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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북적북적]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북적북적]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21.07.04 07:0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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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298 :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물론 그 와중에도 나는 잘 살았다. 이성애자들도 지구온난화, 금융 위기 등 큰 장애물들이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는가.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얘기가 조금 달라졌다."

오늘의 에세이집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는 '결혼준비 가이드북'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중 5%의 사람들을 위한 결혼 가이드북'입니다. 우리 중 5%에 속하는 작가 김규진 씨가 20대 후반이었던 2년 전 결혼을 결심했을 때, 95%의 '남들 하는 정도로만' 결혼하는 것은 하나부터 열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김규진.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 왜 아무도 레즈비언으로 잘 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지 궁금해하다, 그냥 제 이야기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김 씨가 운영했던 블로그의 이 머리말은 그대로, 2020년 6월 낸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머리말로 쓰였습니다. 지난 2년 동안, 뉴스나 SNS를 통해서 김규진 씨의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된 사람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김 씨가 자신의 SNS에서 차근차근 공유한 스스로의 연애와 동성결혼 과정은 꾸준히 화제가 됐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청하는 곳에는 가능하면 찾아가 입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받지 않아도 되었을 상처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 출근하는 유능한 회사원인데다 신혼생활 적응만으로도 바쁜 시기에 굳이 시간을 쪼개고 쪼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은 셈입니다. 하지만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집어들어 읽어보면, 규진 씨는 그저 언제나 이 말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나 자신이 인구의 5%로서 잘 살아가는 법을 계속해서 모색해 가기 위해, 다른 5%들과, 더 나아가 95%들을 돕기로 했다는 것을.
"청첩장 디자인이 완성됐다. 드디어 회사에 휴가 및 경조금 신청을 할 때가 왔다. 전무님과의 일련의 대화 후 인사팀에서는 별도로 얘기가 없었고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정식으로 물어본 것은 아닌 만큼 인사팀에게 따로 문의 메일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나 다음에도 결혼하는 사내 동성애자들이 나타날 텐데 혜택 수령 가능 여부를 미리 정리해두면 그들도 편해지리라 생각했다.
메일을 보내기 전에 부장님에게 논의를 드렸다.
"부장님, 첨부한 도표와 같이 각종 혼인 관련 혜택 적용 여부를 인사팀에 문의하려고 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게 무슨 얘기지. 큰일을 만들지 말라는 뜻인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려는 찰나, 부장님이 말을 이어갔다.
"청첩장만 첨부하라고 규정에 적혀 있는데 규진이라고 굳이 따로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승인할 테니까, 기안하세요."
순간 울컥했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동성애자라고 해서 남들 이상으로 증명을 할 필요는 없었다."

"걱정과 달리 조심스럽지만 화기애애한 말이 오고갔다. 아빠가 주책맞게 자신이 대학생 때 인기가 많았다는 얘기를 꺼내기도 했으나 무척 즐거워 보여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갈 때쯤 아빠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너희 엄마랑 동성동본 결혼을 했어. 외할아버지 반대가 심해서 내 본관을 다르게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 그런데 30년이 지난 지금 누가 동성동본 얘기를 하냐? 동성 결혼도 30년 뒤에는 아무것도 아닐 거야."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의 결혼 비밀보다는, 이 결혼을 지지해 주기 위해 아빠가 자신과 동성 커플의 공통점을 찾아서 해줄 말을 열심히 골랐다는 점에 놀랐다.
정말 맞는 말이기도 했다. 동성동본 혼인 금지, 호주제와 같이 지켜야만 할 절대적 가치로 보였던 일들이 2, 30년이 지난 지금은 정말 별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의 결혼도 30년 뒤에는 그렇게 될 것이라니, 결혼 승낙 발언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말이었다."

김규진 씨는 -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빌려 오자면- '보수적인 유교 레즈비언'입니다. 남달리 파격적인 삶을 살겠다는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이제는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으면서 인생을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이 책에서도 무엇보다 도드라지는 것은 김규진 씨의 똑부러진 현실감각입니다.

