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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디스커버리가 뭐길래…미국으로 가는 특허 침해 소송

디스커버리가 뭐길래…미국으로 가는 특허 침해 소송

예전 미국 서부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1대1 결투다. 등을 맞댄 두 사람이 권총을 하나씩 차고 약속한 만큼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동시에 뒤돌아 서서 상대방을 향해 총을 쏜다. 먼저 총을 빼서 상대방을 정확히 맞춘 사람이 승자다. 유럽에서는 칼을 들고 겨루기도 했다. 신분이나 빈부, 계급과 관계없이 같은 무기를 들고 정해진 원칙에 따라 승패를 가른다는 점에서 이보다 더 공정할 수는 없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미국에서의 소송에서 디스커버리(Discovery: 증거개시) 제도는 이런 무기 균등의 원칙에서 출발한다. 소송과 관련한 모든 증거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재판을 하자는 제도로, 특허 소송에서 디스커버리가 마무리되면 90% 이상이 정식 재판도 하기 전에 합의로 해결된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장점은 무엇보다 원고나 피고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증거는 물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변호사와 고객 사이의 비밀이나, 소송과 관련해서 작성한 자료들 또는 현실적으로 제시가 불가능한 증거가 아니면 소송과 관련한 모든 증거를 상대방에게 요구해 받을 수 있다.

소송 당사자는 소송이 제기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서 모든 관련 증거를 그대로 놔둬야 한다(Litigation Hold). 합리적인 이유 없이 상대방이 요구하는 자료를 주지 않고 삭제, 변조하거나 거짓 자료를 제출하다 적발되면 판사가 제재(sanction)를 할 수 있다. 판사는 증거 개시를 제대로 하라고 명할 수 있고(injunction), 증거 제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고(adverse inference), 고의로 증거를 훼손하거나 제출하지 않을 경우 그대로 패소 판결을 내릴 수 있다(default judgement). 삭제한 전자적 증거는 포렌식(forensic)을 통해 복구해 제출하도록 명령할 수도 있다. 상대방 변호사가 현장 조사를 하고, 제3자를 소환해 신문하고 증거를 제출하도록 할 수도 있다.

미국 소송에서 디스커버리 제도는 1938년부터 시행됐고, 2006년부터는 디스커버리 대상이 전자문서로 확대됐다. 미국의 연방소송규정(Federal Rules of Civil Procedure)은 본격 재판에 앞서 소송 당사자들이 만나 소송의 절차와 방법에 대해 합의하도록 하고 있는데, 디스커버리를 포함한 재판 전 과정(pretrial)에 소송 기간의 80% 이상이 걸린다.

김용철 취파

'한국형 디스커버리' 놓고 치열한 공방…첫발부터 '삐걱'

대부분 업무가 컴퓨터와 인터넷 상에서 이뤄지는 요즘, 소송과 관련한 증거를 확보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이나 중소기업이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증거를 확보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보이지 않는 무형자산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관련한 특허 소송에서 증거를 찾는 것은 더 어렵다. 특허를 보유한 사람이 특허를 침해한 사람을 상대로 제기하는 특허 침해 소송에서 원고가 불리한 증거를 감추려는 피고를 상대로 침해를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고,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특허 재판은 판사의 자유로운 심증에 의존하는 '깜깜이 재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특허청은 이 같은 증거의 편재 문재를 해소하기 위해 소송 당사자들이 관련 증거를 용이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특허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김정호, 이수진, 이주환 의원이 각각 국회에 발의한 특허법 개정안은 전문가 사실 조사와 자료보전명령, 법정 외 증인신문을 골자로 하고 있다.

지난 14일 한국지식재산기자협회(KIPJA)와 카이스트(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이 공동주최한 컨퍼런스에서 남영택 특허청 산업재산보호정책과장은 "현행 민사소송법으로는 침해 입증에 한계가 있는 만큼 새로운 증거수집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특허 소송의 경우 특허권자의 승소율이 낮고 소송 기간이 길며, 우리기업이 우리기업을 상대로 해외로 가서 하는 원정 소송도 증가하고 있고, 일본이나 중국 등 주변국들도 더 강력한 증거수집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만큼 관련 제도의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이다.

