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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내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친절한 이유

[인-잇] 내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친절한 이유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SBS 뉴스

작성 2021.10.24 11:10 수정 2021.11.07 13:2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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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공장에서 불이 났다거나 숙소에서 연기가 난다는 신고로 출동을 한다. 현장에 도착을 하면 제일 먼저 건물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파악한다. 현장지휘 주임님이나 팀장님이 화재가 난 곳 주변 사람들을 붙들고 묻다 보면 가끔 외국인 노동자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일도 생긴다.

영어를 좀 할 줄 아는 나는 옆에 쓱 가서
"제가 영어를 할 줄 압니다. 도움 필요하십까?" 말을 하니
"제가 한국말을 잘합니다"라고 외국인 친구가 응수를 했다.

남원에 이런 훌륭한 인재가 있을까 싶을 만큼 정확한 발음으로 나를 물리치기에 나는 이내 갈 곳을 잃었다. 손전등으로 주변을 이리저리 비추고 한 곳을 응시하곤 자리를 떴다. 자연스러웠다.

까만 연기에 온통 그을린 숙소를 바라보며 외국인 노동자들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한 친구는 손바닥을 하늘로 하고 입으로 뭐라 뭐라 주문을 외우듯 혼잣말을 했다. 아마 자신이 믿는 신한테 기도를 올리는 것 같았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함, 극적인 도움, 여전히 가족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는 상황의 고마움 그런 것들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외국인 노동자 신분이었을 때 처음 하늘을 향해 올렸던 기도는 '원망'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돈을 벌기 위해 호주로 떠났다. 군복을 입고 있을 때는 철창 너머의 세상이 만만해 보였다. 젊은이들이 뭐가 그리도 힘이 들어 엄살인지 다들 '아프니까 청춘이다 앓이' 중이었다. 부모님이 곱게 키워서 팔다리 멀쩡하고 대학까지 다니는데 취업이 힘들고 꿈은 사치라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에겐 쌩쌩한 몸이 있고 꿈도 있었기에 별로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다행 중 불행이라면 그 꿈에 닿을만한 돈이 수중에 없었다는 것. 그러던 중 책에서 읽었던 워킹홀리데이가 생각났다. 외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 돈이 좀 된다는 말에 일단 비행기를 타고 호주 공항에 도착을 하였다. 앞으로 호주에서의 계획을 인천공항 맥도널드에서 세웠으니, 이래서 무지성이 박지성보다 대단하다는 소리가 나오는가 보다.

도착을 하고 보니 어디서 자야 할지 좀 막막했다. 호주 공항 벤치에 앉아 옆을 휙 돌아보니 어떤 사람은 벤치 세 칸을 자신이 독점한 채 옆으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콘센트가 있는 벽에 기대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가 한국도 아니고 객으로 온 나라인데 의자를 독점할 용기는 없고, 그냥 공항 구석진 곳에 요가매트를 깔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그때도 민머리였고 가는 길에 쿠알라룸푸에 들러 산 갈색옷을 입고 있어서 흡사 태국 승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회상해 본다. 외관은 승려였지만 모태신앙인이었던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한 가지 묘수가 생각이 났다. 한국에서야 교회도 많고 서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니 옆 교회 청년부가 미워 보였지만 이곳은 바다 건너 호주가 아닌가. 호주 한인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왔지만 튼튼한 육체가 있으니 어디서든 써먹어달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물론 집도 없어 후불로 결제할 테니 방이 남는 분이 있으면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하루를 공항에서 지내는 동안 호주 한인교회 전도사님이 답글을 달고 연락을 주셨다. 바라는 거 없으니 자신의 집에서 당분간 머물러도 괜찮다고 공항 픽업을 오겠다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그 집에 머물렀고 전도사님을 통해 일도 금방 구할 수 있었다.

노동자
눈을 떠보니 나는 호주 공사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모래를 퍼 나르고 있었다. 타일링을 하는 팀에 작업대기조로 취업이 되었지만 할 줄 아는 게 없었기에 하루 종일 모래를 외발수레로 옮기는 일이 주어졌다. '세상에 천직은 없다 오로지 우직 뿐이다'는 신념을 떠올리며 모래를 열심히 실어 날랐다. 하지만 외발수레를 다루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심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수레가 옆으로 엎어져, 다시 삽질을 해 올려야 했다. 하루 이틀은 그러려니 하며 사람들이 지켜보다가 개미처럼 쓰러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내가 안쓰러워서였는지 노하우를 하나 알려주었다. 수레를 잡을 때 바퀴에서 가깝게 잡으면 힘은 더 들지만 중심을 잡기가 편하다고 말이다. 그 말대로 따라해보니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내가 수레랑 같이 쓰러질 때마다 깔깔거리면서 웃는 호주인들의 엔도르핀이 타격을 입는 순간이었다.

