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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책 안 읽는데, 기념일이 무슨 소용?

표정훈 | 비문학 작가, 책 칼럼니스트

[인-잇] 책 안 읽는데, 기념일이 무슨 소용?
1995년 제28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4월 23일이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로 제정됐다.

4월 23일은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책 사는 이에게 꽃을 선물했던 '산 조르디 축일'이다. 이 날은 세계 문학사의 거장,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1616년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도 1850년 4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그레고리력 1616년 4월 23일 토요일에 사망했다. 셰익스피어는 영국 워릭셔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서, 옛 율리우스력 1616년 4월 23일 화요일에 사망했다.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3일에 사망한 것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사망일은 실제로는 열흘 정도 차이가 난다. 그러니 '같은 날'은 아니고 '같은 날짜'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유네스코는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제정 결의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책은 인류의 지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보존해 왔다. 책 보급은 문화 전통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고 이해, 관용, 대화에 바탕을 둔 행동을 진작시킨다."

'세계 번역의 날'도 있다. 4세기 후반과 5세기 초 성서 번역과 연구에 일생을 바친 성 히에로니무스의 축일인 9월 30일을 택하여, 1991년 세계번역가연맹이 제정한 날이다. 이후 2017년 5월 24일 유엔 총회에서 9월 30일을 '세계 번역의 날'로 정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번역가·서적상·사서 등의 수호성인으로 일컬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책, 그러니까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은 기독교 성서다. 성서는 선교 목적으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책 가운데는 카롤로 콜로디의 <피노키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안데르센의 <동화집> 등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폭넓은 독자층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미국의 '독서의 날(Read Across America Day)'은 3월 2일이다. 이날은 미국 초등학생들이 가장 즐겨 읽는다는 <초록 달걀과 햄>(1960) 의 작가, '닥터 수스'(본명은 시어도어 수스 가이젤)가 태어난 날 이기도 하다. 교사 노조단체인 미국교육협회가 주관하여 1997년부터 시작되었다. '독서의 날'에는 미국 전역 학교에서 독서 관련 행사가 자율적으로 열린다.

지난 3월 1일 조지프 바이든 대통령은 다음날 2일을 '2021년 전미(全美) 독서의 날'로 선포하고 공식 서명했다. 다음은 백악관 홈페이지에 게시된 선포문의 일부다. 독서의 가치와 효용을 잘 말해준다.
 
"한 어린이, 한 젊은이가 읽으려는 의욕을 품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그 효용은 교실 바깥으로 멀리 확장됩니다. 독서는 시야를 넓혀줍니다. 독서는 우리를 새로운 세계, 문화, 언어로 이끕니다. 독서는 공감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시각을 이해할 수 있게 돕습니다. 독서는 우리를 일깨우고 능력을 함양시키며 역사의 교훈을 가르쳐줍니다. 독서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시켜주면서,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꿈꾸게 해줍니다."

우리나라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가 팔만대장경 완간일을 택해 제정한 10월 11일 '책의 날'이 있다. 1251년 음력 9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다. 1987년에 제정됐다. 대한인쇄문화협회 가 제정한 '인쇄문화의 날'은 9월 14일이다. 세종대왕 때 한글 금속활자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인쇄한, 1447년 음력 7월 25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다.

'서점의 날'도 있을까? 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2016년에 제정한 날로 매년 11월 11일이다. 11월 11일을 택한 이유는 서가에 나란히 진열된 책 모양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자 책 책(冊)자 모양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 날은 비공식적으로 '빼빼0 데이'라 불리기도 한다. 숫자 1과 비슷한 모양의 막대초코과자가 많이 팔리는 날이다. 11월 11일은 법정기념일인 '농업인의 날'이기도 하다.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바로 '종이의 날'도 있다. 2017년에 제지업계가 정한 날로, 매년 6월 16일이다. 현대식 기계 설비로 국내에서 처음 종이가 생산된 날인, 1902년 6월 16일을 기념한 것이다. 한편 '도서관의 날'은 없지만, 한국도서관협회가 1964년부터 시행해온 '도서관 주간'은 있다. 매년 4월 12일부터 18일까지다. 도서관의 가치와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시민들의 도서관 이용 활성화와 독서 생활 진작을 위한다는 취지다.

책이나 독서에 관한 기념일들이 이렇게 많지만, 안중근 의사에게는 매일매일이 책의 날이었을 것이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의 유묵을 남기셨으니 말이다.

'2019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종이책과 전자책을 합친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평균 독서량은 7.5권이다. 2017년 조사 때의 9.4권보다 1.9권이 줄었다. 연간 성인 독서율도 55.7퍼센트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독서율은 1년간 교과서·학습참고서·수험서·잡지·만화 등을 제외한 일반 도서를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성인 가운데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년 2022년 조사에서는 독서율 50퍼센트가 무너지지 않을까, 이유 있는 걱정이 든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책과 독서에 관한 무슨무슨 날들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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