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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내가 번역가를 그만둔 이유

표정훈 | 비문학 작가, 책 칼럼니스트

'하늘하늘거리는'이라는 시 구절이 있었다.

미국인 번역가가 이 구절을 영어로 이렇게 번역했다.

'스카이 스카이 스트릿 비(Sky sky street be)'

우리말의 '하늘거리다'는 조금 힘없이 늘어져, 부드럽고 가볍게 자꾸 흔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미국인 번역가는 '하늘'과 '거리'를 각각 스카이와 스트릿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 결과 '하늘의 거리는'이라는 뜻이 되고 말았다. 이 일화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번역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지 잘 말해준다.

저렇게 번역한 미국인 번역가는 '하늘'과 '거리'라는 우리말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말의 '뭐뭐는'에서 '는'을, 영어의 비(be) 동사로 옮길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어쩌면 '하늘거리다'라는 말의 뜻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하늘'이 하나 더 붙어 '하늘하늘거리는'이라니. 번역가의 고민이 깊어진다. '하늘을 강조하기 위해 연달아 두 번 썼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도 같다. 번역해보니 영어 에스(s)가 세 번 연달아 나오며 그럴 듯하다.

나는 이 사례를 떠올릴 때마다 번역가로 활동했던 시절이 두려워진다. 내가 얼마나 많은 오역을 저질렀을까? 저런 '스카이 스카이 스트릿 비'와 같은 번역 문장이 나의 번역서에 얼마나 많을까? 새삼 부끄러워진다. 아울러 내가 번역가 생활을 그만 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가로 오래 활동할수록 오역이 쌓여갔을 터이니 말이다.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린다. 내가 번역한 책을 읽은 독자 여러분에게.

책 도서 독서 (사진=픽사베이)

역시 늦었지만 핑계를 두 가지만 대야겠다. 내가 번역가 생활을 그만둔 이유이자, 번역 작업이 어려운 이유다.

첫째, 번역은 돈이 안 된다. 번역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나 한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라면 정말 어렵다. 번역료가 원고지 1매에 5천 원이라면, 번역 원고가 1천 매에 500만 원이다. 석 달 안에 마친다 한들, 한 달 평균 수입은 166만 원이다. 책에 따라 다르지만 석 달 안에 마칠 수 있는 책은 드물다. 원고료를 받지 않고 번역 인세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번역 인세는 책 정가의 3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정가 2만 원 책이면 번역 인세는 600원이다. 그 책이 5천 부 팔리면 번역가는 3백 만 원을 받게 된다. 그런데 5천 부 팔리기까지 2년 정도 걸렸다면? 계산하기도 그렇지만 월 수입으로 치면 12만5천 원이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번역가들은 동시에 여러 책을 번역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 생계를 겨우 유지해나갈 수 있다.

둘째, 번역가는 비난 받기 쉽다. 번역은 외국어 원문이 있고 우리말 번역문이 있다. 그 둘을 대조해보면 우리말 번역문의 수준이 금방 그러난다. 오역도 발견해내기 쉽다. 오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더 나은 번역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번역가는 마치 해부학 실험실의 실험대에 누워있는 기분이 든다. 번역서를 읽는 사람들이 돋보기와 현미경을 들이대고 번역이 잘 됐는지, 오역은 없는지 살핀다. 더구나 요즘엔 SNS 같은 곳에서 오역 사례를 공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역 사례만 지적하면 좋을 텐데, 번역가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지 않기도 한다. 오역은 미워해도 오역한 번역가를 미워하진 말았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번역에는 정답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번역가가 오답을 냈다는 듯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번역이 창조적 작업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번역 작업이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번역가에 따라서는 확실한 자기 분야를 가진 사람도 있다. 과학교양서를 주로 번역하는 번역가도 있고, 역사교양서를 주로 번역하는 사람, 과학소설이나 추리소설 같은 장르문학을 번역하는 번역가도 있다. 그렇게 자기 분야를 가진 번역가라 하더라도, 대부분은 다른 분야 책도 번역한다. 왜냐면 그래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 분야랄 게 없었던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과학, 철학, 역사, 환경생태, 문학 등 제법 다양한 분야를 번역했다. 그렇게 하는 게 쉬울 리 없다. 익숙하지 않은 개념, 잘 알지 못하는 전문용어들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인터넷도 검색하고, 전문가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책도 많이 찾아봐야 한다. 그러다보면 공부는 되지만 돈은 안 된다. 번역으로 벌 수 있는 수입에 비해, 번역에 투입하는 노력이 엄청나게 커지는 것이다.

번역이 어려운 이유, 번역 활동을 그만 둔 까닭을 이렇게 말하고 나니 구차하다는 생각도 든다. 구차한 나와는 다르게 뛰어난 번역가로 활동 중인 신견식 씨의 말을 들어보자.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신견식 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스물다섯 개 언어를 번역한 경험을 갖고 있다. 나는 신견식 씨를 비롯한 모든 번역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다음은 신견식 씨의 저서,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에 나온다.
 
"언어는 늘 미꾸라지처럼 요동치면서 흙탕물을 만든다. 그걸 글로 옮길 때는 세심하게 다듬는 과정을 거친다. 다시 말해 미꾸라지를 잡아서 맑은 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흔히 번역에 나오는 언어가 다소 밋밋한 까닭도 최대한 많은 이가 잘 읽을 수 있도록 쓰려다 보니 그런 경우가 많다. 독자들이 맑은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언어라는 미꾸라지를 잘 다스리는 것도 번역가의 과제다. 나는 오늘도 꿈틀꿈틀 움직이는 미꾸라지를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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