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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극단의 시대에 협치의 힘을 믿는 노정객

[그사람] 극단의 시대에 협치의 힘을 믿는 노정객

윤춘호(논설위원)

작성 2021.10.16 09:04 수정 2021.10.16 16: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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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극단의 시대에 협치의 힘을 믿는 노정객
1. 극적인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이미지를 연출하는 게 정치의 본령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 이 사람은 정치에 최적화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그런 재능도 없는 사람이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현역의원 컷오프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일단은 반발하는 게 수순일 텐데 이 사람은 할 만큼 했다면서 바로 당일 정치적 사형 선고를 수용했다. 절절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든, 비장하게 정치권 퇴장을 눈물로 장식하든, 아니면 누구처럼 물구나무를 서서라도 내 힘으로 다시 국회에 들어오겠다 해야 할 대목이었다. 모든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자리를 포기했다. 이 사람은 발표가 난 당일 짤막한 보도자료를 통해 "평소 삶에서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해왔다. 저의 물러남이 당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을 뿐이다.

2016년 3월 3일 늦은 밤 국회 본회의장 발언대에 섰다. 동료의원들에게 고별인사를 하기 위한 이 사람의 국회 마지막 무대였다. 19대 국회에서 본회의장 발언대에 선 것은 이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치 인생을 매듭짓는 발언을 하는데 채 2분이 걸리지 않았다. 국회를 떠나는 비장한 소회나 목 메인 고별사, 아니면 의정 단상의 최후의 사자후가 있을 법한 자리였지만 이 사람은 테러방지법 통과에 항의해 퇴장한 같은 당 동료 의원들의 빈자리를 향해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 자신이 주도한 사형제 폐지 법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 선거제 개혁을 언급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지막 발언을 마무리했다. 상대방 의원들이 발언을 마친 이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고 다음날 조간 신문들이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평가했지만 솔직히 감동적인 연설은 아니었다. 자신의 국회 마지막 연설을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제 삶의 마지막일 것 같습니다" 라며 본회의장 발언대에 섰다.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까지 대중 앞에서 연설해본 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설마 했다. 민청학련 사건 당시 박정희 유신 정권은 이 사람 목에 현상금 2백만 원을 걸었다. 간첩을 신고하면 백만원, 주택 복권 1등 당첨금이 3백만원이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학생 운동의 거물이었던 사람이었다.

"1988년에 처음 출마했을 때 내가 하도 덜덜 떠니까 누가 소주를 몇 잔 마시고 나가면 안정이 된다 그래서 소주도 먹고 그랬어요. 그리고 선거 나갈 때 선거 포스터 찍는 거 있잖아요. 하도 표정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때도 소주 한 병 마시고…"

중앙정보부가 이 사람을 붙잡아 법정에 세우지 않고 유신 정권이 사형을 선고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이 사람은 영원히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막후 인물로 남았을 수도 있다.

"13대 총선에 나서기 전까지 사람들 앞에 서 본 적이 없어요. 성격이 그렇고 원래 나서기 좋아하지도 않아서 별로 드러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586세대들은 다른 거 같아. 우상호, 이인영, 임종석 그 친구들은 전부 학생회장 출신으로 앞에서 마이크 잡던 사람들이라 무대 체질, 선거 체질이잖아. 우리는 전혀 선거 체질이 아니었기 때문에…"

2. 요즘 방송 시사 프로그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출연자이다. 곳곳에서 이 사람을 모시지 못해 안달이다. 전 국회의장 김원기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현역일 때보다 지금이 더 활동이 많은 거 같네" 2016년 이후 야인으로 지내면서 호구지책 삼아 방송에 출연하면서 현역 의원 시절보다 오히려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그렇다고 부르는 곳이라면 아무 데나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온 시사 프로그램에서 나와 달라고 요청 안 온 곳이 없어요. 근데 나잇살 먹어서 장돌뱅이처럼 여기저기 다니면서 똑같은 소리하는 것도 주책이죠. 다른 메뉴가 있을 게 뭐 있어…맨날 그 메뉴가 그 메뉴지…어제도 같이 밥을 먹긴 했지만 박지원이 국정원장 가기 전에 하루에 열 탕씩 뛴다고 했는데 그게 주책이야…"

맹탕으로 나와 떠드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사람 정보의 질과 양은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어렵다. 여야를 넘나드는 마당발이고 한 번 들은 것은 잊어버리지 않는 비상한 기억력이 있다. 모든 신문을 꼼꼼히 읽고 필요하면 취재도 한다. 누구에게, 언제, 무엇을 물어봐야 할지 잘 안다.

