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그사람] '대박 영화사 명필름' 주역들이 전태일을 조명하는 까닭은?

청개구리 같은 여자, 황소 같은 남자

1. 요즘 이 부부의 관심은 온통 태일이, 태일이, 태일이 뿐이다. 지금까지 마흔네 편의 작품, 올해에만 세 편의 작품을 내놓은 사람들이니 영화 한 편 개봉하는 것이 그리 새로운 일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자신들의 영화 인생 전부를 건 듯한 비장함까지 엿보였다. 30년 전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파업전야>를 만들었던 이은에게 '전태일'은 인생의 숙제 같은 인물이었다. 언젠가는 전태일의 삶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10년 전 영화의 원작이 되는 만화 '태일이'를 읽은 뒤 본격적인 시나리오 작업에 착수했다. 그 무렵 명필름에서 나온 첫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 작품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영화 제작사 '명필름' 심재명 공동대표

심재명 : "실사 영화로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풍광을 담으려면 우리 돈으로 100억 원을 써도 부족할 판이에요. 대규모 군중 장면도 나오고 평화시장의 열악한 모습도 재연을 해야 하니까. 그런데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들여서 훨씬 더 보편적으로 많은 세대들에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이 영화의 연출을 1986년생 홍준표 감독에게 맡겼다. 30대 청년의 감성을 '전태일'에게 입히겠다는 뜻이다. 그 시대 상황을 사실적으로 구현했지만 인물들의 이미지는 요즘 청년들을 닮았다. 주인공의 다리가 길어지고 코가 더 높아지고 뺨이 더 날렵해졌다. 지나치게 진지하지도, 관객들의 눈물을 쥐어짜지도 않는다. 영화의 주요 관객으로 상정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이 좋아할 수 있는 이미지와 감성을 고려한 것이다. 이 부부의 노력은 인상적이었지만 전태일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과 관심은 다소 뜬금없기도 했다.

-이 시점에 왜 다시 전태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죽은 지 50년이 더 지났고 전태일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가 타계한 지 이미 10년이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가 나온 적도 있잖아요.

이은: "이게 정말 오래전, 51년 전에 돌아가신 청년 이야기지만 지금이야 말로 꼭 필요한 이야기가 되고 있는 거 같아요. 여전히 바뀌지 않은 노동 현장의 열악한 환경도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지금 젊은이들이 공정이라는 가치에 너무 사로잡혀서 이웃을 돌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풍토가 너무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말릴 수 없을 정도로 신념화돼 있어요. 저는 전태일이 그런 청년 문화에 강한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자신들이 26년 동안 <명필름>이라는 영화제작사를 하면서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 자기 세대의 고민과 바람을 이 영화에 담았다며 이은은 왠지 잘 될 거 같다고, 자신들의 진심이 통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고 몇 번을 거듭해서 이야기했다. 31억 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돈을 들인 이 영화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지만 잘 될 리 없다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터뷰 중인 영화 제작사 '명필름' 이은(왼쪽)-심재명(오른쪽) 공동대표

이은: 이 정도 예산을 가지고 소위 말하는 노동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저 사람들이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네' 이런 고집일 수도 있는데 저희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거죠"

영화 제작사 <명필름>의 공동대표인 이은-심재명 부부는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하는 소재와 주제를 영화로 만들며 성공의 길을 열어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다시 남들이 안 된다는 길을 가겠다고 나섰다. 그런 점에서 <태일이>는 명필름다운 선택이다.