미국무역위원회(ITC)에서 SK이노베이션과 전기 자동차 배터리 제조기술과 관련한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담당했던 이한선 LG에너지솔루션 특허담당 상무는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은 실체적 진실의 발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점으로, 증거의 구조적 편재를 해결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 디스커버리 과정에서 절차 의무를 위반하는 자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증거 개시의 실효성을 살리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밝혔다. 디스커버리를 통해 대부분 증거를 확보할 수 있고, 비용이 많이 들지만 고비용에 걸맞은 강력한 구제수단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한선 상무는 "높은 소송 비용은 규모가 작은 기업에게는 부담이지만 한편으로 소송의 남발을 억제하거나 협상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으며, 미국에서 영업을 하는 해외기업에 대해서도 조사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패널 토론에 나선 이후동 한국지적재산변호사협회 부회장(법무법인태평양 대표 변호사)은 "특허청의 특허법상 증거수집제도 개선 방안은 증거와 정보가 원고가 아닌 피고에게 있는 구조적 편재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증거수집 과정에서 드러나는 기업의 영업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미국의 경우 증거유지(Litigation Hold)와 비밀보호(Protective Order) 규정이 있고, 증거를 훼손하거나 유출했을 경우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거나 변호사 자격을 박탈하는 등 강력한 제재(Sanction)가 있다. 미국에는 변호사와 고객 간의 비밀유지 특권(Attorney Client Privilege) 등 제도가 완비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민사소송제도가 정비돼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변호사 사무실이 압수수색까지 당한다. 현재 제도로서는 영업비밀을 지키기가 어렵다. 특허법과 민사소송법상의 관련 규정이 서로 다른 부분도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반도체 부품과 완제품 회사들의 단체인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안기현 전무는 "새로운 증거수집 제도가 시행되면 새로운 자료를 공개해야 하는데, 이런 자료가 특허 침해 소송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많은 자료를 제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비용이 발생하는데, 이런 문제가 기업의 생존과 존폐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이 제도를 시행할 만한 수준이 되는지 의문이다. 특허권자를 보호하려다 우리나라 산업을 해칠까 걱정이다. 이는 국가경제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만큼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허영진 대한변리사회 부회장(김&장 변리사)은 "삼성전자가 35년 전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로부터 소송을 당했는데 그때 경험이 현재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이 되는데 영향을 줬다. 우리나라가 스크린쿼터를 폐지한다고 했을 때 한국영화 다 망한다고 했다. 지금은 안 그런다. 우리나라가 혁신 국가를 지향하는데, 혁신 국가 건설에는 지식재산(IP: Intellectual Property) 존중이 핵심이다. IP 국가 건설하려면 디스커버리 해야 한다. 한때 원정 출산이 많았는데, 요즘 원정 소송이 많다. 원정 소송을 하는 이유는 국내의 '원님 재판'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절차가 보장되는 한양(미국)에 가서 임금님께 신문고를 울려야 하겠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시행하면 영업비밀 유출이 문제라고 하는데 변호사들은 기술을 봐도 잘 모르고, 영업비밀을 유출할 동기도 없고, 유출할 경우 강력한 제재를 하면 된다. 생각만큼 비밀 유출 위험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

특허 소송 관련 자료관리 서비스를 하는 인텔렉추얼데이터 조은지 팀장은 " 요즘 특허 소송은 전자문서로만 진행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증거를 훼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무결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효율적 증거 개시를 위한 기술 개발도 중요하다"며 최근 미국 특허 소송에서 전자문서 증거개시(e-discovery)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LG/SK 배터리 소송 합의

"디스커버리 아니예요"…후퇴하는 K-디스커버리

보험에 가입한 뒤 사고가 나서 보험금을 받아야 하는데 보험 계약서를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보험사의 선의를 믿어야 하겠지만, 만약 보험사가 지급을 거절하면 딱히 대항할 방법이 없어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보험사가 가지고 있는 자신의 보험 계약서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고, 보험사는 계약서를 반드시 내줘야 하는 것이 디스커버리 제도이다.

이런 점에서 특허를 비롯한 지식재산권(IPR: Intellectual Property Right) 보호에 새로운 증거수집 제도가 필요하다는데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만, 특허청은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산업발전과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반발에 한 발 물러서고 있다. 특허청 남영택 산업재산보호정책과장은 "특허청이 도입하려는 것은 디스커버리 제도가 아닙니다. 현재 자료제출명령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도록 증거수집제도를 보완하려는 것입니다. 자료 보전 의무가 발생하는 시기도 디스커버리처럼 소송 전이 아니라 소송 제기 후입니다"라고 말했다.

김용래 특허청장도 "특허청이 도입하려는 것은 디스커버리가 아니라 독일식 자료제출명령제도이다. 걱정할 것 없다. 반도체 업계가 새로운 특허법상 증거수집제도를 도입하면 일본 업체들의 소송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반도체 국산화율은 20% 밖에 안되고, 대부분 핵심 기술이 아닌 후 공정에 집중돼 있다. 더군다나 일본 업체들이 최대 고객사인 한국의 반도체 회사들에게 소송을 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말했다.