"정보를 습득하려면 검색을 해야 하는데 난 컴맹이고 그런 거 안 보고 나와요. 다만 그날 현안에 대해서는 아는 의원 두세 명에게 어떻게 된 거냐 그 정도 조금 알아보는 정도…아주 맹탕으로 나올 수는 없으니까. 그 정도예요"

유인태 그사람

권력의 심장부에서 일해본 사람이니 권력의 속성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정치 낭인 생활이 길어서 일반 서민들의 정서도 잘 안다. 그런 경험이 이 사람 말에 무게를 더한다. 어떻게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것이 잘 보이느냐고 했더니 그게 경륜이란다. 나이 들면 다 그렇게 된다고 했다. 말하는 것만 보면 청산유수는 아니다. 오히려 살짝 말을 더듬기도 해서 어눌하게 들린다. 그런데 그런 말이 사람들 귀를 사로잡는다.

3. 현직 대통령에게 '벽창호', '타락했다', '까탈스럽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위성 비례정당을 만든다고 할 때는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했고 이번 언론중재법 파동에서는 "강경 세력에게 끌려가는 정당에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여권 출신이지만 여당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사람이죠. 방송에 나오는 패널들이 자기 진영 사람들은 무조건 감싸고도는 게 사실인데 유인태 의원님은 그런 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죠. 그게 인터뷰어로서 유인태의 장점입니다"/ 주영진 <SBS 뉴스 브리핑 앵커>

매주 월요일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 '정치 좌충우돌' 코너 고정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문빠, 태극기 부대 같은 팬덤 정치에 대한 노정객의 걱정이 길게 이어졌다. 극렬 지지층의 폐해는 여, 야 가릴 것 없지만 여권 출신인 만큼 여당에 대한 걱정이 훨씬 큰 것이 사실이다.

"무슨 유튜브 몇 개가 문빠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한 번 보니까 떠드는 소리가 아주 저질이더구만. 무슨 TV 어쩌고 하는 거…노사모는 내 기억에도 사람들이 참 맑았어요. 그때는 문자폭탄 보낸다는 이야기는 없었잖아요? 이 나라 정치가 어쩌다 저렇게 됐는지…"

이쯤 되면 문자폭탄을 받아도 몇 번을 받았겠다 싶었는데 험악한 댓글 달린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문자 폭탄을 받은 적은 없단다. 문자폭탄이 온다 한들 거기에 기죽을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이 사람이 척척박사도 아니고 정국 전망이 늘 맞았던 것은 아니다. 드루킹 사건이 터졌을 때 김경수 당시 경남지사와 연관성을 주장하는 야당의 공세를 떼쓰는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 정치권에서 이 사람만큼 세상 돌아가는 것을 열린 마음으로 보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몇 가지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봤다. 이 사람 대답을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내년 3월 대선은 결국 1:1 구도 속에서 여야가 박빙의 승부를 벌일 것이라는 것, 현재 정권 교체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대통령 임기 말에는 늘 그랬기 때문에 큰 변수가 아니라는 것, 이재명 후보가 문재인 정부와의 차별화 정책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대장동 스캔들 관련해서 이재명 지사가 돈 문제에서는 깨끗한 거 같기 때문에 도의적, 정치적 책임 이상을 질 일은 없을 거라고 전망했다. 특검 도입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자세를 보였다.

"수사 결과를 야당과 국민들이 신뢰를 못 한다고 하는데 끝까지 거부할 명분이 있겠냐 이거죠. 근데 지금부터 특검으로 가자고 하는 것은 너무 정략적이다, 시간 끌기로 이걸 3월까지 끌고 가겠다는 정략으로 보인다 이거죠. 우선 이 수사를 검찰 경찰이 신속하게 마무리하고 나서 특검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봐요"

4. 해마다 4월이 되면 심하게 앓는다. 4월은 동지들이 붙잡혀 고문당하고 자신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체포된 달이다. 선배이자 동지였던 여정남을 비롯한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형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에 처형된 것도 4월이다.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몸은 그 악몽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인혁당 그분들 사형집행도 4월이고 정보부에 끌려가 두드려 맞고 한 게 4월이었어요. 이상하게 4월에 몸살을 앓아. 물론 계절적으로 환절기에 감기 몸살이 많이 오죠. 그런데 살아오면서 4월에 그렇게 몸살을 많이 앓았어요. 며칠 열도 나고 드러누울 정도로…"

