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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스夜] '꼬꼬무' 씨랜드 화재 참사…천사 같은 아이들 목숨 앗아간 사건의 진실은?

[스브스夜] '꼬꼬무' 씨랜드 화재 참사…천사 같은 아이들 목숨 앗아간 사건의 진실은?
왜 그날의 여름캠프는 마지막 캠프가 되었을까?

9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마지막 여름캠프 : 씨랜드 화재 참사'라는 부제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그날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1999년 6월 29일, 7살 세라가 다니는 유치원은 1박 2일 일정으로 서해안의 한 수련원으로 여름캠프를 떠났다. 제일 좋아하는 세일러문 잠옷까지 챙겨 떠나는 세라는 아빠에게 애착 인형인 강아지 인형을 건네며 "아빠 나 캠프 갔다 올 때까지 우리 멍멍이 잘 돌봐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세라가 집에 없는 것만 빼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새벽 갑자기 세라의 아빠는 처제의 전화 연락을 받았다. 다급하게 빨리 TV를 켜라는 처제의 이야기. 그리고 처제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바로 TV를 켜자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경기도 화성군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인 씨랜드 수련원에 불이 났다는 소식. 당시 인기가 많던 수련원인 이곳은 다름 아닌 세라가 캠프를 떠난 곳.

당시 씨랜드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은 세라의 소망유치원을 포함해 총 550명. 그중 무려 500명이 유치원이나 학원에서 온 어린이들이었다.

1층은 사용하지 않고 2, 3층만 객실로 사용하던 씨랜드는 가운데 긴 복도를 두고 양쪽으로 총 26개의 방이 늘어져있었다. 밤 9시가 넘어 방으로 온 아이들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런 상황에 화재가 발생했던 것. 화재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이날 사전 답사 차 방문한 태권도 도장의 송영규 관장님이었다. 그는 새벽 1시 집으로 돌아가려 일어섰다가 이상을 감지했다. 방문을 열고 나오니 형광등 주위에 하얀 연기가 지나갔던 것. 그리고 복도를 보니 3층 복도 전체가 이미 연기가 자욱한 상황이었다.

본능적으로 화재를 직감한 송 관장은 화재경보기를 눌렀다. 그러나 화재경보기는 작동하지 않았다. 이에 그는 급히 불이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방에서 자고 있던 선생님들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송 관장과 선생님들은 급히 아이들을 대피시켰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어떻게든 아이들을 깨워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순간 정전까지 되며 아비규환이 되었다. 송 관장을 비롯한 선생님들을 아이들을 억지로 깨워서 밖으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길을 찾지 못하자 송 관장의 아내는 박수를 치며 아이들의 길을 안내하기도 했다.

급하게 대피를 하던 그 순간 연기는 이미 2층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사이 송 관장은 불길이 시작된 곳을 찾았다. 불길이 시작된 곳은 바로 301호. 301호의 방문을 열자 시커먼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에 송 관장은 화재 진압을 위해 소화기를 작동시켰지만 이 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치솟는 불길과 유독가스. 그 상황에 송 관장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302호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조건 아이를 살려야 된다는 생각에 그는 아이들을 깨우고 미처 일어나지 못한 아이들은 들쳐메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를 도와 다른 어른들도 아이들의 구조에 나섰다. 그렇게 302호 아이들은 전원 구조에 성공했다. 그런데 마지막 아이를 안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순간 바깥쪽에서 전선이 터지며 건물 전체로 불길이 번졌다.

화재를 목격한 지 20분 만에 전소에 가까운 정도의 상태가 된 씨랜드. 불길이 옮겨 붙는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그런데 이때까지도 소방차는 도착하지 않았다. 화재 시 골든아워는 접수 2분에 출동 5분으로 7분, 하지만 신고를 한 지 20분이 지나서 소방차 1대가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이어 많은 소방차가 도착했으나 이미 사태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새벽 4시 화재가 진압되고 본격적인 수색 작업이 시작됐다. 2층에서 발견된 시신은 223호의 출입구 근처에서 발견됐다. 작은 몸집의 시신은 바로 부천의 한 유치원 원생 74명 중 유일하게 구조되지 못한 혜지. 당시 혜지의 선생님은 분명히 혜지를 깨워서 데리고 나왔으나 인원 파악을 할 때 보니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3층은 불길이 시작된 곳이라 2층과는 상황이 달랐다. 곳곳에서 시신이 추가로 발견된 것. 318호에서 1명, 306호에서 3명. 이들은 초등학교 교사와 씨랜드 아르바이트생으로 아이들을 구조하다 안타깝게 숨진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불길이 시작된 301호에는 아직도 화염이 가득했다. 그리고 소방관은 창문 아래쪽에 뭔가가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잿더미와 뒤엉킨 불에 탄 시신들은 몇 명인지 육안으로 확인도 되지 않았다. 이 시신은 바로 소망유치원의 7살 해님반 아이들, 세라네 반 아이들이었다.

