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뉴스쉽] 아프간과 대한민국, 닮은 점과 다른 점



카불에서 2주를 취재하고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6·25전쟁이 끝난 뒤, 50년대 서울이 딱 이랬겠구나…'

때는 2002년 9월 초.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이다. 2001년 9월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가 테러로 무너지고, 미국은 복수의 광기에 휩싸였다. 아프간은 육지로만 둘러싸인 나라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석기시대로 만들어 버리겠다.' 미국은 인접국 파키스탄을 윽박질러 길을 열고 공격했다. 9·11 석 달 만에 수도 카불에서 탈레반이 쫓겨났다. 쫓겨났지만 사라진 건 아니어서 시골로, 파키스탄 국경의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아프간 신정부는 탈레반 공포정치에서 해방된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고 싶어했다. 2002년 9월 말 부산 아시안게임은 좋은 기회였다. 탈레반의 전면적인 통치는 1996년부터 6년이었지만 그 이전부터 각종 내전에 시달렸기 때문에 아프간이 국제 스포츠무대에 등장하는 건 20년 만이라고 했다. 그런 아프간의 사정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출장을 갔다.
 

50년대 남한이 이렇지 않았을까…많은 생각 안겨줬던 카불의 모습



카불의 거리에는 1950년대부터 90년대까지가 공존하고 있었다. 서방 군대의 장갑차와 우마차가 거리에 뒤섞여 다녔다. 허름한 군복 입은 사내와 세련된 멋쟁이, 남루한 전통의상 위에 양복 저고리를 걸친 이상한 차림의 남자들, 부르카를 뒤집어쓴 여자들과 간혹 얼굴을 내놓은 대담한 여성들이 섞여 다녔다.

미군주도 연합군과 북부동맹 중심의 신정부군이 기본적인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탈레반 잔당은 하루가 멀다하고 폭탄테러를 벌였다. 기자가 공항을 빠져나와 처음 맞닥뜨린 현장도 폭탄테러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일상을 유지하려 애썼다. 휴대폰으로 국제전화를 걸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직접 걸어가서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야 했다. 상당수 관공서도 전화선이 끊겨 있었다.
생활은 불안정했지만 사람들은 자유를 환영했다. 탈레반은 이슬람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해석해 수백년 전처럼 살 것을 사람들에게 강요했다. 율법을 위반한 사람들은 공개리에 손발이 잘리고 목이 잘렸다.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는 금지였다. 노래부르는 것, 음악 듣는 것조차 들키면 종교경찰에게 매를 맞았다. 외부세계가 뭐라 하든 탈레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탈레반이 쫓겨나간 지 9개월. 건물의 70%가 부서져 있었고 먹고 살기는 팍팍했지만, 2002년 9월의 카불 사람들은 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일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되찾은 자유를 즐기던 2002년의 카불 사람들

여성들은 전신을 뒤덮는 부르카를 벗었다. 제한된 실내 공간에서나마 남성과 어울려 탁구를 치거나, 자신들끼리 배구를 하는 등 운동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탈레반의 공포통치 6년은 여성들에게만 가혹한 게 아니었다. 정도는 훨씬 덜했지만 남성들에게도 제약이 많았다. 당시 레슬링 국가대표팀 선수는 '탈레반 하에서는 긴바지를 입어야만 레슬링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레슬링은 전투에 도움되는 남성 스포츠라서 금지되지는 않았지만 다리가 드러나는 건 남성도 금지였고, 맨몸 드러낸채 운동하다가 걸리면 종교경찰에게 끌려가 매를 맞기 때문에 긴바지를 입고 레슬링을 했다고 말했다.

카불 공설운동장 (서울로 치면 잠실 올림픽 경기장)에서 다시 운동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1년 전만 해도 경기장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손발을 자르는 형벌을 집행하거나 공개처형하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로 들리겠지만, 당시 카불에는 수영장도 재개장한 상태였다. 물은 1주일에 한 번 갈았고 제대로 된 수영복도 없었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탈레반 시절엔 꿈꿀 수 없었던 즐거움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당시 관리인은 옛 아프간의 수영 대표선수였다. 탈레반 치하에선 수도배관공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는 '신정부가 여성용 수영장을 계획하고 있다'고 귀띔해줬다. 세월이 지나 2019년, 뉴욕타임스에서 수영하는 카불 여성들의 사진을 보고 그때를 떠올렸다.

