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이토록 몰아치는 정유정! '완전한 행복' [북적북적]

이토록 몰아치는 정유정! '완전한 행복'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04 : 이토록 몰아치는 정유정! '완전한 행복'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동의할 수 없는 개념이었으나,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는 잠자코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어."

정유정 작가는 이제 별도의 설명이 무색한 대한민국 대표 소설가 중 한 명입니다. 지난 10년 간, 2-3년 간격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큰 사랑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진이, 지니] 이후 2년만에 지난 6월 내놓은 최신작 [완전한 행복]도 두 달째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무나도 인기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오히려 [북적북적]에서까지 따로 소개할 일은 아닌가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읽은 분들이 많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행복]을 오늘 선택한 이유는 정유정 작가의 문장들을 소리내서 읽는 호사를 누려보고 싶어서가 컸습니다.
 
"엄마는 오리 먹이를 잘 만든다. 지유는 만드는 법을 잘 안다.
먼저 돼지고기를 사야 한다. 머리나 갈비, 뒷다리 같은 덩어리 고기를 뼈째 사는 게 좋다. 엄마는 항상 도매시장에 간다. 마트에서 파는 살코기는 양에 비해 비싸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는 '비싸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놓고 돈 얘기를 하는 건 상스러운 짓이니까. 대신 이렇게 말한다. 오리도 칼슘이 필요해."

[북적북적]에 참여하면서 한 가지 확실하게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낭독에 유독 어울리는 작품, 소리내서 읽을 때 유독 착착 감기는 문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디오북이 보편적으로 자리잡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통의 독자가 글을 눈으로만 읽지 않고 소리 내서 낭독하는 경우가 잦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읽고 있던 책을 큰 소리로 몇 줄만 소리내 읽어보면, 글이라는 게 그냥 마음 속으로 읽는 것과 큰 차이를 보일 때가 은근히 많다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눈으로만 봤을 때는 큰 무리없이 넘어갈 만한 부분이 낭독을 시작하면 유난히 까끌하게 씹힙니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영 읽히지 않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반면, 내가 낭독한다기보다 그 문장들이 나의 낭독을 리드한다는 느낌으로 술술 읽어 내려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책들을 소리내 읽을 때의 쾌감이 낭독하는 사람 스스로 상당하기도 하거니와, [북적북적]을 올리는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다지 잘 하지 못하는 낭독이나마, 그런 경우가 듣는 분들의 귀에도 조금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꽂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 자신이 뭔가 '술술 읽혔다'고 생각한 날의 [북적북적]이 대체로 더 반응이 좋은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낭독할 때 쏙쏙 소화가 잘 되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작품들이 대개는 결국 더 재미있는 책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북적북적]의 경험으로는 거의 항상 그랬습니다.
 
"꿈에서 되강오리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다락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다락방으로 가보니 아래층 같았다. 계단을 내려가보니 욕실 같았다. 욕실로 달려가 문을 열자, 발밑이 푹 꺼져버렸다. 지유의 몸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져내렸다."

그리고 정유정 작가의 장편은 '자,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든 큰소리로 읽어봐도 좋아' 자신있게 독자에게 내밀어오는 우리말 문장 고수의 작품입니다. 휘황하거나 미려한 표현들을 휘감는 우리말 고수들도 있지만, 이토록 경제적이고 속도감 넘치는 간명하고 또렷한 문장들을 장편 내내 밀어붙이는 고수는 정유정 작가가 독보적입니다. 10년 전 [7년의 밤]을 펼쳤을 때의 그 엄청난 반가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워밍업부터 숨막히는 긴장이 감돌고, 흐트러짐 없이 내내 전력질주한 뒤에, 마지막까지 쓸데없는 말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우리말 장편소설은 (저로서는) 정말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정유정 작가가 내놓는 작품들마다 이 스타일을 점점 더 날카롭게 벼리고 또 벼리는 것을 기쁘게 읽어왔습니다.
[완전한 행복]에서는 문장의 박자감이 한층 더해졌습니다. 3-3, 3-4, 4-4, 7-5조처럼, 글자 수로 우리말 운문의 운율을 맞추는 음수율을 고려하는 것은 사실 산문 문장의 가독성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완전한 행복]의 짤막한 문장들은 대체로 이런 리듬들에 내내 발맞춥니다. 전편에 걸쳐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리듬감을 타고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오감과 위치감각을 쉴새없이 자극하는, '읽는 쾌감'이 대단한 문장들입니다. 마치 '방망이 깎던 노인'처럼, 정유정 작가가 이 작품의 문장들을 얼마나 깎고 또 깎아서 내놓은 것인지 그저 읽는 것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가장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을 고집해 강력한 주제의식을 담아낸다는 측면에서 정유정 작가는 오래전부터 –제 마음 속에서는 독보적인- '우리글 헤밍웨이'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깎고 깎은 문장들로 정유정 작가가 [완전한 행복]에서 파고든 주제는 무엇일까.
 