세라의 아빠는 사망자 명단에서 딸의 이름을 확인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다쳤어도 살아만 있어라 하는 마음이었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라며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괴로워했다.

사망자 명단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확인한 부모들은 급히 국과수로 달려갔다. 내 눈으로 직접 아이를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국과수는 부모들을 말렸다. 훼손이 너무 심해서 부모님이어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것.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뼈도 제대로 안 남았다는 이야기에 울음바다가 됐다.

그러나 세라 아빠는 세라를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괴로움을 무릅쓰고 세라의 시신을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단번에 세라를 알아봤다. 시신의 다리 한쪽에 세일러문 잠옷이 타다 남아있었던 것.

301호의 사망자는 총 18명, 소망 유치원 해님반 아이들은 전원 사망했다. 이 사실에 부모들 만큼이나 괴로워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송영규 관장이었다.

송영규 관장은 "다음날 알았다. 우리가 이동을 할 때 어느 분이 아이들을 다 구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정말 다 구한 줄 알았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뉴스를 보니까 아이들이 사망했더라. 그게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다. 그 생각만 하면 자꾸 잠도 못 자고 괴롭다"라며 현재에도 과거의 기억으로 괴로워했다.

이에 그의 아내는 "밤에 자다가 뛰쳐나가기를 몇 번을 했다. 아이들이 자꾸 운다더라"라며 괴로워하는 남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누구보다 많은 아이들을 구한 송영규 관장은 아이들을 다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301호에서 발견된 시신 중 어른은 없었던 것. 분명 6, 7세 아이들은 인솔 교사가 함께 해야 함에도 301호에서 괴로움 속에 죽어간 아이들 곁에는 선생님이 없었던 것이다. 302호의 아이들을 구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소망유치원 선생님들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을까. 당시 소망유치원 원장은 314호에서 선생님들끼리 협의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수시로 가서 아이들을 점검했다고 밝혔다. 314호는 301호 바로 맞은편 방. 그런데 화재가 난 것을 모르고 아이들을 구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회의를 하느라 불이 난 걸 몰랐고, 불이 난 것을 알았을 땐 불길이 너무 세서 구조하러 들어갈 수 없었다는 원장의 변명.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회의가 아닌 회식을 하고 있었던 것. 그들은 아이들을 재워두고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아이들을 구조하던 이들은 소망유치원 선생님들이 있었다는 314호에서 나오는 사람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밝혀 이들이 수련원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회식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일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끝까지 사실을 밝혀내지 못했다. 어쨌든 화재의 순간 소망유치원 아이들 곁에는 선생님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은 분명했다.

이날 세상을 떠난 해님반 아이가 쓴 글에 이야기꾼들과 이야기 친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는 "저는 소망 유치원에 다닙니다. 저는 선생님을 사랑합니다. 저는 해님반 선생님을 믿습니다"라고 했던 것.

씨랜드 화재는 왜 시작된 걸까? 301호 내부에서 시작된 불에 대한 국과수의 현장 감식이 진행됐고, 단 이틀 만에 결과가 나왔다. 국과수 수사 결과 모기향에서 시작된 불이 휴지나 옷가지에 옮겨 붙었고 이것이 큰 불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유족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었다.

이에 전문가들도 모든 조건을 똑같이 맞춰놓고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모기향 불로 화재가 일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러 가능성이 있기에 실험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목격담을 통해 전기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생겼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다.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이라면 소망 유치원 선생님의 책임, 전기 문제라면 씨랜드 관계자와 씨랜드 관리 의무가 있는 해당 관청, 다시 말해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국과수에서 전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여전히 유족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결론. 결국 유족들은 스스로 화재사고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현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수련원에 들어가기도 전 진입로를 보고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진입로는 버스가 진입할 수도 없었던 것. 사고 당시 소방차가 늦게 도착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화재 현장에 도착한 유족들은 할 말을 잃었다. 2, 3층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씨랜드. 이 건물은 1층만 콘크리트 건물이고 2, 3층은 조립식 가건물인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구조였던 것. 심지어 컨테이너끼리 용접도 하지 않고 실리콘으로 대충 연결만 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지붕은 철판 사이에 스티로폼이 있는 샌드위치 패널로 되어 있었다. 특히 샌드위치 패널의 철판 하나는 없는 구조로 스티로폼이 그대로 노출되어 불이 순식간에 붙었던 것. 벽은 더 최악이었다. 스티로폼에 합판을 붙이고 거기에 벽지를 붙여 모형 만들듯이 만들었던 것. 301호 내부를 본 부모들은 울분을 참지 못했다.