2. 이은은 자기 삶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말하자고 들면 밤을 새우며 말할 사연이 있을 텐데 그런 사연은 싹둑 잘라내고 '태일이'에 집중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인생은 너무 단조로워서 특별히 할 말이 없다는 것이지만 지금은 '이은'이나 '심재명'이 아니라 '태일이'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이 나이 들면 어딘가 닳고 닳은 구석이 있기 마련인데 이 사람에게 그런 면모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고색창연한 진보의 가치를 이렇게 순수한 표정으로 말하는 남자가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한 시대의 원형질을 머리보다 가슴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다. 말할 때 군더더기가 별로 없는 이 황소 같은 남자가 자주 사용한 단어가 '고집'이었다. 목숨을 건다, 겁나는 게 없다, 흔들림이 없다는 말도 쉽게 했다.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쉽게 하는데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 같은 이미지도 있었다. 집안이 가난했지만 그것은 부모의 가난일 뿐 자신의 가난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 뭘 하면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결혼 안 하고 운전면허 따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할 일이 없으면 택시 운전하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 그전에는 하고 싶은 거 쭉 하면서 살자."

본인 희망대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60년을 살아왔지만 그렇다고 해야 될 일을 외면하지도 않았다. 1981년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을 했고 마치 정해진 길처럼 노동 운동 현장에 들어갔다. 노동 운동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때 눈을 돌린 곳이 영화판이었다. 1980년대 일군의 청년들이 영화판으로 몰려들었다. 연출과 제작, 마케팅과 영화 배급 등으로 영역이 다소 갈리기는 했지만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은은 이런 청년 영화인들과 〈장산곶매〉라는 단체를 조직했고 이 단체가 만든 영화가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오! 꿈의 나라〉 같은 작품이다.

1113 그사람

이은: "'광주'를 다루고 노동 영화를 만들고 그것 때문에 전국적인 싸움이 이뤄졌잖아요. 저희 작품 때문에… 그때 저희들은 겁이 나는 게 없었어요. 그 당시에는 목숨을 걸고 하는 거였죠. 제가 만드는 영화에 대해서는 소위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거죠.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언제나 자신이 있죠. 흔들림이 없는 거죠."

이 사람의 영화 사랑은 누구 못지않다. 결혼 상대자를 구할 때도 영화 제작에 도움이 될 사람을 골랐을 정도다. 임권택 감독을 모델로 살고 싶은 이 사람 눈에 충무로에서 영화 기획과 마케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심재명이 들어왔다. 이은이 보기에 충무로에서 제일 괜찮은 여자가 심재명이었고 자신의 영화 인생에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저 여자를 꼭 잡아야겠다, 저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난 지 네 번 만에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이은이 자신들의 연애사를 길게 늘어놓을 기미가 보일 때마다 제동을 걸고 나서던 심재명이 27년을 함께 살아온 남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심재명: "머리가 단순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못해요. 그걸 에둘러 표현하고 다르게 이야기할 서버가 없어요. 완전히 엉덩이 힘으로 일하는 사람… 의자에 누가 오래 앉아 있나 거기는 1인자죠. 저렇게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있을까 이럴 정도로 오래 앉아 있어요."

'노회찬'을 만들고 태일이를 만들고 김대중 다큐멘터리도 준비 중이다. 이런 소재를 택하는 것만으로 비난과 오해를 사기 십상인데 비판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피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딴 것쯤 두렵지 않다는 말로 들렸다. 영화를 시작할 때처럼 여전히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다.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 휴전선에서 총부리를 마주하고 있던 남북한 병사들이 형제 같은 우정을 나눈다는 내용의 영화를 만들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남북 분단'이라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 2000년 당시 제작비가 29억 원으로 그해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인 영화였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남과 북이 서해에서 포격전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형사 처벌은 물론 영화가 망하면 영화사가 흔들릴 상황이었다. 그때 이은은 남북 분단의 어리석은 비극을 영화로 고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제작을 밀어붙였다. 이은에게 그 영화는 만들고 싶은 영화이기도 했지만 만들어야 할 영화였다. 2000년 6월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그해 가을 개봉된 이 영화는 대박을 쳤지만 돌이켜보면 위험천만한 도전이었다. 이은에게 '태일이'는 또 한 번 만들고 싶은 영화, 만들어야 할 영화인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분단이라는 금기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태일이〉는 요즘 청년들이 중시하는 '공정'이라는 가치에 대한 문제 제기다. 자기도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였지만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몸을 횃불로 삼은 전태일을 통해 배려와 나눔, 희생의 가치를 조명해보려는 것이다.