젊은이들은 바깥세상과 만나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뛰고 있었다.



무너지다 만 시멘트블록 건물에 영어 배우러 오는 어린이와 젊은이가 1천 명을 넘는다고 했다. 그 중 한 명이 아프간 복싱 대표팀 선수인 소덱이었다. 소덱의 꿈은 아프가니스탄을 넘어 세계에서 활약하는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아니, 복싱을 기회의 창으로 삼아 국경 넘어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건 소덱만의 꿈이 아니었다.

3주 뒤 그들을 부산에서 다시 만났다. 난생처음 다른나라 - 그것도 훨씬 잘 사는 대한민국 - 에 나와본 그들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소덱은 제발 어떻게든 한국에 남을 길을 마련해달라고 애원했다. 안타까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방송 일정에 쫓겨 그들의 경기를 제대로 못 보고 서울에 돌아왔다. 그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이미 국제 수준에서 한참 멀어진 탓에 결과는 좋지 않았다. '꼴찌에게 갈채를-아프간의 선수들' 이라는 프로그램 제목은 그래서 나왔다. 그들의 귀국길을 챙겨보지 못했다. 그 후로 가끔씩 아프간 소식이 뉴스에 나오면 눈길이 갔지만,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보며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 생길줄은 몰랐다.

제3세계 다른 나라의 내전이나 난민 사태와 달리 아프간 상황에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카불에서 벌어지는 필사의 탈출이 6·25 전쟁기 흥남철수와 오버랩되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2002년에 만났던 카불 젊은이들의 삶은 6·25 전쟁 뒤 대한민국 청년들이 경험한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처럼 제 길을 찾아나가고 그들은 각자의 꿈을 쫓을 수 있길 바랐는데, 만 20년이 안 돼서 다시 나라가 뒤집어졌다. 대한민국과 아프간은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달랐을까.
 

아프간의 역사...정복에 나서는 제국들의 길목

아프가니스탄이 자리잡은 땅은 고대로부터 제국들의 길목이었다. 서쪽에는 페르시아 제국 (지금의 이란)이 맞닿아 있었다. 동쪽은 고대 인도제국, 동북쪽은 중국 및 서역과 이어져 있었고, 북쪽으로는 러시아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정복자 알렉산더 대왕은 지중해 세계를 치고 인도로 가는 길에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했다. 그때 그가 끌고 온 군대의 일부가 나중에 그리스까지 돌아가지 않고 아프간에 남았다. 그래서인지 아프간에선 유럽계로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헤라트니 칸다하르니 하는 주요지역들도 알렉산더 군대의 정착지를 기반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기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우리는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야. 우리 싸움 잘해. 누가 쳐들어오든 우리를 이길 수 없어."라고 말하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서방으로 진격할 때도 길목이었다. 고대세계 최강 정복군인 알렉산더의 군대와 징기스칸의 군대를 둘 다 경험해 본 나라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될까? 그 후에도 아프간 땅은 중앙아시아의 요충지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고 해양제국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영국의 경쟁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의 첨예한 현장이 됐다.



지금의 아프간 국경도 19세기말 영국이 당시 아프간 국왕에게 사실상 강요한 조약에 의해 확정됐다. '저쪽 치러 가야 하니 길을 빌려달라.' 왜는 명을 치러 간다며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저쪽과 본격 전쟁을 치르기 전에 이쪽부터 정리해야겠다.' 청은 명을 끝장내기 전에 배후의 조선을 미리 안정화하려고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국들의 길목에 자리잡은 나라의 고난은 우리나라와 아프간의 동병상련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영국과 세 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1919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2차세계대전과 냉전에서는 중립을 지켰다. 정치적으로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20세기 중반의 아프가니스탄은 점진적으로 근대화-서구화를 추진하는 세속 이슬람 국가의 길을 갔다. 7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바로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이다.

