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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글쓰기와 몸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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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 뭐라도 써야지. 방송사 짬밥 좀 먹은 저널리스트, 프로듀서.

SBS 뉴스

작성 2021.10.10 11:00 수정 2021.10.12 16:59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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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와 PT에 대한 단상


제목의 '글쓰기'는 작문(writing)이 아니라, 서예(calligraphy)를 가리킨다. 한자문화권에서 서예의 역사는 길고도 길지만, 우리가 서예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광복 이후 고작 70년 남짓한 세월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가져온 일로도 유명한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이 말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쓰는 대로 '서도'(書道)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 한다. 예(藝)든, 도(道)든, 법(法)이든 뜻의 무게가 만만찮다. 그래서일까. 뭐든 가볍고 기동성 있어야 하는 요즘, 서예는 학교 교육에서 거의 사라졌다.

육체미(肉體美). 듣는 것만으로도 테스토스테론이 번질거리는 이 단어도 한물갔다. 한물간 정도가 아니라 사어(死語)가 됐다. 요즘 각광받는 말은 PT이다. 그저 근육을 불리는데(소위 벌크업) 주목적이 있는 육체미와 달리, PT-도 PT 나름이겠지만-로 불리는 운동 프로그램은 다이어트를 하거나, 힘을 효과적이고 폭발적으로 쓰는 능력을 기르는데 초점을 두는 것 같다.

책과 유튜브, 그리고 헬스장 어깨너머로 요령을 익히다 난생처음 꽤 비싼 돈을 내고 PT란 걸 받아봤다. 체중을 늘려서 힘을 키우고, 오랜 취미인 야구(배팅)를 잘하고 싶다고 트레이너에게 밝혔다. 그렇게 만들어진 속성 프로그램은 역시 코어, 코어, 코어였다. 스쿼트와 불가리안 스윙, 역도 등 프로그램 대부분이 하체에서 만들어진 힘을 코어(core) 근육을 통해 최대한 손실 없이 팔과 다리로 전달해 운동에너지로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스윙은 하체로 만든 수직 운동에너지를 코어의 회전을 통해 수평 운동에너지로 방향을 바꾸어 놓는 거였다. 코어가 그만큼 단단해야 하지만 온몸이 뻣뻣할 정도로 힘을 넣은 채로는 제대로 스윙할 수 없으므로, 힘을 쓸 때와 뺄 때를 머리와 몸으로 기억하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했다.

평소에는 부드럽다가 힘을 써야 할 때는 뾰족하게. 서예에서 붓이 움직이는 법과 닮았다. 이사 온 집 근처에 요즘 구경하기 어려운 서예원이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PT와 달리 뚜렷한 목표가 있다기보다는 어려서부터 글씨에 관심이 많았고(지금은 폰트에 대해 그렇다), 궁극적으로는 나만의 글씨체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해두자.

서예
야무진 꿈이었다. 내가 한 달 내내 한 것이라고는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선 긋기와 원 그리기가 사실상 전부였다. 학창 시절에는 글씨 좀 쓴다는 얘기도 들었었는데, 막상 해보니 선 긋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손목과 어깨에 힘을 빼고 낭창낭창하게 붓을 나아가다가 획의 마디마디에서 "붓모가 휘청하도록" 붓끝으로 종이를 "찌르라"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말뜻조차 이해가 잘 안 됐다. 그런데 하다 보니 붓끝으로 종이를 "찌르는" 순간이 바로 하체에서 만들어진 힘이 코어를 거쳐 공을 던지고, 스윙으로 공을 타격하는 순간이었다. 또 큰 종이에 붓글씨를 쓸 때는 팔도 크게 휘둘러야 했는데, 그때도 몸의 중심-코어-은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극과 극에 있다고 여겼던 정적인 서예와 동적인 PT가 같은 원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뭔가 새로웠다.

뿐만 아니었다. 내가 선 긋는데 몰두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선생님은 그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한 번에 몰아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험 많아 보이는 PT 트레이너도 내가 반복해도 잘 안 되는 동작이 있으면, 일단 멈추고 다른 동작을 연습시켰다. 안 되는 걸 무리하게 붙들고 있지 말고 다음에 다시 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안되던 동작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경험을 했다.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나이에 따라 다르고, 배움의 수준에 따라 대처법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스승은 중용의 가치를 안다. 전에는 왠지 뜨뜻미지근한 '중용'이라는 말에 호감이 안 갔다. 이도 저도 아니고 적당한 타협에 그치는 가치관으로만 여겼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야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서 나아가고 어디서 그칠지 아는 중용이야말로 대단한 경지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눈 감고 코끼리 만진 격인지 모르겠지만, 서예와 PT를 배우며 든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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