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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프간 떠난 美 해병대, "고통스럽지만 가치 있었다"…군인의 길이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라는 국제 정치의 초대형 사건 앞에서 다양한 의견과 지적들이 분분합니다. 의존했던 미국이 퇴장하자 한 줌 탈레반에 속수무책 무릎 꿇은 아프간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탓하기도 하고, 시시각각 타전되는 아비규환 카불의 상황을 지켜보며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결정도 비판합니다.

철군의 당사자인 미군의 생각은 어떠할까요? 특히 아프가니스탄 최전선을 누볐던 미 해병대는 아프간 철군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미 해병들은 자신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 전사하거나 불구가 된 전우들의 희생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스스로 질문하며 혼란을 겪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미 해병대 데이비드 H. 버거 사령관과 트로이 E. 블랙 주임원사가 펜을 들었습니다. 미 해병대 최고 선임 장교와 최고 선임 부사관이 공동 명의로 지난 18일 시달한 지휘 서신은 "해병들, 우리 각자는 이번 주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사건의 속도와 범위를 이해하느라 노력하는 가운데, 어떤 해병들은 '이 모든 것이 가치가 있었는가?'라는 단순한 질문의 대답을 찾느라 애쓰고 있을지 모른다"며 해병들의 자문(自問)에 답을 제시했습니다.

미 해병대 버거 사령관과 블랙 주임원사의 공동 지휘서신

 

미국은 실패했다…미군은?

알 카에다 타도를 위한 대테러전과 민주정의 재건을 아프간 전쟁의 목표라고 했을 때 미국은 실패했습니다. 세계 최강이라는 미 해병대는 죽음의 기억을 뒤로한 채 허탈하게 아프간을 등졌고, 아프간은 어쩌면 전쟁 이전보다 악화된 상황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직접 아프간 전장을 누볐던 미 해병들은 "아프간에서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버거 사령관과 블랙 주임원사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제군들은 우리나라와 제군들의 가족, 친구, 이웃을 지키기 위해서 싸웠다. 제군들은 우리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르는 테러를 막기 위해 싸웠다. 제군들은 우리가 미국에서 누리는 것과 똑같은 개인적 자유를 갈구하는 아프간의 소녀, 여성, 소년, 남성들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제군들은 제군들 곁의 해병들을 위해 싸웠다. 제군들은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제군들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다.

정부의 명령에 해병들 개개인은 목숨 바쳐 싸웠습니다. 군인에게 정부 명령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부의 명령이 옳지 않다면 결정되기 전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일단 수립된 명령에 군은 복종해야 합니다. 민주주의 문민통제의 흔들릴 수 없는 원칙이 그렇습니다.

정부가 계속 싸우라고 하면 군은 중단 없이 전투해야 합니다. 정부가 멈추라고 하면 군은 무기를 내려놔야 합니다. 철수를 명령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철수해야 합니다. 정부의 명령, 즉 정책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정부에 있습니다. 군은 명령을 이행할 뿐입니다.

정부의 명령은 국가 이익과 직결돼 있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전쟁도 자국에 대한 테러 위협의 제거, 아프간의 재건, 지정학적 요충지의 점거 등을 위한 것이었을 테니 미 해병들은 아프간에서 가족, 친구, 이웃, 아프간인, 해병 전우들, 국가를 위해 싸운 것입니다. 분투했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철군을 결정하자 해병들은 철수한 것입니다.

아프간에서 철수하는 미군들
 

군인의 길

제군들은 우리의 핵심 가치인 명예, 용기, 헌신에 복무하며 미 해병대의 모범을 세웠다. 가치 있는 일이었는가? 그렇다. 여전히 고통스러운가? 그렇다. 2001년부터 미 해병들은 아프가니스탄 평화를 위해 명예롭고 용감하게 일했다. 제군들은 제군들의 헌신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전사자를 포함해 아프간 전쟁에 참가했던 모든 해병들의 희생을 의미 있게 하는 길이다.

전쟁은 고통 그 자체입니다.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이들을 두고 쫓기듯 떠나야 하는 절망감, 피붙이나 다름없는 전우의 죽음으로 점철됩니다. 패배해도 고통이고, 승리해도 고통입니다. 군은 이를 잘 압니다.

그럼에도 정부가 시키는 대로 용감하게 헌신하는 것이 군의 명예이자 가치입니다. 아프간 전쟁은 미 해병대에게도 처절하게 고통스럽지만, 명예와 전통을 지켰으니 이 또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지휘관은 전쟁에 넌더리가 나고 지친 부하들을 잘 추스르고, 다음 임무를 준비해야 합니다. 부하들에게 영감을 심어주면서 선배들이 일군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자신들이 치른 전쟁에 박한 평가가 따라붙더라도 빨리 털어내고, 다음을 기약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미 해병대의 모토 'Semper Fidelis(영원한 충성)'의 의미를 되새길 때이다. 동료 해병들, 해병 가족들에게 충실하고, 희생된 전우들의 모든 기억에 충실하자. 사령관과 주임원사로서 제군들과 함께 복무한 것이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Semper Fidelis!

탈레반 병사 시신 방뇨 사건 등 미 해병대가 아프간에서 저지른 만행이 적지 않습니다. 미 육군도 부사관의 민간인 학살, 시신 기념 촬영 등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미국, 미군에 대한 반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거 사령관과 블랙 주임원사의 공동 지휘서신은 묵직한 울림을 줍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부대 중 하나인 미 해병대는 큰일을 치른 뒤 실망하고 좌절하는 장병들을 어떻게 건사하는지… 군과 사회를 가로지르던 울타리가 해체되면서 각종 사건·사고가 터져 만신창이가 된 우리 군도 장병들 마음을 어떻게 다독일지가 큰 과제입니다. 우리 군 지휘관들에게 미 해병대 지휘 서신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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