충북 제천에서 목재업을 크게 하던 아버지 덕분에 1960년대 2층 양옥집에서 살았고 경기고와 서울대를 졸업했다. 집안도 부유하고 학벌도 이른바 KS마크를 단 사람이었으니 순탄하게 살자면 얼마든지 순탄하게 살 수 있었을 사람이었다. 그랬던 사람이 학생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고 두 차례나 제적이 되어 서울대를 6년 만에 졸업했다. 무엇이 이 사람을 그런 삶으로 이끌었는지 궁금했다. 강철 같은 투지, 정의에 대한 열렬한 옹호 그런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 사람의 이야기는 밍숭밍숭 하다. 자신과 자신의 삶을 극화하는 재주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박정희 유신 체제는 국민들의 자유를 다 박탈해간 시대였잖아요. 머리 길다고 자르고 스커트 길이 재고 노래도 못 부르게 하고…그때는 아무 말도 못 하던 사람들이 요새 자유민주주의 주장하면서 자유 자유 하는데…하여튼 그런 시대에 저항을 한 거죠"

운동권 학생이 된 아들에게 아버지는 뭐라고 했을지 궁금했다.

-아버님은 뭐라고 안 하셨습니까
"어차피 배린 놈…어쩔 거야"

학생 운동에 나선 개인적인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자기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때 재야 어른이라고 하는 분이 몇 분 안됐어요. 그분들이 전부 쳐다보는 게 학원이었어요. 젊은 학생들이 이런 불의에 들고 일어나야지 하는 시선이었어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에 노조가 있습니까 뭐가 있었습니까. 아무 세력이 없었어. 맨날 귀싸대기 맞고 누구는 두드려 맞고 감시받고 그러고 싶었겠냐 이거야. 그러니 하기 싫죠. 그런데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하지? 이런 거였어요"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기 이전부터 이미 서울대 학생운동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서 걸핏하면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매를 맞았다.

"중정에 끌려간 건 헤아릴 수 없어요. 항상 말은 "우리 국장님이 조금 보잡니다"하고 가면 들어가면서부터 귀싸대기, 들어가서 첫인사가 "이 새끼 또 왔어"하면서 귀싸대기…누가 그렇게 살고 싶었겠냐 이거야"

민청학련 사건 주동자로 체포돼 군사 재판에 넘겨졌다. 1974년 7월 9일 사형이 구형됐고 1974년 7월 13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국방부 장관이 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이 날이 7월 20일이었으니 일주일 동안 죽음의 그림자를 밟고 살았다. 사형 구형과 선고 순간의 심정을 듣고 싶었다. 역시 그런 것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사형 선고 이후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기까지 일주일이 이 사람 인생에서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텐데 그 기간에 대한 묘사도 소략하기 그지없다.

-사형을 선고받고 1주일을 사형수로 지내셨는데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저는 '이놈들 웃기고 자빠졌네' 그랬어요. 데모 한 번 하려는 걸 가지고 무슨 사형이냐 그랬던 거지요. 각 대학에는 경찰들이 들어와 옴짝달싹 못하니까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유신에 대해 젊은 함성이라도 한 번 질러보자는 게 민청학련 사건이었어요. 연합 시위 한 번 하려던 거 가지고 사형이라니 웃기고 자빠졌네 이런 느낌이었어요"

-무섭지는 않았습니까.
"그때는 무섭고 말고가 아니라 이게 무슨 사형이냐 이런 생각에…그러면서 한편으로 설마 이거 가지고 죽이기야 하겠는가 싶었는데…인혁당 피해자 분들은 이 미친 정권이 진짜 죽일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그 미친놈이 어쩌면 죽일지도 몰라 그런 우려를 하시더라고요"

17대 국회와 19대 국회에서 두 번이나 사형제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 국회 고별 연설에서도 사형제 법안의 처리를 당부했을 만큼 사형제 폐지에 대한 의지는 집요했다. 12년의 국회 의정 활동 기간 중 이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추진한 법안은 이것이 거의 유일하다. 사형수로 지낸 일주일의 경험과,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동지들의 비극이 이 사람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다.

