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라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월급날에 맞춰 사오던 갈색 봉투 속 기름진 치킨 한 마리의 맛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월급날에나 먹을 수 있던 귀하디 귀한 시절부터 언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국민 간식이 되기까지. '치느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들의 치킨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농촌진흥청이 조사한 2020년 기준 한국인의 한 해 1인당 닭고기 소비량은 15.76㎏였다. 1980년 2.6㎏였던 것에 비하면 6배 이상 늘었다.
치킨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치킨값이 2만 원으로 오른다는 소식에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최근 "한국 치킨은 비싸기만 하고 작아서 맛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치킨 논쟁이 벌어졌다. 생산자 단체인 대한양계협회는 "소비자가 작은 닭을 선호해서 그런 것"이라고 반박했다.
기사를 쓰면서 업계 전문가, 도계 업체와 대형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 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은 이 논란에 대해 익명을 요구했다. 최근 벌어지는 논쟁이 얼마나 뜨거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작은 닭'을 먹는 이유 : 왜 우리 식탁엔 '10호' 닭만 올라올까?
이에 대해 복수의 프랜차이즈 업체에 확인한 결과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과거와 같은 10호 닭으로 튀긴다. 조리법과 튀김의 조각 수가 달라져서 양이 적어졌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당장 정확한 확인이 어렵지만, 어쨌든 우리가 '작은 닭'을 먹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축산과학원에 따르면 미국의 육계 출하 중량은 2.9㎏(2020년), 일본은 3.0㎏(2018년), 중국은 2.53㎏(2020년)이다.
생산자들이 말하는 이유 : "소비자가 작은 닭을 원하니까"
10여 년 전부터 2.5kg 이상 큰 닭을 키워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했던 전북 김제의 한 양계 농가를 찾았다. 농장 주인은 대형 닭을 키우기에는 현실의 벽이 높다고 토로한다. "우리나라 대부분 양계 농장은 육계 업체와 계약을 맺고 거기서 요구하는 크기의 닭을 납품하는데, 큰 닭을 찾는 육계 업체가 없다"는 것이다. 육계 업체가 1~1.5kg의 작은 닭을 주로 찾다 보니 양계 시장이 그렇게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육계 업체는 우리가 자주 들어본 하림, 마니커 등으로, 닭을 가공하는 업체를 말한다. 육계 업체에 '왜 대형 닭을 생산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수요자(프랜차이즈 업체)가 10호를 원하니 어쩔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백숙용, 부분육용 큰 닭도 생산하지만 '치킨용 작은 닭'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국육계협회가 추산한 2020년 육계 도계량을 살펴보면 8억 6백만 마리 중 대형 도계 수는 150만 마리 정도였다. 0.002%에 불과하다. 육계 업체들은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작은 치킨만 환대받는 지금의 시장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번엔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 3곳에 '왜 대형 닭으로 치킨(한 마리 기준)을 만들지 않냐?'고 물었다. A 업체 "영계가 더 부드럽다. 대형 닭은 치킨용으로 잘 안 맞는다. 고기 수분이 많고 튀기기가 어렵다", B업체 "10호 닭이 제일 맛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닭 사이즈가 10호다", C업체 "수요가 있다면 큰 닭을 튀길 의향이 있다. 소비자가 큰 닭을 원하지 않는다"는 답이 각각 돌아왔다.
산업 구조로 살펴본 이유 : 큰 닭이 경제적인데, 작아야 수익이 난다?
작은 닭이 생산되는 이유에 대해 '소비자가 원하기 때문'이라는 답보다 좀 더 설득력 있는 답을 찾으려면 '육계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닭 생산 시장은 '계열화 사업' 형태로 이뤄져 있다. 육계 업체가 양계 농가에 병아리, 사료 등을 공급하고, 닭이 다 자라면 계약 조건에 따라 닭을 출하받고 수수료를 지급한다.
대형 닭 수요가 많아서 수익이 난다면 좀 더 시간을 들여 더 크게 키우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시도해볼만 하지만, 현재는 닭 크기가 커지면 오히려 상품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상황에서 이런 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홍재 대한양계협회장은 최근 한 라디오프로그램에 나와서 "조류인플루엔자(AI)로 정부가 48시간 이동제한을 발동해 2㎏이었던 닭이 2.5㎏, 3㎏까지 컸는데 수요가 없어 병아리 값인 한 마리당 600원에 팔았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양계농가는 사료값 등으로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된다.
'생산성'으로 살펴본 이유 : 한 달만에 닭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고유한 닭 품종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생산성이 높은 서양 닭을 들여 오면서 토종닭은 빠르게 사라졌다. 여러 달을 키워야 하는 토종닭에 비해 서양 닭은 사료를 적게 먹어도 살이 빨리 오르고 두어 달만 키워도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종닭의 모습을 현실에서 보기는 어렵지만 '민화'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오르라는 의미로 양반가 자제들의 공부방에는 붉은 벼슬이 달린 수탉 그림을 걸어 놓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런 민화 속 우리나라 닭은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닭과는 모습이 상당히 다르다. 대체로 갈색이나 검은색 깃털과 꼬리에 가슴이 길고 홀쭉하며 다리가 길다.