3. 여자는 영화광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 지갑에서 몰래 돈을 빼내서 극장을 드나들었다. 〈닥터 지바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고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주말의 명화〉를 놓치지 않았다. 대학 때는 프랑스 문화원을 드나들며 영화에 빠져 지냈다. 가난했고 특별하게 잘하는 것도 없는 우울한 소녀에게 영화는 현실을 잊을 수 있는 탈출구였다. 존재감이 없던 학생이었지만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눈이 빛났고 자신의 장래 꿈을 영화감독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나 다니고 싶었던 화실 수강료도 낼 수 없는 가난한 소녀에게 영화감독의 꿈은 사치였다. 영화 보고 일기장에 감상을 쓰는 것으로 그 꿈을 달랬다. 영화평을 담은 일기 쓰기는 마흔 살까지 계속 이어졌다. 카피라이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몇 군데 입사 시험에 응했지만 낙방했다. 그리 크지 않았던 꿈은 더욱 소박해졌다.

"과거는 현재의 모습, 현재의 결과는 미래인데 그렇다면 나는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이다." (1984.2.10일 심재명 일기장 중)

1988년 서울극장 기획실에 합격했을 때 이 사람은 좋아하는 영화일 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어머니 용돈이나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사치라고 여겼다. 합동영화사와 극동스크린에서 4년 반 동안 일한 뒤 1992년 〈명기획〉이라는 영화 홍보 마케팅 회사를 세웠다. 자신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영화와 관련된 '일'을 그렇게 잘할 거라고는 본인도 몰랐을 거다. 영화판에서 심재명은 물 만난 고기처럼 놀았다. 인물 좋고 일 잘하고 촉이 좋은 심재명은 금방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젊은 기획자가 되었다. 이 무렵 '흑심'을 갖고 접근한 남자에게 여자는 '연심'을 느꼈고 두 사람은 1994년 부부로 맺어졌다. 영화 제작 현장을 알고 있는 이은과 기획, 홍보에 밝은 심재명의 결합은 서로에게 날개를 달아 준 일이었다. 한국 영화계에도 축복이었음은 물론이다. 결혼 이듬해 영화 제작사 〈명필름〉을 세웠다. 영화계 입문 7년 만에 영화 제작사 대표가 된 것이다. 이 사람 나이 32살 때였다. 자신을 청개구리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저는 굉장히 고집과 오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엄마가 밥 먹으라 그러면 배 고프다가 갑자기 밥을 안 먹는다거나 여기로 가라 하면 저기로 가는… 굉장히 청개구리 같은 성격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실제 성격하고 다르게 일을 할 때는 겁이 없고요. 영화 제작자로서 자존심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요."

자존심이라니… 무엇에 대한 자존심이란 말인가.

1113 그사람

심재명: "휘둘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외부의 시선이나 목소리, 자본의 간섭이라든가 같이 하는 사람들의 의견 이런 것에 대해서 경청은 하지만 일희일비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려는 것. 결국 영화라는 게 제작자 입장에서 내가 원래 만들려고 했던 그림. 예를 들면 노란 꽃을 그려내려고 한다면 내가 처음에 그렸던 노란 꽃을 끝까지 가져가려는 그 소신. 그것이 자존심인 거죠."

