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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크리스마스 선물? 중고나라에서 샀지요 (ft. 핀란드 이야기)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핀란드에 20년 넘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문화적인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얼마 전 온라인 벼룩시장에 필요 없는 물건 몇 점을 내놓았다. 그런데 일부 구매자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이런 중고 물품을 구매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로선 중고품을 선물한다는 이들의 생각이 놀라웠다. '나만 이상한가…'싶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핀란드에서는 선물로 중고 물품을 주는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요즘에는 환경 친화적이라는 이유로 더욱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크리스마스 (사진=픽사베이)

핀란드의 선물 문화가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알면 알수록 새롭다. 물건 아닌 '체험'이나 '경험'을 선물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마사지-여행-콘서트-영화-전시회 관람처럼 돈이 필요한 체험도 있지만, 돈이 필요치 않은 체험도 있다.

지난주 나이가 지긋한 핀란드 여성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손주들 크리스마스 선물로 '밤의 숲'을 선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밤의 숲은 낮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라며 경이롭고 멋진 체험을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그 손주였다면 성탄절 밤에 할머니와 보낸 숲속에서의 특별한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다 공짜이다. 두 번째로 좋은 것들이 매우 비싸다(The best things in life are free. The second best are very, very expensive)."라는 코코 샤넬의 말처럼 최고의 선물은 돈으로는 사지 못하는 것들일지 모른다. 평상시 바쁜 엄마였다면 성탄절에는 아이들에게 오롯이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큰 선물이 될 수 있다. 주변에서 친구의 애완견을 성탄절에 대신 산책시켜주는, 그런 선물을 주는 사람도 보았다.

핀란드 선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DIY 선물이다. 그 중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많이 주고받는 선물이 바로 털 양말이다. 핀란드의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디려면 꼭 필요한 '필수템'으로 핀란드에서 겨울에 이 양말을 신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털 양말 몇 벌은 쌓아두고 있으며 대부분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이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엄마가 자녀에게, 혹은 친구끼리 주고받는 털양말은 오랫동안 크리스마스 시즌 최고의 선물이었다.

때론 털양말이 전혀 모르는 타인의 발까지 덥혀준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주변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 양로원 노인들, 유치원 원생들에게 자신이 정성스럽게 짠 양말을 선물하는 사람이 많다. 한 번은 뉴스에서 자신도 80세가 넘은 할머니가 무려 200벌의 양말을 떠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 할머니는 스스로를 '털양말 중독자'로 불렀다. 노령으로 인해 손가락 관절은 약해졌지만, 이상하게도 털양말을 뜨기 시작하면 그 고통이 사라진다고 했다. 이런 중독은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를 이롭게 하는 좋은 중독이다.

크리스마스 (사진=픽사베이)
크리스마스 (사진=픽사베이)

핀란드의 털 양말 사랑은 매년 팔리는 털실의 양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1년에 무려 1천만 개의 털실 뭉치가 팔리는데, 핀란드 전체 인구가 2벌의 양말을 짜서 신을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핀란드 국민 중 30퍼센트는 양말 뜨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보통은 겨울에 뜨개질을 많이 하지만 여름에도 뜨개질을 하는 열성파도 많다. 우리는 뜨개질하면 할머니나 중년의 여성을 먼저 떠올리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고정관념이 잘 맞지 않는다. 젊은 층도 뜨개질을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고 뜨개질 애호가가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다. 처음에는 핀란드 기차나 지하철에서 뜨개질하는 남성을 발견하고 놀랐는데, 이제는 일상적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털양말과 관련된 코끝 찡해지는 크리스마스 추억담도 많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다른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양말 뜨는 것만은 잊지 않으셨어요. 예전처럼 크리스마스 선물로 자신이 짠 털양말을 주셨답니다."

"40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로부터 받은 털양말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친구야 어디 있니? 네가 너무 그립구나"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어머니 대신, 어머니가 주셨던 털양말이 제 발과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줄 것입니다"

털양말은 용도도 다양하다. 보온병 커버, 휴대전화 케이스 등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겨울에는 조깅화가 되기도 한다. 요즘 SNS를 보면 털양말을 신고 눈 위를 뛰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양말을 2~4개씩 겹쳐 신는다. 핀란드에서만 볼 수 있는 신기한 풍경이다. 이런 양말 조깅족에 따르면 발 마사지 효과도 크고 발도 의외로 따뜻하다고 한다. 과연 핀란드 사람들의 털 양말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

핀란드에서는 동네마다 '뜨개질 카페'도 많이 들어서고 있다. 개인 취미인 뜨개질이 소셜니팅(social knitting)으로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나도 호기심에 한 뜨개질 카페를 방문해 보았는데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모두 뜨개질에 한창이었다. 한 할머니는 작년에 손녀에게 양말을 선물했는데, 올해도 손녀의 특별한 부탁으로 다시 양말을 뜨고 있다고 했다. 10대 취향에 맞게 최신 유행색인 보라색이 섞인 멋진 양말이 할머니의 노련한 손끝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자리에 있는 모두 다 복잡한 패턴의 뜨개질도 척척 잘하는 기술자들이었다. 어디서 이런 좋은 기술을 배웠냐고 물어보면 입을 모아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앞으로 자주 놀러 오면 기술도 전수해 주겠다며 낯선 이도 친절히 대해 주었다.

한때는 털양말을 받으면 뜬금없는 선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나도 그 가치를 알게 된 것 같다. 올해 나의 크리스마스 선물 위시 리스트에는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며 떠 준 털양말이 들어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뜬 양말을 주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엊그제 핀란드에 와서 최초로 털실과 뜨개질용 바늘을 구입했다. 이제 미션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양말 한 켤레를 완성해 보는 것이다. 대학교 때 엄마의 도움을 받아 직접 뜬 장갑을 누군가에게 선물해본 적은 있지만, 그 이후 대바늘을 손에 잡아본 적이 없다.

핀란드 털양말 중독자들의 '또래 압력'이 나에게 마침내 대바늘을 다시 손에 잡을 용기를 북돋아 준 것 같다. 이제 나에게도 한땀 한땀 '사랑'을 떠볼 설레는 시간이 찾아온 것 같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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