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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당신의 인생에서 '나 자신'은 몇 번째인가요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유미의 세포들'이라는 작품을 아시나요?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장수 콘텐츠인데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네이버 웹툰으로 연재되는 내내 인기 순위 최상위권을 기록하다가, 2021년부터는 시즌제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인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남녀 할 것 없이 MZ세대라면 다 한 번쯤 봤거나, 최소한 이름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하는 작품인데요,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신가요? 주제는 다소 심플합니다. '30대 직장인 김유미의 일과 사랑'이거든요. 하지만 이 작품의 인기 비결은 디테일한 심리 묘사와 독특한 설정에 있습니다.

유미의 세포들

작중에서 모든 사람은 머릿속에 하나의 마을을 가진 존재들이고, 마을 속에는 그 사람의 다양한 세포들이 사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성적 판단을 관장하는 이성 세포, 낭만과 감성을 맡고 있는 감성 세포는 물론, 먹성을 대변하는 출출이 세포 등 다양한 세포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미가 어떤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어떻게 반응할지 토론을 하기도 하고요. 치고받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세포가 나서서 주도권을 잡느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는데요. 사무실에서 집중할 때는 주로 '이성 세포'가 활동하고요. 새벽 2시, 잠들지 못하고 궁상스러운 생각만 하는 날에는 '감성 세포'입니다. 반대로 일 해야 할 때 출출이 세포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편의점으로 달려가기도 하지요. 원작자인 이동건 작가가 사람의 판단이나 성격, 습관을 '세포'를 활용해 절묘하게 담아내는 실력은, 상담가라는 직업을 가진 제 눈에도 무척이나 탁월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이 드라마화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원작의 팬들은 다양한 기대감을 표현했는데요. 주로 "그때 그 명장면이 드라마에서는 어떻게 묘사될까?"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장면 중 하나가 '유미의 우선순위' 장면인데요. '유미의 우선순위'는 주인공의 머릿속 세포 마을에 있는 게시판 이름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게 마을 광장에 세워져 있는데요. 그녀가 무엇을 가장 중요시하는지, 순위로 매겨져 있습니다. 3위 엄마, 4위 아빠, 5위 떡볶이, 9위 월급 이런 식으로요. 유미는 항상 연애를 시작하면 1위에 남자친구를 두고 자신은 2위로 두는 타입이었는데요. 시청자들이 모두 기다리던 '우선순위 장면'은 바로 이 순위가 뒤집히는 장면입니다.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더이상 연인이 우선이 아닌, 자기 자신을 1순위로 올리는 것이지요. 그 후, 유미는 처음으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장면이 많은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준 이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유미의 우선 순위 1위는 늘 남자친구였던 유미, 남자친구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 1순위가 바뀌던 날. (사진=드라마 '유미의 세포')

실제로 제가 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내담자의 문제들 역시 나보다 타인을 우선하는 판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원하지 않지만 부모님을 실망하게 할까 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연인이 떠나갈까 봐, 모두가 나에게 일을 떠넘기지만 거절하면 동료들이 날 어떻게 볼지 몰라서." 같은 일상적인 문제에서부터, 폭력, 갑질, 가스라이팅 등 심각한 문제까지 다양합니다. 이러한 내담자들에게 "당신의 우선순위를 한번 적어볼까요?"라고 종이를 내밀면, 대체로 1위를 잘 적지 못하고 주춤거립니다. 결국 상담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순위를 한 계단씩 올리는 과정을 거치며 조금씩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부당한 것에 거절하거나, 무리한 기대에 대해 부담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도 하고요.

웹툰 '유미의 세포들'의 한 장면. 원작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사진 출처='유미의 세포' 웹툰)

물론 언제나 나 자신이 1순위일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는 내가 아닌 것을 1순위에 두면서 '희생'이나 '배려'라는 숭고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되니까요. 하지만 내가 아닌 것을 우선하는 것과, 나를 우선순위에서 밀어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나 자신을 홀대하는 경험들이 누적되면, 결국 타인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에도 점점 무감각해지게 되니까요. 저도 사람인지라, 종종 이런 실수를 하곤 합니다. 올해는 특히 그랬던 것 같아서, 어제는 방안에 작은 칠판을 하나 사 두고 나의 우선순위를 적어 보았습니다. 유미의 세포들 속 명대사인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명 뿐이야, 다른 주인공은 없어."를 떠올리면서요.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나에게 1순위는 무엇이었는지, '나'는 어디쯤 있었는지를요.
 
 

장재열 네임카드 (수정)


#인-잇 #인잇 #장재열 #러닝머신세대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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