여장부, 최고의 영화 마케터, 미다스의 손, 충무로 재활공장 공장장 등 다양한 수식어가 있지만 '영화계 어른'이라는 한 기자의 표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다. 1963년생,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육십이지만 여전히 눈빛 초롱초롱한 젊은 커리어 우먼 같은 이미지다. 그런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어른이라는 표현을 이 사람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는 못했다. 처음 입사할 때 미스심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이제 영화계 어른이라는 말을 듣는다. 영화제작사 평직원으로 입사해 7년 만에 영화제작사 대표가 되고 내놓은 작품마다 화제가 됐고 사반세기 넘게 한국 영화계의 큰손으로 군림했으니 어른이라는 말이 과한 표현도 아니다. 이 사람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자리가 높아지고 힘이 커져서 만은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과 자신을 보는 눈도 깊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용기를 냈지만 자기는 고작 자기를 위해 사소한 용기를 낸 정도"라고 말했지만 이 사람의 삶이야 말로 변화와 성장의 역사다.

"제가 출신 성분도 그렇고 가진 것이나 아는 것도 별로 없어요. 그나마 시간이 지나니까 좀 나아졌겠죠. 영화 일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거 같아요. 다른 일을 했다면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만나기 힘든 상황을 통해 그릇이 작았던 사람이 영화를 통해 조금 성장하게 된 거 같아요."

인터뷰를 하던 날 심재명은 한겨레 신문에 최근 작고한 태흥영화사 고 이태원 대표 추모사를 기고했다. 한 영화인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 영화사를 정리한 이 추모사는 글을 쓰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은 사람이 쓴 글, 프로의 냄새가 나는 글, 연륜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심재명을 왜 어른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궁금한 사람은 이 글을 봐도 좋을 것이다. 심재명에 대한 이은의 평가는 역시 군더더기가 없다.

"저도 옆에서 지켜볼 때 영화일 하면서 정체되어 있지 않고 새롭게 성장해가는 느낌이 있어 보기 좋습니다.

심재명의 밑바탕에는 도시 주변부 출신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명필름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카트〉 〈마당을 나온 암탉〉 등 차별받고 소외된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녹아 있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 이전부터 그랬다.

심재명: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잠재력이나 능력이 너무 왜곡되고 폄하돼 왔다고 생각하는데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나 (기존 영화에서) 잘 다루지 않던 여성 이야기를 통해서 거꾸로 영화의 경쟁력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 제가 여성 영화인으로 보람을 느끼는 지점입니다. 제가 그런 영화를 안 만들면 누가 만들겠나 하는 생각도 하고요."

노련한 홍보 전문가답게 시종일관 이번 인터뷰의 목적이 새로 나오는 영화 홍보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이 사람이 잠시 그 목적을 잊은 듯 보였던 대목은 젠더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뿐이었다. 이 사람에게 성 평등 문제는 머리로 학습한 것이라기보다 삶을 통해 배우고 느낀 문제처럼 보였다. 젠더 이슈에 대해서는 더 목소리를 내야 하고 영화 분야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집에서는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가정 내 성 평등은 어떤지 궁금했다.

이은: "집안일 잘 안 돕고 이런 것은 제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요. 나머지 서로 존중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없는 거 같아요."

심재명: "성 평등한 가정환경이 전혀 아니죠. 그렇지만 이제 인식의 수준이라든가 의식이나 이런 것은 같이 가죠."

비슷한 말을 하긴 하는데 방점이 찍히는 자리가 달랐다. 이은이 젠더 이슈와 관련해 영화학도인 외동딸에게 면박을 당한 이야기를 했다.

"'페미니즘도 중요하지만 불평등이나 분단 문제가 더 큰 거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딸에게 엄청 혼났어요. '해일이 몰려오고 있는데 조개 줍는 소리 하고 있다'고."