학생 운동 시절 이야기만 가지고도 4막 5장의 연극을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럴 재주가 없다. 아니, 그럴 의지가 없다. 지금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있는 동생 유인택이 연극 연출가 출신으로 끼가 넘치는 사람인데 동생의 그런 재주는 이 사람에게는 없는 모양이다. 13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정치사형수'라는 표현을 쓴 것이 학생 운동 이력을 정치에 이용한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3대 총선 당시 유인태 후보의 선거 포스터

2012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4년 5개월의 억울한 옥살이를 시킨 국가를 상대로 12억 3천만 원의 손해배상을 신청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재심 확정 후 6개월 안에 손해배상을 신청해야 되는데 그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모든 민사 사건 시효가 3년이에요. 그런데 양승태 대법원이 민청학련 사건만 재심 확정 이후 6개월로 갑자기 바꿔버린 거야. 안대희 대법관이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는데 '선배님. 그거 제가 맡을까요' 이런 소리까지 했어요. 그때 막 대법관 그만두고 나서야. 3년이던 것을 6개월로 해서 신청할 수 있는 기간 지났다고 패소 판결을 한 거예요"

자신의 전 재산에 맞먹는 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날렸으니 열을 올리며 말할 법도 하건만 이 대목도 반쯤은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5. 이 사람 인생에 세 명의 대통령이 있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을 빼놓고는 정치인 유인태의 삶을 말하기 어렵다. 김대중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한 시간보다 달리 한 시간이 더 길었고 같은 당에 있을 때도 김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부터 김대중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사형수 출신이라는 동병상련의 경험 때문인지 초선인 이 사람을 당5역 중 하나인 정치연수원장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사람의 한량 같은 자유인 기질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별로 이쁨 받지 않았던 사람인데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선생님(DJ)에게 이쁨 받지 못했다며 특유의 자학 개그를 던졌다.

"원래 DJ가 바둑 두고 잡기하는 거 아주 싫어한대. 내가 그때 허경만 국회부의장과 바둑 맞수여서 자주 두긴 했는데 유인태는 국회 부의장 방에서 산다고 소문이 났어…이해찬, 설훈 임채정도 바둑을 두었는데 그 사람들은 몰래 두고 난 당당하게 둔 거지…박지원은 아무리 새벽까지 술 먹어도 새벽 5시에 문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해…술 먹으면 점심까지 자빠져 자야 되고. 시간 나면 바둑 하고 잡기 좋아하고 게으르고 그러니까 선생님한테…"

정치적 노선 차이도 작지 않았다.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지지하지 않았고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만들 때 김원기, 노무현, 원혜영과 함께 김대중을 따라가지 않았다.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김대중과 맞서거나 김대중을 따르지 않았다.

"그분이 민주화 과정에서 혁혁한 공이 있죠. 다만 1987년 4자 필승론을 내세워서 YS와 단일화를 하지 않고 독자 출마한 것은 지금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1995년에 DJ가 국민회의 만들어 분당한 것은 사소한 문제라고 했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DJ의 결정에 반발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한 6명의 통추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DJ 덕을 보지 못했다. 냉대를 받았고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2000년 총선 무렵 한나라당 영입인사로 발표되고 공천 이야기가 나왔던 것은 김대중과의 이런 사연도 한몫했을 것이다.

"DJ정부에서 미관말직도 못했어…정권 말기에 정무수석실 비서관으로 오라는 거야. 이강래 같은 후배들이 수석하는데… 그거 전달한 사람과는 지금도 얼굴 안 봐…사람을 뭘로 보고"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처리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대북 송금 특검 문제였다. 당시 동교동에서는 대통령의 통치 행위로 인정하고 문제 삼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노무현 정부는 임기 초 대북송금 특검을 실시했다. 검찰보다는 특검에 맡기는 게 신속하게 처리 가능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DJ가 대북 송금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통치 행위론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이 사람의 설명인데 DJ와 동교동에서는 대단히 서운하게 생각했다.