▲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하지만 아프간은 1970년대 후반부터 요약하기도 곤란할 만큼 복잡한 혼란에 휩싸인다. 공산혁명- 이에 맞서는 이슬람 무자헤딘 반군 봉기 - 소련의 침공(1979) - 미국의 이슬람 반군 지원 -내전 격화 -소련군 철수 (1989) - 아프간 군벌간 내전 격화 - 탈레반의 전국 제패 (1996) 정도로 거칠게 요약 가능하다. 1996년 카불에 입성한 탈레반은 옛 친소련 정권의 대통령이었던 나지불라를 붙잡아 거세하고 피흘리는 그를 거리로 끌고 다니다 시신을 교통신호등 기둥에 매달았다. 나지불라는 탈레반과 같은 민족 출신이었는데도 그랬다. 이번에 도망친 가니 대통령은 자신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탈레반을 아프간에서 몰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던 이유

아프리카, 중동,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에 걸친 많은 나라들은 민족 구성과 현재의 국경이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부족단위의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데 국경선이 이와 맞지 않아서 갈등이 벌어지는 사례가 허다하다. 아프가니스탄도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다. 아프간의 일부 대도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근대국가의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살 지 몰라도, 대부분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부족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 지도를 보면 우상단(동북쪽)에서 거대한 힌두쿠시 산맥이 내려와 북과 남을 나누고 있다. 힌두쿠시 산맥은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으로도 이어지는, 세계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 가운데 하나다. 이 산맥의 북쪽에는 타지크, 우즈벡 등의 민족이 산다.



카불을 경계로 해서 남쪽 대부분의 지대는 파슈툰 족의 땅이다. 칸다하르가 남부의 중심도시다. 파슈툰 족은 이란(페르시아)계로, 말도 페르시아어와 비슷하다. 이들이 아프가니스탄 인구의 48%를 차지한다. '아프간'이라는 말 자체가 어원을 따져보면 파슈툰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말로 '-스탄'은 '~의 땅'이라는 뜻이니, '아프가니스탄'은 '파슈툰 사람들의 땅'이라는 의미가 된다. 탈레반은 바로 그런 파슈툰 족과 남부지역을 기반으로 생겨난 원리주의 종교 군사조직이다.

미국은 고민에 빠졌다. 탈레반이라는 이상한 놈들을 축출하면 아프간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더니,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게 원래 그들의 땅이라고? 그렇다.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집단의 결집된 무력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파슈툰 족의 생활반경은 동남부 산악지대 너머 파키스탄 서부까지 걸쳐 있다. 파슈툰 족은 예나 지금이나 그 땅에 살고 있었는데, 19세기말 영국이 그은 국경선 때문에 어느날 한쪽은 아프가니스탄, 한쪽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버린 것이다. 파슈툰족은 파키스탄에서 두번째로 큰 민족집단으로, 파키스탄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국경선이 그어졌어도 파슈툰 족 사람들은 산을 넘나들며 동질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미군이 몰아붙이면 탈레반 부대는 산넘어 파키스탄 영토로 도망쳤고, 같은 부족민들로부터 보충병과 보급품을 얻었다.

파키스탄 정보당국은 탈레반이 파키스탄 내부에서 창궐해 내정을 위협하도록 방치하지는 않았지만, 탈레반이 궤멸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탈레반을 적절하게 관리할 수만 있다면, 파키스탄은 국토의 뒷문이자 중앙아시아의 요충지(아프가니스탄)에 우호세력을 두고,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꽃놀이패를 쥘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그런 파키스탄을 혐오했지만 파키스탄까지 적으로 만들고 전쟁을 벌일 순 없었다. (미국이 파키스탄 영토 내에 은거하던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할 때 파키스탄측에 전혀 알려주지 않은 건 이런 불신과 혐오 때문이었다.)
 

탈레반에 맞서 싸운/싸울 아프간 내부세력은?

2001년말 미국이 탈레반을 몰아내고 카불에 입성할 때 미군과 함께 싸운 '북부동맹'은 그럼 뭘까. 1996년 탈레반이 아프간 정권을 접수할 당시의 세력 지도를 보자.



북부동맹은 마수드와 도스툼 같은 군벌들의 연합체였다. 이들은 남부의 파슈툰 족과는 말도 민족도 다른 집단이다. 탈레반의 가혹한 통치에 맞서 싸운 이들은 과연 정의로운 집단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지방민들 입장에선 '그놈이 그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9·11 복수에 나선 미군에겐 선봉을 맡아줄 현지인 무력집단이 필요했고, 그게 마침 북부동맹이었을 뿐이다. 미군의 막강한 힘을 등에 업고 아프간 신정부의 주축이 된 북부동맹은 탈레반이 약화되자 다시 원래의 부패 모드로 되돌아갔다.