"꿈속의 어떤 장면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잠에서 깼는데도 꿈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엄마에게 묻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유는 몰라도 느낌이 그랬다.
"모두 다…… 기억나니?"
지유는 대답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드라이어를 쥔 엄마의 오른손에 눈이 팔린 탓이었다. 손목에서 손가락 중간까지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엄지와 손날 부분에는 피도 묻어 있었다. 아니다. 그런 걸 묻었다고 하지는 않는다.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흠뻑 젖어 있다고 하는 게 맞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여자아이 지유는 외할머니와 함께 삽니다. 재혼한 엄마와는 주말에만 만납니다. 엄마는 갑자기 1년쯤 전부터, 조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원주택을 지유와 함께 이따금 방문하며 그 동네 늪에 사는 오리들의 먹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굳이 다량의 돼지고기를 사서, 웬만한 사람들은 꺼릴 만한 고기 해체와 발골 작업을 거쳐 오리먹이를 자꾸만 만듭니다. 거듭된 반복으로 지유마저 '오리먹이'에 익숙해졌을 때쯤, 지유가 오랫동안 그리워했지만 (이혼 후) 한번도 만나지 못한 아빠가 이 늪지대로 초대됩니다.
지유의 엄마 이름은 신유나입니다. [완전한 행복]의 도입부 몇 페이지만 읽어도, 신유나가 심상치 않은 인물이고 심상치 않은 짓을 저질렀다는 점은 명백해집니다. 신유나의 전원주택으로 초대됐다 증발한 전남편은 어디로 갔을까. '범인이 누구냐', 찾아가는 스릴러가 아닙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이제 막 첫 몇 장을 넘겼을 뿐인 독자들의 앞에 벼락처럼 떨어집니다. 정유정이 구축한 세계 안에서, 그 범인이 일으키는 쓰나미에 휩쓸리는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끊임없이 가슴이 죄어드는 스타일의 스릴러입니다.
 
"언제부턴가 사회와 시대로부터 읽히는 수상쩍은 징후가 있었다. 자기애와 자존감, 행복에 대한 강박증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애와 자존감은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미덕이다. 다만 온 세상이 '너는 특별한 존재'라고 외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개인은 '유일무이한 존재'러는 점에서 고유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와 함께 누구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 또한 인정해야 마땅하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순간, 개인은 고유한 인간이 아닌 위험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행복] '작가의 말' 中)