딸을 통해 페미니즘이 더 이상 진보라는 그물에 담기지 않는 가치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지난 10월 말 경기도 파주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인터뷰 중인 당시

4. 경기도 파주에 있는 명필름 본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대지 1천 평에 연건평 500평의 4층 쌍둥이 건물은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다. 건물 안에 약 200석 규모의 극장까지 갖추고 있다. 심재명-이은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다소 거창하지만 26년 전 회사 설립 자본금 5천만 원이 없어 쩔쩔맸던 시절을 생각하면 명필름 사옥은 영화를 통해 이 부부가 거둔 성취의 크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명필름〉 영화는 주제와 소재, 감독, 배우가 다를 때도 화면 어딘가에 명필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듯하다. "저거 명필름이 만든 거야?" "아 어쩐지…" 명필름 제작 영화를 두고 이런 대화가 오가는 것은 충분히 있음 직한 일이다. 1995년 첫 작품인 〈코르셋〉을 시작으로 모두 44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접속〉 〈건축학개론〉 〈공동경비구역JSA〉 〈아이 캔 스피크〉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제목만 들어도 화면이 떠오르는 영화를 만들었다.
 
"명필름에서 나온 영화들은 균일한 밸런스를 맞추거든요. 물량 공세를 펴거나 자극적인 소재로 사람들에게 쉽게 상업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들만의 내적인 완성도를 통해 관객들에게 오락적인 경험을 하게 하는, 그런 시그니처가 있어요. 명필름이란 간판으로 나온 작품들 가운데 흥행이 안된 작품은 있지만 평가가 안 좋은 작품은 없는데 그러기가 되게 힘들죠. 다양한 감독, 스태프들과 일을 하고 제작 관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제작자 본인이 노력을 하고 뚜렷한 영화관, 세계관이 없으면 그런 특징을 유지하기 힘들죠."/라제기 한국일보 영화 전문 기자

명필름의 필모 그래프를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나 좀비들과 싸우거나 공상 과학 영화 같은 작품이 별로 없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고 자신들의 손으로 만져지고 일상에서 대면하는 현실을 영화로 만든다. 과거로 가끔 눈을 돌리지만 자신들의 시야 안에 있는 과거로 한정된다. 조선시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영화가 없다. 없는 세상을 만들거나 모르는 세상에 도전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아는 영역에서 자신들이 가장 잘 싸우는 방법으로 싸운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영역, 새로운 제작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제작자로서 소신이 있는 사람들이죠. 제작자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 중에 하나가 안 해본 거 하는 건데요, 그런 면에서 탁월한 사람들이죠. 소재나 주제만이 아니고 영화를 만드는 방식, 자본을 구하는 것도 새로운 방식을 많이 시도했죠. 여러 가지 면에서 모범 사례를 많이 남긴 사람들입니다."/ 최용배 영화제작사 〈청어람〉 대표

잘 나가는 감독과 작업하기보다 실패를 맛본 사람, 능력은 있지만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을 선호한다. 제작자의 입김이 잘 먹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연출을 맡은 감독에게 충분한 권한을 주지 않는다는 말도 듣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책임진 제작자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한을 강조한다. 제작 자율성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제작비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말도 들렸다. 그럴 만한 스케일의 작품을 구상하지 못했을 뿐이지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심재명: "객관적으로 제가 봐도 흥행과 작품성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영화가 저희 회사의 색깔인 거 같아요. 이건 돈이 될 거야, 스타가 나오고 요즘 트렌드와 맞고 이런 영화를 결코 한 적이 없어요. 결과적으로 흥행이 돼서 의외의 성공을 했다거나 이럴 수는 있지만… 대규모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일부러 안 한 것은 절대 아니에요."

명필름 랩을 운영하고 있다. 해마다 한두 명씩 뽑는데 지금까지 7기가 배출되었다.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후배 영화인들에게 2년 동안 숙식을 제공하고 영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자신들이 영화에서 받은 것을 영화계에 돌려준다는 차원에서 만들었다. 1년 운영비가 5억 원 정도 든다. 공공기관 지원을 포함한 3억에서 5억 원 정도의 제작 비용은 별도다. 제작비용을 명필름이 책임지고 마련해주고 수익이 나오면 제작자와 나누는 구조로 운영하고 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일은 아니다.

