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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메모, 기록하고 정리하고 활용하라

[인-잇] 메모, 기록하고 정리하고 활용하라
헌책방에서 산 책 가운데 예전 주인이 여백에 메모를 해 놓은 책이 가끔 있다. 헌책을 산 것이니 그런 메모가 있다 한들 개의할 일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뭉클해진다. 오래전 이 책을 읽으며 자기 생각을 여백에 메모했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책 주인과 내가 소통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는 항해사 생활 중 독서에 열중하면서, 플로베르 소설 <보바리 부인>의 여백에 메모를 채워 나갔다. 콘래드의 첫 작품 <올메이어의 어리석은 행동>은 그러한 메모의 결실이다. 소설 <롤리타>로 유명한 작가 나보코프는 플로베르, 조이스, 카프카 등의 작품 여백에 메모했다. 그 내용을 문학 강의에 활용하고 책으로도 펴냈다. 그에게 여백은 요즘 말로 '작업 플랫폼'이었다.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입수할 때마다 넓은 여백을 간절히 원했다. 여백은 저자와 다른 견해, 저자에 대한 동의, 비판적 언급, 나만의 생각 등을 적어 넣는 요긴한 시설이다." 그렇게 책의 여백에 적은 메모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마지널리아(marginalia)다. '여백 메모'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작가 찰스 램은 친구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책을 빌려주려면 콜리지 같은 사람에게 빌려줘야 합니다. 그 사람은 엄청난 이자를 붙여서 책을 돌려주니까요. 주석을 달아 책의 가치를 몇 배 더 불려줍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콜리지에게 책 빌려주면, 여백에 메모가 빼곡해진 채로 돌려받기 일쑤라는 말이다. 남의 책에 그렇게 메모하다니 괘씸하게 여길 법도 하지만, 콜리지의 친구들은 그 메모를 귀히 여겼다. 콜리지의 메모는 나중에 단행본 다섯 권으로 출간됐다.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휴대폰을 수첩 대용으로 쓰지만, 펜을 쥐고 손으로 적어 넣는 수첩이 가장 확실하다. 미국의 방송사 ABC 전 부회장 폴 프리드먼은 미국 최고의 앵커였던 피터 제닝스(1938~2005)를 이렇게 회고했다.

'피터는 어딜 가든 취재수첩을 갖고 다녔죠. 몸의 일부였다 할까. 스프링 제본의 작은 수첩을 바지 뒤와 허리띠 사이에 꽂고 다녔어요. 놀랄 만큼 자세히 기록했어요. 세계 어딜 가든 피터는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디보자, 지난 번 여기에서 바로 이 사람을 만나 얘기했었지. 전화번호는 이거야. 이제 연락해볼까." 물론 모든 기자들이 그렇게 하지만, 피터는 정말 무시무시하게 자세했어요.

쿠바에 갔을 때였어요. 쿠바 경제에 관한 리포트 장면에 사탕수수 밭이 필요했죠. 피터는 수첩을 보더니 주변을 살피고 말했어요. "저 길로 1마일 내려가면 왼편에 교회가 있을 거야. 교회를 끼고 좌회전해서 조금만 가면 사탕수수 밭이 있지. 확실해! 예전에 그랬으니까."'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1805~1859)은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할 때, 직접 종이를 접고 바느질해 만든 노트를 갖고 다녔다. 북미 대륙을 여행하며 관찰하고 생각하고 대화한 모든 것을, 그런 노트 15권에 기록했다.

그는 노트를 중요한 주제 항목 알파벳순으로 정리했다. 승합마차나 증기선을 타고 이동할 때면 고도로 집중하여 노트를 검토하고 또 검토했다. 그 노트 기록의 결과가 정치사상사의 고전, <미국의 민주주의>였다.

조선의 선비들 가운데에도 메모의 달인들이 많았다. 책 여백에 메모하거나 별도 공책에 적어도기도 하였다. 이런 메모 행위와 그 결과로 남은 기록을 '질서(疾書)'라 했다. 조선 후기의 이익은 그런 메모들만 모아 책을 여러 권 펴냈다. 연암 박지원도 못 말리는 메모광이었다. 그의 <열하일기>를 보면 중국에 다녀오며 일어난 일들이 빠짐없이 실려 있다. 말 타고 지나가며 본, 건물 기둥에 쓰인 글귀까지 메모한 결과다.

나는 메모하는 습관이 있긴 하지만, 철저하지 못하다. 작은 수첩과 펜을 늘 갖고 다니려 애쓰지만, 뭔가 메모할 게 있을 때면 갖고 있지 않다. '머피의 법칙' 비슷하다. 휴대폰에 메모하는 건 아직도 왠지 어색하다. 메모 방법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읽어보았다. 그런 책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메모의 원칙은 이렇다.

첫째, 언제 어디서든 메모하라. 시간 불문, 장소 불문이다. 둘째, 메모한 것을 다시 점검하고 정리하라. 메모해놓은 것을 나중에 잠깐이라도 다시 살피고, 필요하다면 정리해보라는 것이다. 셋째, 메모한 것을 활용하고 실현하라. 메모해두는 걸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좀 더 확장시켜보거나 더 발전시켜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메모의 원칙은 '기록, 정리, 활용'이라 하겠다.
예전 국어교과서에 실렸던 이하윤의 수필, '메모광'이 있다. 그 첫 부분은 이렇다.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메모에 집착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표정훈 인잇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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