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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멧돼지 막으려다…멸종 위기 '산양'에 불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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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처음 발생한 것은 2019년 9월 17일 경기도 파주의 한 돼지사육농장에서다. 하루 전인 18일 오후 어미돼지 5마리가 폐사하자 방역당국이 시료를 채취해 정밀검사 했고,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확인된 거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바이러스성 1종 가축전염병이다. 돼지흑사병으로 불릴 만큼 치사율은 100%다. 예방 백신도 없어 바이러스의 침투와 확산을 막는 게 유일한 최선의 방역이다. 다행히 사람에게는 전염되지 않는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은 3년째 농민과 방역당국의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최근엔 지난달 6일 강원도 인제군의 한 농장에서 감염이 확인됐다. 도축장에 나가기 전 검사에서 어미돼지 1마리가 확진된 걸로 드러났다. 아프리카 돼지열병 바이러스는 멧돼지를 통해서 확산된다. 멧돼지 이동 저지가 발등에 불이 된 거다. 정부는 멧돼지의 이동을 차단하기 위해 쇠로된 울타리를 치고, 포획 작업을 통해 개체 수를 줄이는 등 멧돼지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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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차단용 광역울타리는 경기 파주에서 강원 고성까지 1천410km에 걸쳐 설치됐다. 발생 지역 차단을 넘어 지역 간 확산 방지를 위해 예방적으로 설치한 거다. 산과 도로, 산과 하천 등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갑자기 분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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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를 막으려는 총력전에 애꿎게도 산양이 생존 위협에 내몰렸다. 물과 먹이를 찾아 산 아래로 내려오거나 숲속으로 이동하는 길이 끊겼다. 서식지가 단절되고 조각조각 파편화됐다. 산양이 위기에 빠진 거다. 울타리 높이는 1.5m가량 된다. 산양이 껑충 뛰어 넘어가기는 사실상 어려운 상태다. 이렇다 보니 산양이 울타리 앞에 다가갔다가 길이 막혀 되돌아 나오는 모습이 무인센서카메라에 잇따라 포착됐다. 산양뿐 아니라 노루도 울타리에 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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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 양구, 화천은 대표적인 산양 서식지다. 산양은 멸종위기종 1급이자 천연기념물 제217호로 지정돼 보호를 받고 있는 귀한 야생동물이다. 개체 수와 서식지를 늘리기 위한 복원 작업도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멧돼지 울타리 영향으로 산양 서식지 일부가 파괴됐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산양증식복원센터에 따르면 양구와 화천에서만 멧돼지 울타리 근처에서 폐사한 산양이 지난해 16마리, 올해 3마리 등 19마리에 이른다. 외상이 없는 걸로 보아 대부분 울타리에 길이 막혀 굶거나 탈진해 죽은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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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12월 3일 화천 모일분교 근처 멧돼지 차단용 울타리 아래에서 산양 1마리가 발견됐다. 구조대원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던 산양은 구조된 뒤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폐사했다. 2주 뒤인 17일 강원도 양구 웅진리에서는 울타리 아래에 몸이 끼었던 산양이 구조됐지만 역시 안타깝게 살아나지 못했다. 울타리 아래는 흙이 파헤쳐져 있었는데, 산양이 빠져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으로 추정된다. 멧돼지 포획용 트랩에 의한 피해도 발생했다.

지난해 5월7일 양구 수이리 숲속에서는 멧돼지 포획용 발목트랩에 걸린 산양이 발견됐다. 이 산양은 다행히 신속히 구조돼 생명을 건졌고 숲으로 돌아갔다. 구조가 늦었으면 폐사할 수 밖에 없었다.

양구 산양증식복원센터 안재용 사무국장은 "명확하게 입증하기는 힘들지만 광역울타리가 산양 폐사에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며 "광역울타리가 산양의 서식지를 단절시킨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환경부와 국립생태원은 지난달 초 인제군의 한 숲속 울타리에 산양 이동을 돕기 위한 사다리를 설치해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울타리 근처에 무인센서카메라도 설치해 산양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 산양이 사다리를 타고 울타리를 넘어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울타리 안팎으로 산양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까지 사다리를 이용해 울타리를 넘어간 사례를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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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지역에서 확산되던 아프리카돼지열병은 지난해 10월 화천의 돼지농장 2곳으로 처음 유입됐다. 그 뒤 올 5월 영월에 이어 8월 고성, 인제, 홍천으로 확산됐고, 지난 달 에는 인제의 한 돼지농장에서 감염이 확인됐다. 강원에서만 7건이 발생했다. 영월은 양구, 화천 지역으로부터 100km 이상 남쪽으로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지난5월 아프리카돼지열병이 확인되면서 강원 북부지역에 있던 멧돼지 방어용 철책이 동해-정선-영월-제천-원주 지역까지 확장됐다. 멧돼지 방어선이 남쪽으로 크게 내려온 거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산양 서식지인 화천, 양구, 인제 지역에 설치한 울타리를 일부 구간에서 열어 산양 이동 길을 터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울타리 200~300m 간격으로 폭 2m가량 문을 열어주면 산양과 노루 등 야생동물의 생태통로가 연결될 걸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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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입동이 지났다. 절기상 겨울이 시작됐고, 설악산에는 눈이 내렸다. 산양에게는 고난의 계절이 다가왔다. 폭설이 덮이면 먹이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게다가 울타리마저 가로막고 있으니 물과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산양은 생존의 위험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머뭇대지 말고 서둘러 산양 이동길을 열어줘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알맞은 때다. 광역울타리 근처에서 산양의 폐사체가 발견되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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