6. 노무현은 오랜 동지였고 정치 낭인이었던 자신을 청와대 정무수석이라는 요직에 기용한 정치적 은인이기도 했다. DJ가 국민회의를 만들어 분당할 때 노무현은 이 사람에게 같이 민주당에 남자고 권유했다. 그 권유를 받아들였고 다음 총선에서 시원하게 떨어졌다. 노무현은 그 때 진 정치적 빚을 정무수석 기용으로 갚은 것이다. 정치적 행보를 같이 했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결이 달랐다. 대통령 앞에서 졸고 맞담배를 피우는 이 사람 모습이 권위주의 해체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통령에 대한 불경으로도 비쳤다.

"목사님이 설교할 때 장로는 졸아도 돼…다 아는 이야기 아냐. 난 장로였다고. 술이 떡이 돼서 졸지. 문재인도 자기 책에 썼잖아요. 신통하게 졸면서도 다 듣는다 이거야. 난 다 아는 거지. 노통이 뭔 얘기 했을지...다 뻔한 소리 아니에요"

유인태 그사람

노무현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편치만은 않은 참모였다. 그렇다고 부하 다루듯 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다는 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문희상의 기억이다.

"나나 유인태는 대통령한테 할 말 있으면 다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특히 유인태는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막 들이댔거든"

-대통령이 좀 불편해하지 않으셨습니까.
"대통령이 불편해 할 정도로 그랬지요. 그런데 대통령도 그 사람에게 큰 소리를 못 쳐요. 그리고 나한테만 하소연 하는 거야. '유인태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체면이 있는데 말야' 그럴 정도로 유인태는 바른 소리를 바로 해버려요. 그렇지만 경우에 맞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그럴 수가 없는 거예요"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 대한 정권 차원의 견제가 한창 일 때도 이 사람은 언론과 야당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 사람들과 매일처럼 술을 마셨고 그러다 보니 회의석상에서 졸기도 했다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노무현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이 사람 역시 그 자리를 제대로 즐긴 거 같지는 않다.

"그전에는 정무수석이 돈이 있었어요. 대통령이 쓸 수 있는 특활비가 청와대에 한 8백억 원 정도 있었는데 그 돈을 정무수석도 어느 정도 썼어요. 그런데 노 대통령이 그 돈을 재해 지원에 다 썼어요. 국정원에 사찰 금지 지시를 내렸으니 국정원을 통한 정보도 없어. 돈도 없고 정보도 없으니 뭘 무기로 야당을 상대하냐고…"

참여정부 초대 정무수석이자 최후 정무수석이었고 1년 정도였으니 단명 수석이기도 했다. 후임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탄핵 소추 결정으로 관저에 있을 때 독대를 한 적이 있다. 2004년 5월 5일이라고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정무수석 부활을 건의했고 노무현은 후임이 누가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 이 사람은 후임으로 이강철을 추천했지만 청와대는 이강철을 기용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정무수석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7. 문재인이 대선 출마를 망설일 때 부산까지 내려가 설득했고 문재인 펀드에 5천만 원을 내놓으며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렇지만 현 정부의 인사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문재인 민정수석 기준이라면 현 정부 인사 가운데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같이 일할 때 있었던 일화를 들려주며 문재인을 벽창호라고 표현했다.

"문재인이 여의도 쪽 사람들을 모르니까 정치권 민원이 이강철 아니면 나한테 올 거 아닌가. 그러면 그런 이야기를 민정한테 말해야 되는데 내가 보기에 이건 상당히 타당하다 싶은 것만 몇 건 얘기를 했어. 문재인 민정수석이 아주 공손하게 '알겠습니다. 선배님' 말은 그렇게 하는데 전부 거기에서 기각이야. 그런데 사실 그 중에는 나중에 무죄 난 것도 있어…내가 그때 '이 사람은 벽창호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취임 첫날 야당을 찾아가는 문재인 대통령을 보면서 통합과 타협의 정치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졌다. 그것은 자신과 고 노무현 대통령이 그토록 원하던 정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다.

"집권하자마자 적어도 탄핵에 찬성했던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같은 사람들…대선 후보 중에 홍준표를 제외한 그런 사람들과 연대를 했어야 됐어요. 저도 그쪽에 그런 이야기를 했고…그런데 그쪽에서 말이 지방선거 이후에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협치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안 돼있다는 느낌을 받았죠"

유인태 그사람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계승자이면서도 노무현의 철학을 그렇게 이해를 못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는 말도 했다. 이 사람 입장에서 보면 여의도 정치를 멀리 하는 문재인의 태도가 반정치주의로 보이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자세가 여전히 반정치주의적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나는 여전하다고 봅니다. 자신들은 학처럼 고고한 존재로 보면서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을 권력욕의 화신으로 치부하는 그러니까 까마귀 노는 곳에 가지 않겠다, 정치라고 하는 뻘밭에 가지 않겠다는 태도죠"

정치의 가능성과 정치의 힘을 믿는다는 면에서 이 사람은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다. 문재인과는 정치 철학을 포함해 공통점이 많아 보이지 않았다.

