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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핀란드 사람들의 힐링 푸드 - 카렐리얀 스튜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11월.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것 같은 애매모호한 달이다. 그래서 그럴까. 존재감도 별로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핀란드의 을씨년스럽고 생기 없는 잿빛 하늘을 보고 있자 하니, 왜 미국의 한 시인이 "11월에 내가 한 번 죽었다는 것을 안다(I know that I have died before once in November)"라며 11월을 죽음과 연관 지어 표현했는지 알 것 같기도 같다.

11월은 핀란드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달이다. 앞으로 반년 가까이 펼쳐질 무시무시한 동장군이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달이며, 한겨울 같이 눈이 내리지 않아 날이 더 어둡기 때문이다. 이런 스산한 계절일수록 우리에겐 따뜻한 '힐링 푸드'가 필요하다.

90년대 베스트셀러인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책을 기억하는가? 미국인에게 닭고기 수프가 지친 심신을 달래는 음식이라면, 핀란드인에게는 '카렐리얀 스튜(Karjalanpaisti 카르얄란빠이스티)'가 있다. 핀란드인들에게 '추억의 음식'을 물으면 그 많은 음식 중에 카렐리얀 스튜는 빠지지 않고 등장할 정도로 핀란드인에게 소중하다.

핀란드인들의 '힐링 푸드' 카렐리얀 스튜. (사진=Ralf Roletschek, 위키디피아)

고기를 오랜 시간 동안 오븐에서 뭉-근하게 끓여내 오직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하는 이 스튜는 소박하지만 깊은 맛을 낸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골곰탕 또는 갈비탕과 비슷한 류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카렐리얀 스튜는 요즘이야 고기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덕분에 핀란드 식탁에 자주 올라오는 친숙한 음식이 됐지만 예전에는 겨울철 특식 외에 부활절, 하지제, 성탄절 등 특별한 날에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 하지제 : '중하절'로 부르기도 하며, 하지일(6월 20일, 6월 21일)은 북유럽의 명절로 매년 날짜가 바뀐다.)

카렐리얀 스튜의 재료와 조리법은 간단하다. 하지만 간단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처럼 '사소한' 차이로 음식 맛에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고기는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를 모두 사용해도 좋고 양고기는 빼고 쇠고기와 돼지고기만 써도 좋다. 원 레시피에는 소고기를 다른 고기보다 2배 더 많이 넣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취향에 따라 고기 비율은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하다. 어깨살, 목살 등 식감이 질긴 부위를 주로 사용하는데, 갈비처럼 뼈가 붙은 부위를 넣으면 맛이 더 풍부해진다.

카렐리얀 스튜를 만들기 위한 재료들 (사진=Ralf Roletschek, 위키디피아)

고기가 귀했던 옛날에는 간이나 콩팥 등 내장기관도 같이 넣어 끓여 먹기도 했다던데, 우리나라의 곱창처럼 특유의 감칠맛이 있었나보다. 요즘은 내장을 거의 쓰지 않지만 이따금 '송아지 콩팥' 등을 넣어 요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먼저 큼직큼직하게 썰어낸 고기를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리고 겉면이 갈색이 될 때까지 반 정도 익힌다. 당근과 양파도 먹기 좋게 썰어 준비한다. 그리고 오븐 용기에 반쯤 익은 고기와 채소를 넣고 골고루 섞어준다. 이후 재료가 완전히 잠길 정도로 찬물을 부어주고 소금, 통후추, 월계수 잎을 넣은 뒤, 오븐에서 낮은 온도로 오랫동안 조리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단계를 제외하고는 뚜껑을 덮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고기 누린내가 사라진다. 물이 많이 졸아들면 중간에 물을 조금 더 넣어도 좋다.

예전에 나무를 떼던 전통 오븐을 사용하던 때는 80도 정도의 낮은 온도에서 8~10시간정도 밤새도록 조리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렇게나 느린 방법으로 조리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통은 오븐 온도를 150~160도에 맞춰 2~3시간정도 조리한다.

핀란드 요리 사이트를 찾아보니 가장 최고의 맛을 내는 온도는 바로 끓는 점인 100도 바로 밑에서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일 때 얻어진다고 한다. 이렇게 끓이면 국물도 더 맑고 고기도 더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인내를 가지고 온도와 시간을 잘 이용하면 고기, 물, 소금만으로도 환상적인 맛을 낼 수 있다. 완성된 스튜는 빵, 카렐리얀 파이(핀란드 전통 쌀 파이). 찐 감자, 으깬 감자, 파스타면 등과 함께 먹으면 좋다. 야생 링곤베리로 만든 잼과 곁들여 먹기도 하는데 상큼한 맛을 더할 수 있다.

카렐리얀 스튜 전통 식사법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양 음식 예절과는 조금 다른데 옛날에는 식사 마지막 단계에서 접시에 남아있는 국물을 먹기 위해 그릇째 들고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귀한 고기 국물이라 단 한 방울도 놓칠 수 없어 나온 식사법이다. (요즘은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키는 핀란드인들은 많지 않다.)

카렐리얀 스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핀란드에서 맛의 고장으로 꼽히는 카렐리얀 지방의 대표적인 음식이다. 이 지방에서는 오래전부터 음식과 관련된 재미있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는 가난할지 몰라도 절대로 배고프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가난한 이유는 너무 잘 먹어서이다"

우리네 집도 카렐리얀 지방 사람들처럼 엥겔지수가 점점 더 높아져서 걱정이지만, 이렇게 추울 때일수록 더 잘 먹고 힘낼 필요가 있다. 김치는 못 담갔지만 고기라도 푸짐하게 사다가 카렐리얀 스튜 한 솥을 끓여낸다면 핀란드의 어둡고 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잘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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