복원에 성공한 토종닭과 일반적인 육계를 보면 마치 다른 종처럼 모양이 다르다. 값싸고, 빨리 성장하고, 많은 양의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육계'가 없었다면 한달 키운 닭을 먹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소비자 취향으로 살펴본 이유 : 닭은 '통닭'이지!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국내 치킨의 원조는 1960년대 서울 명동에 등장한 '명동영양쎈터'의 전기구이 통닭이다. 물을 넣고 끓여 양을 늘려 먹었던 '백숙'이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통째로 구워 먹는 '통닭'으로 이어졌다.
영양쎈터의 상호와 옛 광고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닭 한 마리를 통째로 요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60~70년대에는 전기구이 통닭 광고가 신문까지 등장할 정도로 인기가 많고, 경쟁도 치열했다. 당시 전기구이 통닭은 부잣집의 간식으로 선망을 받았다.
1960년대 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국민 소득도 증가했다. 1971년 해표에서 국내 최초의 식용유를 출시하고, 닭과 기름을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서 본격적인 프라이드 치킨 시대의 문이 열렸다. 1977년 한국 최초의 프라이드 치킨집인 림스치킨이 명동 신세계 백화점에 개업하고, 이를 시작으로 1979년 롯데리아에서 조각 치킨 판매를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 속에 전 세계로 지점을 확장하던 미국의 KFC가 서울 종로에 진출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양념치킨이 등장하면서 대한민국 치킨 시장은 빠르게 발전하고, 다양한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등장했다.
치킨은 1997년 이후 국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외식 메뉴 1위를 내준 적이 없다. 치킨이 1등을 하기 시작한 시기는 IMF 외환위기와 맞아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나와 퇴직금으로 가장 쉽게 창업할 수 있는 것이 '치킨집'이었다. 다른 외식업에 비해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해지는 만큼 다양한 레시피도 등장했다. 치킨 조리법에도 변화가 있었지만 대세는 프라이드로 튀긴 닭고기에 양념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차별화가 두드러졌다.
여기서 '양념 맛으로 먹는 치킨' 논쟁이 등장한다. "한국 치킨은 작아서 맛이 없다. 양념 맛으로 먹는다"는 주장이다. 양념이 치킨 맛을 좌우하다 보니 닭 본연의 맛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 진다는 취지다.
구경 못해본 '큰 닭'의 맛은 대체 어떻길래?
이 인용문의 핵심은 "고기 맛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지방과 감칠맛을 내는 이노신 함량이 일반 닭보다 대형 닭에 많았다"는 것이다. 쓴맛의 원인이 되는 인 함량은 대형 닭에 적어, 대형 닭이 맛있다는 내용이다.
농진청은 이 원문의 일부 내용을 인용해 '닭이 커질수록 맛이 좋아진다'는 취지로 썼지만, 실제 원문의 내용을 보면 닭의 크기가 커진다고 맛이 좋아진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이에 대해 농촌진흥청은 "해당 논문으로 일반화해서 '크면 맛있다'라고 말하는 건 어렵다. 고기의 맛은 관련 물질, 물리적 특성, 요리 방법, 소비자의 주관적 동향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특정 성분의 차이로 맛이 좋고 나쁨을 단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소비자, 맛있는지 없는지 선택이라도?
그런 측면에서 닭 고기는 선택의 폭이 좁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닭도 부위별로 맛과 식감 풍미가 다른데, 작은 닭으로는 고기 자체의 다른 맛을 체험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해당 부위가 발달하기 전에 잡기 때문에 맛의 차이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의 치킨 윙은 어깨부터 팔꿈치의 굵은 봉과 가는 두 개의 봉쪽이 식감이 달라 소비자의 취향이 갈린다. 이런 식감의 차이를 느끼려면 적어도 16호짜리 닭은 돼야 한다. 1kg이든 3kg이든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어야 경험이라도 해볼 수 있다.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문정훈 교수는 "미식이 축산업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비자가 자신의 취향대로 음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생산자가 아닌 유통업체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나라 농업과 축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맛에 대한 관심과 경험이 늘어난다면 다양한 수요가 생기고, 생산자들도 거기에 맞춰 다양한 식자재를 공급하게 된다는 말이다.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은 떨어진다. 큰 닭이 맛있는지 작은 닭이 맛있는 지는 먹어본 소비자들이 선택하면 된다.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D콘텐츠 제작위원), 장선이 기자 / 디자이너 : 명하은, 박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