작품 끝에 실린 '작가의 말'조차 후련하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 밑줄을 열 번 긋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완전한 행복]은 느끼하고도 을씨년스러운 '자기애 과잉 사회'에 던지는 단호한 일갈 같은 작품입니다. '자기애 과잉'에 대한 무책임한 아부가 만연한 세태에의 우려, 성숙한 주제의식을 이토록 몰아치며 몰입시키는 스릴러로 풀어냈습니다.
'특별한' 자신만의 흠잡을 데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신유나는 본인이 생각하는 그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목마다 거슬리는 장애물들을 '치워버리는' 데 서슴없는 인물입니다. 자기 인생이 완벽한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습니다. 신유나의 살인행각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나르시시즘입니다. ('고유정 살인사건'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 사건이 '신유나'의 모티브가 된 점을 작품 초반부터 바로 알아채게 됩니다. 그러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고유정 사건이 작품의 배아가 됐음을 인정하면서도 플롯과 배경, 서사는 모두 소설적 허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애초부터 지유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존재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어머니로 말하면, 양쪽이 재혼일 경우 한쪽의 아이에게 헌신하려면 다른 한쪽은 아이가 없어야 하며, 당신 아들은 '다른 한쪽'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믿는 양반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지유 때문에 노아가 희생당하고 있는 셈이었다."

신유나는 '나르시시즘'이 가져오는 파멸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더라도, 근본적인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신유나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작품 내내 계속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단역으로 잠깐 나오는 신유나 두번째 남편의 어머니도 그렇습니다. 기왕 내 자식이 재혼하는 마당에 그 재혼가정에는 내 자식의 핏줄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 정도는 사실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보통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내 자식만이 핏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식만이 그럴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 당연하게 믿어버리고, 그 믿음을 굳이 며느리와 어린 의붓손녀에게 보란 듯이 내보이는 태도는 '보통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 나르시시스트의 악취를 풍기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은 나르시시스트들이 자신의 주변에 일으키는 풍파, 그리고 그 풍파에 휘둘려 허우적대면서도 그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보통 사람'들의 투쟁 구도로 전개된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뭐 하는 짓이야."
빰을 후려치는 듯한 질책이었다. 지유는 손바닥으로 턱을 감싸고 한 발짝 물러났다. 드라이어에 찍힌 턱이 얼얼하고 아팠다. 질책에 얻어맞은 뺨이 무참하고 부끄러웠다. 더 없어질 게 없을 때까지 없어지고 싶을 만큼, 눈 안에선 물기가 차올랐다. 목 밑에선 흐느낌이 치밀었다."
 
"엄마가 왜 화를 냈지?
지유는 답을 알고 있었다. 엄마를 만날 때마다 지적당한 문제였으니까.
"흥분하고…… 막 덤벼서요."
엄마는 손을 뻗어 지유의 왼쪽 턱을 만졌다. 드라이어에 얻어맞은 건 오른쪽 턱이었다.
"아팠니?"
지유는 "조금요." 했다가 얼른 덧붙였다.
"이젠 괜찮아요."
엄마는 지유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내 딸."

나르시시스트의 풍파에 휘둘리면서 분투하는 주요 인물들 중에서도, 이 작품의 도입부를 여는 신유나의 어린 딸 '지유'에게 많은 독자들의 마음이 유독 쓰일 것입니다. 저는 정유정 작가의 전작들을 읽을 때에도 '이 작가는 학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분이다'는 생각을 종종 했더랬습니다. 특히 가정 내 학대나 소외의 그 은밀하고 무수한 층위를 정유정은 숨막히게 포착해냅니다. 신유나가 자신의 딸에게 손찌검을 해놓고 그 순간을 마무리하는 방식에 대한 이 간명하고 깊이 있는 통찰. 어린 딸의 내면을 반복적으로 부숨으로써 자신의 완전무결을 유지하는 모녀 관계의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이 대목에서 잠시 가슴이 턱 막혀와 읽기를 중단하고 숨을 고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 정유정의 세계에 –이번에도- '닥치고 빠져들' 마음의 채비가 갖춰져 있었습니다.) 숨쉴 틈도 없이 읽히는 강력한 문장들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가려진 상처들을 섬세하게 대변하는 이 어른스러운 주제의식이야말로 지금 정유정 작가가 한국의 대표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나눠주고 있는 독보적인 소설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 <골룸: 골라듣는 뉴스룸> 팟캐스트는 '팟빵', '네이버 오디오클립', '애플 팟캐스트'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 '팟빵' 접속하기
- '네이버 오디오클립' 접속하기
- '애플 팟캐스트'로 접속하기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