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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불을 켠 그 맛!…<불현듯, 영화의 맛> [북적북적]

내 마음에 불을 켠 그 맛!…<불현듯, 영화의 맛>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20 : 내 마음에 불을 켠 그 맛!... <불현듯, 영화의 맛>
"여기요, 라면 하고 공깃밥 하나 주세요. 라면은 면은 오뚜기 진라면에 수프는 삼양라면 걸로 해주시고, 삼양라면 수프 없으면 신라면 수프 반만 넣어주시고 파는 미리 넣어 푹 끓여주세요. 계란은 풀어서 젓지 말고 그냥 끓여주세요, 국물 탁해지니까. 그리고 공깃밥은 접시에 떠서 좀 식혔다가 주실래요? 찐 밥이면 공깃밥 필요 없고 그냥 김밥 하나 말아주세요. 소시지 빼고 단무지 하고 계란 시금치만 넣어서요. 맛살은 어디 거예요? 오양이면 넣고 아니면 그것도 빼고요. 아니, 오양맛살 없으면 그냥 오므라이스로 해주세요. 소스 끼얹지 말고 그냥 볶음밥을 계란부침으로 말아서 케첩만 접시에 따로 담아 주세요." 

이게 무슨 소릴까요? 라면에 공깃밥을 곁들여 주문하는 것 같긴 한데... 어디 고급 레스토랑에서라면 몰라도(라면 끓여달라는 주문을 받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을지), 여느 분식집에서 이렇게 주문했다면 주문받는 직원이나 다른 손님들이 다 황당하게 쳐다볼 것 같습니다. '어지간히 까탈스러운데 눈치는 없고 세상 물정마저 잘 모르나 보다.' 여기기 십상이겠죠.
 
"셰프 샐러드 주세요. 기름하고 식초는 뿌리지 말고 따로 주고요. 그리고 아이스크림 올린 애플파이 주세요. 파이는 데워주고요. 아이스크림은 위에다 얹지 말고 옆에다 주세요. 바닐라 대신 스트로베리로 주세요. 스트로베리가 없으면 아이스크림은 필요 없어요. 그 대신에 거품 크림 주세요. 진짜라야 해요. 깡통 따서 나온 거라면 필요 없으니까 그럴 경우엔 파이만 주세요. 그리고 그러면 파이는 데우지 마세요."
-<이민자와 하이웨이가 만든 아메리칸 라이프 스타일>에서

이 대사는 1989년 개봉한 미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샐리가 다이너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나옵니다. 한국으로 치면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데서 저렇게 주문하고 있으니 그저 "난 3번" 하고 주문했던 해리나 서버나 황당했겠죠. 자기주장 뚜렷하고 개성 강한 샐리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하겠는데 그걸 미국의 다이너 문화와 뉴욕의 명소인 카츠 델리, 그리고 그곳의 음식들과 함께 엮어서 설명하는 걸 읽고 있노라니 제 마음에도 불이 켜진 것 같았습니다. '아 맞다, 그 맛!' 오늘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는 책은 이주익 작가의 <불현듯, 영화의 맛>입니다.

앞서 소개한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로 시작해 미국의 다이너 문화로 이어진 글은 왜 미국 식재료 값이 특히 싼 지, 여기에 갈아 넣어지는 농장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짚어주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풀어가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영화와 음식이 매개하는 이야기라는 점만은 공통인 글이 이 책에 모두 스무 편 실려 있습니다. 국내와 외국 영화 비중은 대략 절반 정도씩인데 고전이 많다 보니 대부분 영화를 저도 봤거나 적어도 무슨 내용인지는 아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음식과 연결 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많은 내용이 새로웠습니다.
 
""나 나갔다 오리다" "언제 오세요" "몰라, 아마 늦을 거야" "올 때 카놀리 사 오는 거 잊지 마세요" 부인과 이런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집을 나선 클레멘자는 한적한 교외에서 소변이 마렵다며 차를 세운다. 그가 소변을 보는 사이에 로코가 폴리의 머리에 여러 발의 총알을 박아 넣는다. 선혈이 낭자한 자동차에서 로코가 나오자 클레멘자는 "총은 차 안에 버려둬. 카놀리는 챙기고."라고 한 마디 툭 던지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카놀리를 받아 든다."
-<마피아 영화 속 이탈리아 요리의 매력>에서

"영화 <김씨 표류기>에서 원시로 돌아간 상태의 생활을 해야 하는 김씨에게 가장 절실하게 그리운 문명의 상징은 짜장면 한 그릇이다. 그는 평생의 위업을 달성하듯 노력을 아끼지 않아 수제 짜장면 한 그릇을 만들어 내고 그걸 한 젓가락 입에 넣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짜장면은 정말 중국 음식일까>에서

"한국의 '군만두'는 언제부터인가 구운 만두가 아니라 튀긴 만두가 대세가 되었다. 그리고 또 언제부터인가 배달을 하는 중국집에서는 탕수육을 시키면 물론이고, 짜장면이나 짬뽕 같은 걸 2인분만 시켜도 '서비스'로 따라 나오는 메뉴가 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공짜로 나오는 단무지 정도로 수준이 전락하여 버린 군만두에 성의가 들어갈 리 없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은 주인공이 그 맛을 찾아 자신이 감금된 장소를 찾아낸다는 설정이 영화적으로는 재미있지만 현실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에 15년 동안 꾸준히 변치 않는 맛으로 일관되게 군만두를 만들어 내는 식당이 과연 존재할까?"
-<한중일 만두 삼국지>에서

돼지국밥, 해장국, 곰탕, 짜장면, 전기통닭, 갈비, 설렁탕, 냉면, 막국수, 잔치국수, 갓김치, 감자, 고구마, 옥수수, 중국 음식, 라멘, 라면, 스시, 참치, 만두, 파스타, 카놀리, 와인, 슈니첼, 초콜릿, 소고기, 엠파나다, 모히토, 후무스, 팔라펠, 쿠스쿠스... 음식마다 영화마다 작가의 내공과 우리의 삶과 세상의 단면들이 흘러다닙니다. <만추>, <칠검>, <묵공> 같은 주로 해외를 무대로 합작 영화를 만들어왔던 작가의 인생이 묻어 나오는 것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음식을 좋아하는 분들도, 그 둘 모두를 사랑하는 분들은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출판사 계단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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