이은: "여기 장점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굉장히 좋은 인맥과 스승들한테 배울 수 있다. 여길 통해서 나가면 앞으로 우리가 혹시 영화계를 떠나더라도 자기들을 도와주었던 선배들의 정신을 기억하면서 한국 영화를 지켜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는 거죠."

5. 여자가 영화계 흐름을 이미 놓치고 있다며 조바심을 칠 때 남자는 아직은 놓친 거 같지 않다며 다소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한 사람은 비관적이고 한 사람은 낙관적이다. 남자는 이념적이고 여자는 실용적이라는 말도 나온다. 고마운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이은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산 백기완이 고맙다고 했다. 심재명은 영화사 초기 별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뜻 당시로서는 거금인 5천만 원을 빌려준 배우 강수연을 들었다.

남자는 대책 없이 사고 치고 여자가 뒷수습하기 바쁜 커플이 아닌가 싶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꼭 그런 거 같지도 않았다. 누구의 남편, 누구의 아내가 아닌 자기들만의 이름으로 이미 우뚝한 사람들이다. 고집스러운 남자와 사느라 여자가 힘들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청개구리 같은 여자와 사는 일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을 텐데 두 사람 모두 그런 이야기를 풀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여자보다는 남자가 조금 느슨한 구석이 있긴 했는데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기미가 보이면 여자가 곧바로 방향을 영화로 바로 잡곤 했다.

심재명: "저는 전통 충무로 출신의 영화 마케터이고 이 대표는 독립 영화를 하고 전통 충무로를 전혀 경험하지 않은 분이기 때문에 장점이 많죠. 돌이켜 보면 영화 일을 하려고 결혼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이은: "2006년에 〈안녕, 형아〉가 30% 손해를 보니까 심 대표가 제게 '걱정하지 마. 추석에 〈구미호 가족〉이 있으니까. 근데 구미호 가족은 마이너스 90%로 더 손해봤어요. 그러니까 심 대표가 자신감을 딱 잃는 거예요. 심재명이 있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데 심재명이 감을 잃고 자신감을 잃으면 영화를 그만해야 하거든요. 그때 저는 위기였어요. 그때 담배 끊은 게 지금까지 끊은 거예요. 그래서 그때가 어려웠어요. 언제 심재명이 맛이 갈지 모른다, 나 혼자라도 할 수 있는 훈련을 하자 했는데 지금까지 안돼요."

영화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표현에 대한 자유가 확대되던 시절에 영화를 만들었다. 아이디어만 좋으면 투자금을 받을 수 있었고 좋은 인재들이 영화계로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그렇지만 쉽게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정권과 싸울 때도 있었고 세상의 편견과 싸우기도 했고 법원과 싸우기도 했고 지금은 거대 자본들과 싸우고 있다. 영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영화사에 난입한 적도 있고 법원에서 영화 일부 삭제 결정을 받은 적도 있다. 부부가 모두 지난 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들은 늘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이십 몇 년을 살아왔다.

오늘의 명성과 성공을 얻기 위한 분투와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그런 것을 말하는 것 자체를 촌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성공도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한두 번의 행운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운이 거듭 되는 법은 없다. 그렇다면 운과 운 사이를 이어 붙이려는 남다른 노력, 그게 궁금했는데 그런 것은 말을 하지 않았다.

6. 명필름의 전성기는 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017년 〈아이 캔 스피크〉 이후 주목할 만한 영화가 별로 없다는 말도 있더군요. 두 분의 감도 옛날 같지 않다는 말도 들었습니다만.