8. 비속어와 욕설이 넘치는 이 사람 특유의 어투와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유인태라는 정치인은 엽기수석이라는 별명처럼 다소 기이한 언행이 주로 회자되고 이 사람이 살아온 삶과 이 사람이 추구하고자 했던 철학과 정치적 행보에 대한 분석은 극히 인색하다. 정치의 힘을 믿고 정치에서 답을 찾으려 애쓴 이 사람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거기에는 기록을 남기는데 인색한 본인의 탓도 적지 않다. 책을 쓴 적도 없고 하다못해 언론 기고도 거의 없다.

"내가 몇 번이나 그랬어. '책 씁시다. 책 쓰면 재미있는 내용도 많이 나올 거니까 책 씁시다. 용돈도 없어서 헤매고 있는데 우리 책이라도 팔아먹고 삽시다' 그래도 안 써…'구술만 하시죠. 그러면 내용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말만 그러자고 그러고 안 해…" /최광웅 전 청와대 인사비서관

기록에는 게으르고 기억력은 비상한 사람이다. 1988년 정치에 입문할 무렵 민청학련 사건 관련 글을 월간중앙에 기고했다. 이 사람이 언론에 기고한 거의 유일한 글이다. 민청학련 관련한 글은 마치 어제 일을 기록한 것인 양 꼼꼼하고 촘촘하다. 인물과 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날짜는 물론 시간이 거의 분 단위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감시 때문에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누가 비밀리에 기록을 남겨 보관하고 있었나 싶었다. 그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사람 머릿속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글의 상당 부분은 민청학련 사건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서중석이 쓴 거라고 했지만 본인의 기억이 아니면 그렇게 상세하게 쓸 수 없다.

원혜영은 이 사람을 '특이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몇 년 전에 함께 골프를 친 사람들의 타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20-3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한다. 인터뷰 과정에서 이 사람이 언급한 날짜들, 예를 들면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첫 국회 연설 날짜, 국민회의 창당 관련 보도 일자 같은 것을 사후에 확인해봤다. 틀린 것이 없었다.

10개의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두세 개의 재능만 발휘하면서 살아온 사람, 어떤 면에서는 재능을 허비한 사람처럼 보인다. 인생에서 후회되는 것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런 질문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자못 진지하게 답변했다.

"왜 후회되는 일이 없겠어…공직에 있을 때 좀 더 열정적으로 사명감에 불타서 일하지 못하고 그냥 게으름 피우고 노는 것 좋아하고 그랬던 것들이 좀 후회스럽고…좀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후회가 있죠"

1980년대 초반 친구와 목재 사업을 제법 크게 했다. 사업은 이 사람에게 맞는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아버지는 전통적인 목재업을 꽤 크게 하셨는데 저는 친구랑 했다가 후배들 보증 섰다가 사고도 나고 등등으로 해서 아주 크게 실패를 했죠"

부친이 물려준 부동산이 김포공항 부근에 꽤 있었는데 모두 날려 먹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산 공개를 했을 때는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지금도 30평대 아파트 한 채가 이 사람 가진 것의 전부다. 1992년 첫 등원했을 때부터 자신의 정치자금을 모두 공개했다.

"1995년도 지구당 위원장으로 지방의원 공천권을 행사하는데 구의원 후보자들에게 공천 대가로 돈을 받자는 말이 나왔어요. 당시 사무국장이 그 돈 받아 선거자금으로도 쓰고 지구당 운영하는데도 쓰자고 그랬다가 이 양반한테 아주 박살이 났어요. 정계 은퇴할 때까지 공천 헌금으로 1원 한 장 받지 않았어요. 그런 것은 내가 잘 알지…이런 사람 정말 드물어요"/ 최광웅 전 청와대 인사비서관

국회의원 선거에서 4번 떨어지고 3번 당선되었다. 정치 낭인과 국회의원을 반복했고 백수로 보낸 시간이 국회의원으로 보낸 시간보다 더 길었다. 편한 길, 쉬운 길로만 가자고 했다면 7선, 8선도 했을 사람이다. 징검다리 국회의원 3선 (14,17,19대)은 이 사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권력 안에서 정치를 보는 시각과 함께 권력의 밖에서 정치를 보는 시각을 겸비하고 있는 것도 그 덕일 것이다. 정치 낭인의 시간이 길었으니 유혹도 많았을 텐데 부정, 비리, 추문에 연루된 적이 없다.