닷새가 되던 날도 나에겐 여전히 모래를 나르는 일이 주어졌다. 다만 기존 아파트 동은 마무리가 되었으니 다음 동으로 모래를 옮겨야했다. 덤프트럭이 모래를 부어주고 떠난 자리에서 나는 삽을 들고 모래를 떠 수레에 실었다. 가는 길이 좀 더 길어졌고 중간에 경사 15도 정도 되는 언덕이 하나 생겼다. 나는 그날도 모래를 잔뜩 실고 길을 떠났다. 실수 없이 수레를 밀고 가다가 오르막 구간에 접어들 때쯤 부스터를 써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오르막 정점을 향해 허벅지와 엉덩이 출력 최대로 높여 수레를 밀고 뛰었지만, 오르막 꼭짓점을 고작 1미터 남겨두고 수레가 엎어졌다. 다시 모래를 수레에 싣고 어찌어찌 목표 지점으로 모래를 옮겼다. 이전에 들었던 노하우를 되새기며 모래를 싣고 도전을 했지만 또 언덕의 꼭짓점을 못 가서 수레와 함께 엎어졌다.

엎어지는 게 마음 아픈 이유가 온 힘을 다할수록 더 처참한 꼴로 나뒹굴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나의 몸개그에 주변은 또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정작 나는 심각한데 호주인들한테는 하루 비타민 같은 장면이었을 것이다. 점심을 빵 한 조각과 오렌지 주스로 때우고 오후에 또다시 몸개그를 시전하였다. 영혼까지 탈탈 털린 채로 퇴근버스에 올라탔다.

전도사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형 마트에 들러 카트를 끌고 선진국 마트 구경에 나섰다. 안쪽을 크게 한 바퀴 돌고 보니 내가 끌던 카트 안에 이미 500g짜리 소시지가 하나 들어있었다. 혼자 '우와~ 우와'하면서 정신이 팔려 돌아다니다 무의식 중에 값싸고 맛있어 보이는 소시지 큰 거 하나를 카트에 넣었던 것이다. 계산을 하고 나오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이걸 어디선가 뜯어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터덜터덜 걷다가 발견한 동네 공원에 앉아 소시지 껍질을 뜯고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절반쯤 먹었을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 정신이 없었다가 당이 차오르니 공원 연못에 청개구리들이 한가득 비를 부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비만 간신히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소시지를 씹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영문도 모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다가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공항에 픽업을 와주신 전도사님 집에서 따뜻한 대접을 받았지만 당장 방값을 낼 돈이 없다 보니 차려주는 밥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집 청소도 설거지도 도맡아서 했지만 마음의 빚이 쌓여가는 기분에 2주급을 받을 날만 기다리며 눈치를 보고 살았다. 점심도 만들어주겠다는 전도사님의 호의를 기어코 거절하고 도망치듯 일터로 가서 모래를 날랐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모이다 보니 영양이 부족하고 몸도 축나서 얕은 언덕조차 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바닥에 뒹굴었던 것이다. 이 소시지 조차도 집에서 조리를 해 먹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생으로 먹고 있었다. 더 슬펐던 건 그 짜디 짠 소시지를 끝내 다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신세는 초라하고 배는 고프고, 위로해주는 사람 없는 나라에서 청개구리의 노래가 나를 무너뜨렸다.

하늘을 향해서 외쳤던 나의 첫 번째 기도는 그래서 '원망'이었다. 왜 이리도 복잡한 상황에 나를 두고 시험을 하냐고 말이다. 호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던 날들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인 워킹홀러들을 향한 인종차별은 기본이었고 임금을 떼이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도 그 공사판에서 일한 임금을 중간 관리자가 들고 잠수를 타는 바람에 1불도 못 받고 몽땅 떼였다. 아주 기가 찼다.

하지만 인생은 여러 빛깔의 무지개와 같아서 곧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날도 맞이했다. 승용차 트렁크에 타고 가다가 경찰한테 걸려 창피를 당했던 날, 동고동락한 동료를 보내며 펑펑 울던 날, 농장에서 첫 월급을 받아 사수에게 선물을 주던 날 등 내 인생 최고의 날들을 맞이 했다. 세상을 만만하게 생각했던 나를 정신 차리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하나님의 시험지 같았던 워킹홀리데이 1년 반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축복이었다.

그래서인지 외국인 노동자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말이 서툴러서 손해 보는 일이 있을까 봐 어디서든 통역을 자처하고, 사고 현장에서 만나면 괜찮냐는 말이라도 한마디 따뜻하게 건넨다.

이 곳 남원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건너와서 일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가족을 이루어 한국에서 생계를 꾸려가고, 누군가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도로 공사 현장에 열심히 보도블록을 끼워 맞추고 있다. 우리 동네엔 저녁만 되면 전화통화를 하며 공원을 뱅글뱅글 도는 서남아시아 청년이 한 명 살고 있다. 주차를 할 때 보면, 어떤 날은 심각하고 또 어떤 날은 생기 가득한 표정으로 신이 나서 전화로 수다를 떤다. 그럴 땐 이 친구도 삶의 여러 과정을 통과하며 축복의 시간으로 다다르겠지란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외국인 노동자로 살 땐 몸에 여유가 없어서 별을 못 봤는데, 한국인 노동자로 사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 별을 못 보고 있다. 날씨 좋은 날 별이나 하루 나가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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