이은: 그건 너무 맞는 이야기 같은데요. 저희가 젊은 시절에 하던 영화가 시장에서 주류 영화였는데 지금은 저희들이 만드는 영화는 비주류 영화예요. 〈태일이〉나 〈노회찬6411〉이나 〈아이 캔 스피크〉나. 저희는 변함없이 사회적인 영화를 만들고 있지만 영화 초창기 시절에는 이런 영화들이 주류 영화였는데 지금 한국 영화는 굉장히 미국 영화와 비슷해져서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고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당연히 흥행하고 그걸 주도하는 데가 대기업이에요. 저희는 똑같이 하고 있는데 산업의 흐름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저희는 당연히 밀려 있는 게 맞는 표현이고 더하여서 나이도 당연히 20년이 지났으니까 감각도 떨어지는 것도 맞는 이야기죠.

심재명이 이은의 말을 받아 이어갔다. 한국 영화계의 전설인 '신필름' 존속 기간이 10년, 태흥영화사가 제작한 영화가 36편이라며 한 영화사가 30-40편 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라고 했다. 26년 동안 44편의 영화를 만든 자신들이 성과에 대한 뿌듯한 자부심을 그렇게 표현했다. 자신들이 올드해진 것은 아니라고 말할 때는 도도한 자존심이 느껴졌다.

1113 그사람

심재명: "전성기는 지났지만 버티고는 있죠. 앞으로 50편을 채울 수 있을지 그건 해봐야 될 것이구요. 저희들이 굉장히 뜨겁게 관심받고 거대한 상업적 수익을 내는 영화사나 제작자는 이제 아닐지 모르지만 저희가 올드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정 영화에 대한 평가에 정답은 없는 거 같고요. 시장의 왜곡, 시장의 변화에 의해 복합적으로 평가된다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강조한 것이 영화 다양성에 대한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가능한 것은 다양한 콘텐츠들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측면에서 국제적인 위상, 1등만 중요하다는 태도가 답답하고 아쉽다는 것이다. 올해 코로나 영향으로 한국 영화의 시장 점유율이 20% 이하로 떨어질 것을 우려했고 넷플릭스를 비롯한 거대 외국 자본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지적했다.

심재명: "넷플릭스는 선두주자로서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고 돈을 주지만 그 이면에는 감독이 저작권을 전혀 갖지 못하잖아요. 자본으로부터 전혀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는 있지만 영상 콘텐츠 주인이 누구냐 하는 면에서는 그늘이 있잖아요."

7. 지난 11일 영화 〈태일이〉 시사회장에는 권영길 전 민노총 위원장, 여영국 정의당 대표를 비롯한 진보 진영의 알 만한 얼굴들로 북적였다. 이들을 맞는 심재명의 얼굴은 밝고 여유 있어 보였다. '명필름'이라는 영화제작사가 우리 사회 진보 진영의 중요한 근거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영화 상영에 앞서 마이크를 잡고 배우와 스태프를 소개하는 이은 대표를 보면서 문득 '두목'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따져보니 〈장산곶매〉 시절부터 이 사람이 리더 아닌 적이 없었다.

누가 이 영화를 보면서 전태일을 위해 울어줄까 싶었는데 곳곳에서 콧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고 앞자리에 앉은 초로의 사내는 수시로 눈가를 훔쳤다. 영화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은 대표는 이 영화가 〈마당을 나온 암탉〉을 넘어서는 게 목표라고 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 관객수는 220만 명이다.

1113 그사람

영화를 보고 나니 이은과 심재명의 목표가 관객수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싶다. 진보의 가치가 왜곡되고 폄하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 진보의 원점인 '태일이'를 통해 진보 본래의 순전한 가치를 회복하자는 것, 서로가 서로를 섬겨 아름다운 공동체의 이상을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이 영화를 만드는 의도인 것이다. 이 사람들의 만만찮은 의도가 성공할지 여부는 다음 달 초 관객들의 판단에 달렸다.

*이 인터뷰는 10월 28일 경기도 파주 명필름 아트센터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 2 대담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오늘(13일) 밤 8시 25분 SBS 뉴스 유튜브 채널에 인터뷰 풀영상이 최초 공개됩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