 극도의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방검복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 수십 명이 에워싼 곳은 상가 복합 빌딩. 지상에서 전면으로 개방된 계단을 통해 1층 내려간 곳에 위치한 고깃집 '야키니쿠 규세이(燒肉牛星)'에서 20대 남성이 점장을 흉기로 위협하며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온 겁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 홀로 고깃집을 찾은 이 20대 남성은 검은 천 모자(비니)를 쓰고 두터운 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6000엔(약 6만 1천 원) 정도의 음식을 주문해서 먹었습니다. 먹는 도중 가게 테이블에 있는 종이 냅킨에 뭔가를 끄적이더니 종업원을 불러 조용히 건넸습니다. 냅킨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폭탄을 가동했다. 소란 피우지 말고 경찰에 연락하라." 
 
메모를 읽고 당황한 종업원은 가게의 점장(49)에게 가서 이 사실을 보고합니다. 점장은 이 손님이 가게의 서비스에 불만을 품은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폭탄을 소지하고 협박을 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손님 테이블로 갑니다. 남성은 소지하고 있던 작은 박스와 과도를 보여주며 진짜로 폭탄을 가동했으니 손님들을 살리고 싶으면 모두 대피시키라고 말합니다. 칼은 진짜였고 폭탄은 진짜인지 의심스러웠지만, 고객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한 점장은 손님들과 다른 점원들을 가게 밖으로 내보냅니다. 또 남성의 요구대로 110 신고전화를 통해 경찰에도 연락합니다. 가게 안에는 남성과 점장 단둘만 남았고, 남성은 가게의 입구 쪽에 의자를 놓고 달려온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가게에서 쓰던 정육용 칼도 하나 집어 들었습니다. 이렇게 약 3시간의 한밤 인질극이 시작됐습니다. 
 
대치중인 일본 경찰
 
남성은 점장을 흉기로 위협해 억류하고 경찰과 대치한 상황에서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인질극을 벌이는 사람이 자기라고 알립니다. 남성이 전화를 건 곳은 일본 최대의 민영방송사 NTV로, 당시 전화를 받은 야근기자가 남성과의 대화를 급하게 녹음했습니다. 남성은 기자에게 인질극이 일어나고 있는 곳의 주소와 상호, 인질인 점장의 이름을 알려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칼을 갖고 있는 범인. 뭐, 범인이라고 해야 하나. 바로 나야. 길이가 20cm 이상 되는 정육용 칼. 그리고 폭탄 소지." 
 
기자가 무슨 폭탄이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아무튼 기폭장치랄까, 전원을 가동한 상태야. 우선 여기 와서 직접 범인과 얘기하는 게 어떨까. 그리고 가게 입구까지 오면 폭탄의 구조를 알려줄게." 
 
이어 남성은 NTV 측에 카메라맨과 기자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인질극 상황을 파악한 기자가 인질을 풀어주면 좋겠다고 말하자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그러면 요구에 따라야지. 이상!" 
 
인질극이 발생한 상황이 알려지면서 밤 10시 넘어 요요기 역 바로 옆인 사건 현장에는 이미 경찰 병력 외에도 소식을 접한 언론사 취재진이 몰려 있었습니다. 취재진은 경찰 저지선 밖에서 가게 방향으로 카메라를 향하고, 창문을 통해 범인의 얼굴도 포착했습니다. 범인과 경찰 사이에 실시간으로 어떤 교섭이 오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 인질극이 시작된 후 3시간 뒤인 9일 새벽 0시 조금 넘어 경찰이 공포탄 3발을 잇따라 쏘며 가게 안으로 진입해 남성을 체포합니다. 다행히 인질로 잡혔던 점장은 무사했습니다. 경찰은 인질극 현장인 가게 안에서 가게 물품이던 정육용 칼과 남성이 처음 소지하고 있던 과도, 그리고 남성이 폭탄이라고 부른 작은 종이 상자를 증거로 확보했습니다. 이른바 '폭탄'은 종이 상자에 알루미늄 포일을 두르고 휴대용 배터리를 붙인 조악한 것으로, 남성이 범행 당일 혼자 손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경찰 호송 중인 아라키 용의자
 
경찰 조사에 따르면, 아라키(荒木)라는 이름의 이 남성은 올해 28세로, 약 2주 전에 고향인 나가사키에서 혼자 도쿄로 올라왔습니다. 직장을 찾아보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줄곧 번화가인 신주쿠 인근에서 노숙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아라키는 경찰에서 "살아있을 의미를 찾지 못해 사형 판결을 받고 싶었다. 체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기가 먹고 싶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남성은 인질극 도중 점장에게 와인을 가져오라고 해서 조금 마시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 전에 도쿄에서 일어났던 전차 사건 있잖아. 그것처럼 하고 싶었어." 
 
그 '전차 사건'이란 지난해 10월 31일, 도쿄 조후시에서 신주쿠를 향해 달리던 특급 전철 안에서 일어난 방화 상해 사건을 의미합니다. 범인인 24세 핫토리 교타가 전동차 안에서 승객들에게 갑자기 흉기를 휘두르고 전동차 바닥에 불을 지르는 '묻지마 범행'을 일으켜 일본을 충격에 빠트린 바로 그 사건입니다. 당시 핫토리가 휘두른 흉기에 찔린 70대 남성이 중태에 빠졌고, 화재로 발생한 연기를 마신 16명이 병원에 긴급 이송되는 등 피해도 컸습니다. 핫토리는 범행 직후 모두가 대피한 객차 안에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우다가 붙잡혔습니다. 당시 그가 입고 있던 '조커' 의상이 많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10월 31일, 게이오센 방화범 핫토리의 체포 직전 모습
 
핫토리는 경찰 진술에서 두 달 전인 8월, 도쿄 오다큐 열차 안에서 일어났던 무차별 흉기 난동 사건을 참고했다고 말했는데, 이번에는 그 핫토리의 범행에서 영향을 받은 인질극이 발생한 겁니다. 이번 아라키의 범행으로 인한 사상자는 천만다행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처럼 강력 사건, 혹은 미수에 준하는 사건이 이른바 '참고'라는 형태로 꼬리를 물고 잇따르는 상황에 일본인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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