아프가니스탄처럼 부족으로 나뉘어 산 역사가 길고 열강에 의해 인위적으로 국경선이 정해진 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특별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체로 두 가지다. 모두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아우라가 넘치는 현인 타입의 리더십 (예를 들어 간디나 넬슨 만델라 같은), 아니면 동아시아에서 여러 사례를 찾을 수 있는 개발독재형 리더십이다. 탈레반이 물러간 뒤 권력의 공백을 채운 신정부 주도세력은 미군이 데려다 심은 재외 아프간인, 아니면 북부동맹의 유력자들이었다. 그들은 두가지 리더십 중 어느쪽도 갖추지 못했고, 무능했고, 부패했다. 세계로 미래로 나아가고 싶었던 도시민이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지방의 부족민이나, 이유는 달랐지만 카불의 중앙정부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신정부의 영향력은 수도 카불과 북부의 몇몇 대도시, 그리고 미군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미치는 일부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지방 부족 가부장들의 민심은 옛날대로 우리식대로 살아보자는 선명한 비전, 아편재배에 따른 수입, 그리고 힘에 의한 안정을 제공하는 탈레반에게 다시 기울어 갔다.

이번에 아프간 정부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무너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미국이 손을 털고 떠나자 북부 부족들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세력 규합을 시도한다는 뉴스도 간간이 나오지만 그들이 얼마나 의미있는 저항을 조직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앞으로는 어떻게?…탈레반의 모순된 말과 행동

탈레반 대변인은 지난 15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히잡을 쓴다면 여성은 학업 및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며, 여성이 혼자 집 밖에 나가는 것도 허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 율법 하에서 여성의 인권도 존중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에서는 90년대 공포정치로 인한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지난 20년간 서구식 자유와 인권의 맛을 본 인구가 적지 않으며, 여성인력이 없이는 기관과 기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서구의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탈레반 대변인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아프간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기에는 과거의 원리주의 통치가 너무 혹독했다. 게다가 이런 혼란기에 탈레반과 같은 조직에는 통제하기 어려운 거친 사람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현장의 그들이 민간인에게 함부로 총구를 휘두르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건 설령 탈레반 지휘부에 강력한 의지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실제로 지난 17일에만 해도, 북동부 탈로칸에서는 한 여성이 부르카 대신 원피스를 입고 거리에 나섰다가 탈레반 군인의 총에 맞고 숨졌다. 카불 공항 인근에선 지나가던 일가족에게 군인이 채찍을 휘둘러, 아이가 크게 다쳤다.

▲ 사진 : 게티이미지코리아

지도부의 방침이 밑바닥에서 통일성 있게 집행되는 것 같지도 않다. 총을 든 탈레반 군인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여성에게 출근을 강요했다는 기사와, 총 든 탈레반에게 위협을 당해 직장에 못 가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보도가 동시에 나온다. 공통점이라면 총을 든 탈레반 군인이 강요를 했다는 것이다.

지난 17일 카불에선 기본적 권리 유지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숨을 건 시위가 여러 건 벌어졌고, 그 사진이 트위터에 올라왔다. 총을 든 탈레반 군인들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그들은 다행히 총을 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국제사회에 노출된 대도시이기 때문인지, 수도 카불의 인권상황은 지방보다는 나아보이는 상황이다.

19일 카불, 트위터 캡처


이 여성들은 히잡(hijab)을 쓰고 있다. 히잡을 쓰면 학업과 일자리를 보장하겠다던 탈레반 대변인의 말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을까. 여성의 신체에서 여성성을 드러내는 부분들을 가리는 이슬람 전통의상에는, 그 가리는 정도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히잡은 머리와 목 정도만 가린다. 세속주의 국가의 여성들도 히잡 정도는 문화적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차도르는 얼굴만 내놓고 전신을 휘감는다. 니캅은 눈만 내놓고 나머지를 모두 가린다. 부르카는 눈조차 짙은 그물망으로 가린다. 비인간적이다.