새로운 증거수집제도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대기업에 부품이나 재료를 공급하는 회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객사인 대기업의 우산 아래에서 특허를 침해하면서 개발보다는 남의 것을 갖다 쓰겠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특허 보유권자들도 대기업에 납품하는 상황에서 같은 고객사인 대기업의 공급 회사를 상대로 특허 분쟁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을 이용한 전략이다.

김용래 특허청장은 "일부 국내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기술을 개발해 가지고 오면, 그 기술을 외국 기업이나 기존 국내 공급업체들에게 보여주며 가격을 인하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반도체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부품 국산화율이 낮고, 산업 생태계에서 부품과 원료를 공급하는 허리가 없는 취약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하게 특허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하고 있다.

법원 판사 판결문 (사진=픽사베이)

'깜깜이 재판'에 추락하는 사법 신뢰…"기득권에 밀려나는 혁신"

2011년 국내 대기업 코오롱(Kolon)과 미국 화학기업 듀폰(Dupont)과의 첨단 섬유 아라미드를 둘러싼 1조 원 규모 영업비밀 침해 소송, 올해 들어 미국무역위원회(ITC)에서 진행된 대웅제약과 메디톡스의 보튤리눔 톡신 '나보타'를 둘러싼 특허 소송,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 사이에 ITC에서 진행된 2조 원 규모의 전기 자동차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보듯이 이미 지식재산 관련 소송은 국경을 초월해 진행되고 있다.

세계 IP허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특허법원에 국제재판부까지 설치한 상황에서 국내 지식재산 보호 수준을 높이기 위한 관련 제도의 선진화는 시급하다. 김정호, 이수진, 이주환 의원이 특허법 개정안 발의하고, 조응천 의원이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를 원용한 민사소송법 개정안을 잇따라 발의하면서 우리나라의 부실한 증거수집 제도 개선에 나서는 이유다.

하지만 지금 특허청이 '특허 침해 입증 개선을 위한 새로운 증거수집제도 도입방안'으로 제시한 전문가 사실조사, 자료보전명령제도, 법정 외 증인신문으로는 특허 침해를 규명할 제대로 된 증거를 수집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에 익숙한 A 변리사는 "현재 제안된 증거조사제도만으로는 전문가가 현장에 조사를 나가도 증거를 수집하거나 제품이나 서비스의 설계 기술을 충분히 파악하기는 어렵고 증거의 왜곡 등을 파악하기도 힘들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가 하듯이 전방위로 압수수색을 하고, 자료를 그대로 떠오기 전에는 증거를 확보하기도 어렵고 증거의 선택적 왜곡을 확인하기도 어렵다. 특히 자료보전명령 발동 시점이 소송 제기 후라는 것도 우려스럽다. 분쟁가능성이 생기면 소송이 제기되지 전에 자료를 삭제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제도의 개선을 추진하면서 원고의 권리만 주장하는데 피고의 권리도 똑같다. 증거 수집의 개선은 무기 평등의 원칙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이어야 한다. 피고도 원하는 증거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물론 현재보다는 한걸음 나아간 제도이기는 하나 원고의 권리와 그에 따른 부작용이 부각될 가능성 역시 우려스럽다. 디스커버리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해 봐야 안다. 미국의 경우 변호사들이 업무에 투입한 시간 단위로 비용을 청구하는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도급 체계다. 비용은 대리인이 감수할 것이고, 특허침해자에게 전가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식재산문제를 전문으로 다루는 B변호사는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 가운데 일부를 도입한다는 것인데,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만족할 만한 기능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허청의 개선안은 차선도 아니고 세 번째 내지는 네 번째 대안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재판이 증거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재판을 개선하려면 모든 사실을 먼저 드러내 놓고 해야 한다. 총을 들고 대결을 하기로 했는데 상대방이 쏜 대포에 맞아 죽은 사람은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다. 현실적으로 힘이 있으면 숨길 수 있고, 재판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면 모두 숨기고 증거 제시를 거부할 것이다. 사실관계가 뻔한데 증거를 확보할 수 없어서 재판에서 진다면 국민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법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원고나 피고 어느 한쪽에 유리하게 하자는 제도가 아니다. 모든 증거를 투명하게 드러내 놓고 증거를 토대로 사실 관계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제도이다. 소송 남발, 비용 증가, 산업 피해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나오지만 우리나라의 혁신을 지원하고, 사법제도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일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식재산 분야에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면 다른 분야의 소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은 최소화해야겠지만 명백한 증거 확보라는 본질적인 취지를 살리도록 제도 보완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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