유인태, 국회 투명성 강화 및 제도 혁신 방안 발표 (사진=연합뉴스)

비교적 흔들림 없이 자신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뜻을 같이 하는 친구와 동지,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의 궂은일에는 조문을 빠트리는 법이 없는 정치권의 유명한 마당발이지만 은근 사람을 가린다.

"이 분이 중시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세평, 사람들의 품성이지. 기자도 세평이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더라고요. 누구를 만날 때 반드시 '이 사람 어때?"라고 물어본다는 거야. 세평이 좋으면 만나고 안 좋으면 잘 안 만나요" <신정록 전 조선일보 기자>

선후배와 친구를 보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보인다. 서울대 3년 후배인 원혜영은 나이로도 세 살 차이지만 이제는 같이 나이 들어가니 너나들이하며 지내는 사이다. 한겨레민주당부터 시작해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한 동지이자 친구다. 원혜영에게 이 사람의 장점을 물어봤다.

"아주 담백하고 솔직하고 형식에 구애받는 분이 아니지요. 일을 하면서 사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분이 아니고 워낙 통찰력이 있고 기억력이 좋아서 다른 사람보다 앞서 보고 다른 방향으로 판단하는 거는 선후배들이 다 인정하는 거죠. 우리 정치에 아주 큰 자산인데 정치를 좀 일찍 그만둔 것이 제 입장에서는 안타깝죠"

김부겸은 1988년 한겨레민주당 시절부터 함께해온 정치적 동지이자 기대를 가지고 응원하던 후배 정치인이다. 김부겸이라면 자신이 꿈꿔온 대화와 타협의 큰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가장 좋아하는 후배 정치인이 김부겸 국무총리 아닌가요?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젊었을 때부터 운명을 같이 해왔는데…그러니까 1988년부터 삼십 몇 년을 같이 했죠. 정치 철학도 같고…김부겸도 발버둥을 쳤는데 이번에 총리를 끝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대요. 부인이 그걸 원한다나 봐. 더 이상 국회의원을 하고 이럴 생각은 없나 봐. 다시 대구에서 출마를 하기도 그럴 테고…"

김부겸 국무총리

후배가 보는 선배 유인태의 모습이 궁금해서 김부겸 총리에게 문자를 보냈는데 국사가 바쁜가, 답이 없었다.

9. 이 사람 표현을 빌리자면 뻘밭이자 양아치판인 정치권에서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보냈으니 이 사람에게도 흙탕물이 튀었을 테고 정치권의 고약한 냄새가 몸에 배었을 것이다. 3시간 남짓한 대화,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한 차례의 보충 취재만으로 그런 것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문희상은 이 사람이 단점이 없지 않지만 그 단점을 수많은 장점이 가린다고 했다.

누구를 만나도 자유로운 사람이다. 말에서도 행동에서도 맺힌 구석이 없다. 맹렬한 투지나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뭔가를 꾸며서 말하는 것에 대한 생래적인 거부감이 있고 권위 의식 같은 것은 개나 주라고 하는 사람이고 가슴을 열어놓고 말하는 스타일이다. 쉬쉬 하는 게 없다. 그래서 기자들에게는 좋은 취재원이고 지금도 그렇다.

이날 복장이 깔끔했다. 콤비 상의와 바지는 물론이고 신발까지도 색을 맞춰 나왔다. 당초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었지만 분장실에 들러 분장을 하고 오겠다고 했다. 자신의 삶은 물론이고 얼굴에 분칠 하는 것을 질색하던 사람이었다. 이화여대 운동권 출신인 부인 이혜경의 손길과 조언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는 상황을 일흔이 훌쩍 넘고 나서야 즐기게 된 모양이다.

유인태 그사람

<이 인터뷰는 지난 10월 7일 목동 SBS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유인태 전 의원과의 인터뷰 풀영상은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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