씨랜드 원장은 이 같은 구조에 대해 돈을 아끼기 위함이라고 밝혀 더욱 분노를 자아냈다. 콘크리트와 철근을 제대로 쓰면 방 하나에 1천500만 원이 드는데 컨테이너로 올리면 210만 원으로 비용이 7배 차이였던 것. 전기 설비는 무허가 업자에 맡겨 모든 것이 엉망이고 소방시설도 마찬가지였다. 소화기는 애초에 불량이었고 경보기는 애들이 장난칠까 봐 스위치를 껐다고 밝혀 타블로와 장현성의 분노를 자아냈다.

아이들의 안전으로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곳에서 안전은 가장 뒷전이었던 것. 그렇다면 이 건물은 어떻게 허가를 받고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관련 공무원들을 소환해 조사를 하자 씨랜드의 건축허가서, 건물 도면 모두 가짜였다. 그리고 관련 공무원들은 모두 몰랐다고 발뺌했다.

그런데 이때 군청에서 수련원 허가를 맡고 있던 공무원 하나가 경찰에 수첩을 하나 제출했다. 강 과장이 유독 씨랜드에 관심을 갖고 씨랜드 허가를 내주라고 압박했다는 것. 이에 강 과장의 윗선에서 압박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됐으나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씨랜드 참사의 최종 판결은 씨랜드 원장에 5년 형, 벌금 500만 원. 소망유치원 원장에 징역 2년 6개월, 해님반 선생님에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화성군청 강 과장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그리고 나머지 관련 공무원은 모두 혐의 없음으로 풀려났다.

유족들은 수긍할 수 없는 참담한 결과에 재조사를 요구했다. 유족들은 국회도 찾아가고 총리 면담을 9차례나 신청했으나 그러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유족들의 마음은 슬픔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유족 중 도현이의 엄마는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상한 전 국가대표 필드하키 선수 김순덕 씨. 그는 도현이를 잃고 "정부가 저희 애들한테 대처하는 것을 보고 사실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라며 자신의 훈장을 반납했다. 그제야 총리와의 면담이 성사됐다.

사고 발생 50일 후 성사된 총리 면담. 당시 총리는 재수사를 약속했으나 그때뿐 추가 수사는 없었다. 그리고 씨랜드 참사 4개월 후 인천 인현동 화재사고로 55명이 사망하고 7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된 이들의 대부분이 중고등학생인 이 사고의 원인과 과정은 씨랜드 참사와 판박이였다.

결국 대한민국을 떠난 도현이 가족. 그들은 더는 이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고 이민을 떠났다.

사고 6개월 후 씨랜드 백서를 발간한 정부의 주요 내용은 사고 수습과 보상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만드는 백서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고 원인 파악과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지만 문제가 된 부분이나 앞으로의 고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백서에 적힌 "원만한 조기 수습"이라는 구절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결국 유족들은 백서를 다시 만들었다. 이들의 백서 발간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 아이들을 잃은 지 벌써 9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까요? 그저 자신 없고 두렵지만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다시 일어섭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지는 것 없고 오히려 사건은 더 축소되고 왜곡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저희들의 심정은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갈 뿐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지식 하나 없는 저희가 사건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파헤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야겠다는 생각에 공부하고 또 공부했습니다. 저희들의 힘이 미약하여 진실을 다 밝혀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단초만은 마련하고 싶습니다. 이것을 발판 삼아 모든 의혹이 속시원히 풀리고 우리 아이들이 영혼이 편안히 쉬길 바랄 뿐입니다.

이에 타블로는 "유족들이 백서를 다시 만들어야만 했다는 게 얼마나 힘들겠냐. 이걸 다시 정리한다는 게. 그런데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게 너무 화가 난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유족들은 아이들에게 약속했다. 꼭 진실을 밝히고 더는 아이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그리고 이들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국어린이안전재단도 만들었다. 이 재단의 설립 비용은 자식을 잃고 받은 피해 보상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참사 38일 후 치러진 아이들의 장례식. 아이들의 유해는 씨랜드에서 가장 먼 동해에 뿌려졌다.

이날 방송에 출연한 사고 관련자들은 정말 어렵게 용기를 냈다. 그들이 용기를 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

세라의 아빠는 "세월이 20년 넘게 흘러도 바뀌는 게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왜 자꾸 이런 사고들이 되풀이되는지 모르겠다"라며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어른들이 한 번만 더 모든 일을 할 때 이게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저렇게 해도 되는 건가 심사숙고한 후 결정을 해서 다시 이런 사고가 되풀이되지 않게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바람을 전했다.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백지영은 "세상엔 억울한 죽음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게 내가 아니란 법은 없다"라며 "이분들은 그게 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겠냐"라고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비비는 "아직도 그런 건물이 많고 그런 사고가 일어나고 있잖냐. 왜 이런 걸 되풀이하는 건지 화가 난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타블로는 "아이들이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믿는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른들은 사실 그렇게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잖냐. 그래서 참 미안한 거 같다"라고 어른들의 자화상에 부끄러워했다.

또한 장도연은 "책임감 없는 어른들 때문에 죄 없는 아이들만 희생당한 것 아니냐. 어른으로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가슴 아파했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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