가뜩이나 숨이 턱턱 막히게 더운 나라에서, 부르카를 뒤집어쓰면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렵다. 지방도시들에선 벌써 여성들이 목숨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부르카를 다시 찾기 시작했고 값이 10배까지 뛰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히잡이나 차도르라면 모를까, 부르카를 좋아서 입는 여성은 예전에도 없었다. 전통을 빙자한 인습의 구속 때문이든,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적 응징 때문이든, 겁이 나서 입을 뿐이었다.

사회적 약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해야만 유지되는 사회는 오래 가서도 안되고 오래 갈 수도 없다.
 

"민주주의는 이곳과 관계 없다"…탈레반의 나라, 그 미래는

20일 금요일 현재도 상황은 혼란스럽다. 카불과 동북부 곳곳에선 아프가니스탄 국기를 내건 시위가 벌어졌다.



일부지역에선 이런 시위대에게 탈레반이 총격을 가해 사망자가 발생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국기를 구 정부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보고, 탈레반 깃발로 대체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탈레반은 전투용 항공기를 다룰 수 있는 조종사 등 전직 정부군 기능요원들을 탈레반으로 끌어들이는 작업에 나섰지만, 한편으로는 구 정부 보안부대원이나 경찰, 외국군과 외국기관 부역자 등을 색출해 처단하는 작전도 동시에 벌이고 있다.

19일 로이터는 탈레반 최상층부 정책결정과정을 잘 아는 고위관계자 와히둘라 하시미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아프가니스탄은 민주주의 체계에 의해 운영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서구식 민주주의)은 우리나라에 전혀 기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프간에 어떤 정치 시스템을 적용할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샤리아 율법이다."

그런가하면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은 102주년 독립기념일 기념식에서 외부세계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탈레반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와 우호적 관계를 원한다. 우리는 어떤 나라에도 적대적이지 않다."

두 인터뷰를 종합하면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식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힘을 집중하겠다. 테러를 서방에 수출하지는 않을테니 방해하지 말아달라. 그러나 온갖 이슬람 테러조직들이 이미 아프간 곳곳에 숨어들었고, 미군과 구 정부군이 감옥에 가둬두었던 테러범들이 풀려났다. 이들이 탈레반 지휘부 의중대로 따라줄 지는 의문이다.

탈레반 재집권은 민족자주의 실현?

미군이 발을 빼면 남한은 북한군 앞에 속절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이 나와서 한미 양국이 시끄러웠다.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간에서 군대를 빼는 건 '무의미한 희생'이라며 염증을 내는 국내여론 때문이기도 하고, 중국과의 경쟁에 힘을 집중하려는 전략적 포석이기도 하다. 한반도에서는 미군 사망자가 없다. 전략적으로는 중국 코앞의 항공모함이나 다름없다. 미국과는 상호방위 의무를 지는 동맹조약을 맺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은 현재로선 매우 낮다 하겠다. 바이든 대통령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를 확인했다. 대한민국 군대도 아프간 정부군과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군사적-전략적 판단에 앞서는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다.

국내 일부 인사와 온라인 매체는 탈레반의 복귀를 민족자주의 실현이자 제국주의 축출이라며 높이 평가하는 글을 썼다. 자신들만의 이념과 윤리로 남의 삶을 재단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방법도 불사하며, 그로 인해 짓이겨지는 개개인의 삶에는 관심두지 않는 민족주의가 과연 선(善)인가?

전쟁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각자의 삶을 소중히 가꾸며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던 19년전의 인연들을 떠올린다. 레슬링하는 카펫장수 셰이르, 영어를 배우며 해외로 나갈 기회를 꿈꾸던 복서 소덱, 7년만에 부르카를 벗고 운동을 할 수 있게 되니 날아갈 것 같다며 기뻐하던 니라와 마이라, 음악과 영화에 관심이 많던 운전기사 파르딘…



그들도 언젠가는, 우리처럼 살 수 있을까.
 

(구성 : 이현식 선임기자, 장선이 기자, 김휘란 에디터 / 디자이너 : 명하은, 이지수)

*마지막 사진은 2002년 9월 취재당시 포즈를 취해주었던 복싱선수 소덱의 모습이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