그래서,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현실 속 생활인들이 겪어야 하는 문제들을 김규진 씨가 이 책에서 조목조목 짚을 때 자연스러운 공감에 이르게 됩니다. 배우자와 항공 마일리지를 가족 결합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응급실에 가야 할 일이 생긴다고 해도 내가 그녀의 보호자라고 나서기 어렵다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김규진 씨가 평범하게 살기란 사사건건 쉽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제도가 이 평범한 부부가 평범한 삶을 누리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김규진 씨 부부는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지역을 찾다가 지난 2019년 맨해튼에서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한국인인 두 사람에게 미국에서의 혼인신고는 상징적인 의미 그 이상의 것은 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두 사람은 미국에서 발급받은 혼인증명서로 국내 항공사 마일리지의 가족 결합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변화는 이렇게 조금씩 옵니다. 여기서 언감생심 꿈꿀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일들이 사실은 세계 곳곳에서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때, 결국은 이곳의 빗장이 풀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발걸음을 공유한 김규진 씨와 같은 사람들이 자신 뿐 아니라 다른 부부들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조금씩 더 앞당기고 있습니다.

때로 세상이 규진 씨에게 묻습니다. 이 책에서 규진 씨 부부의 양가 부모님 가운데 이 부부를 가장 지지해 주는 것으로 나오는 아버지마저도 때로 묻습니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라고요. 왜 굳이 이렇게까지 너의 결혼에 대해서 온 세상에 알려야 하느냐. 아니, 결혼하지 않고 그냥 같이 살면 안 되느냐. 그냥 묻어가면 어떻겠느냐.

하지만 김규진 씨는 똑부러진 현실감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할 수 없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의 내 인생을 조금 더 낫게 만들려면 '조용히 묻어가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규진 씨는 현재 이 시점에서 자신의 삶을 공개해 '동성결혼 가이드북'을 제시하는 유부녀가 되기로 합니다. 한국인 부부가 굳이 맨해튼을 찾지 않고 살던 동네 주민센터에서 혼인신고를 할 수 있는 날이 왔을 때, 자신의 삶도 좀더 탄탄하게 편안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내가 함께 편히 살 수 있는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 이 책은 동성결혼의 경험을 공유한 신혼부부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시민의식과 시민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커밍아웃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은 몰랐겠지만 나는 인구의 95%와 다르단다'라는 얘기를 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기술적인 측면이 있다. 말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쉽게 받아들일 수도, 어색해하며 꺼릴 수도 있다. 물론 이상적인 평행세계에서는 이런 고민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테다. 정체성은 한 사람의 고유한 속성이고, 남들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21세기 대한민국이다. 약간의 팁을 통해 주변에 더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연습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흔히 보수적인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은 동성애를 잘 수용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보수성을 너무 단편적으로 바라본 시각이다. 보수적인 가치 중 물론 남녀간의 사랑과 정상 가족의 유지가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우정, 의리, 그리고 집단주의적 사고 등도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에게 호의적인 환경을 미리 조성해 놓았다면 보수적인 사람들도 기꺼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는 이미 동성결혼 법제화를 지지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좀… 그거는… 동성애는 좀… 그렇지 않아요?"라고 주저주저 이야기하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규진 씨는 자신의 입장에 서 보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헤아릴 줄 아는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규진 씨에게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설득할 줄 아는 '역지사지의 센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부분들을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있는 소수자가 갖기 힘든 도량이 있습니다. 모를 수 있다는 것, 낯설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은 대화를 시도하는 책입니다. 내가 이해 받기 원하는 만큼, 상대방도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김규진 씨는 알고 있습니다. 온라인에는 증오의 언어들만 유독 넘쳐나는 것 같지만, 정작 규진 씨를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게 된다면 "어허.. 우리 딸도 저 반만큼만 똑똑하면 걱정이 없겠는데." 할 어른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는 5%의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는 결혼안내서일 뿐만 아니라, 변화와 대화의 가능성을 믿는 소수자가 95%에게 먼저 건네는 인사이기도 합니다. (아, 100%의 인구에게 보탬이 되는 '꿀팁'도 있습니다. 김규진 씨가 지금의 아내에게 프로포즈하기 위해 준비했던 '프리젠테이션'은 그야말로 거절당할 수 없는 프로포즈의 정석입니다.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생긴 분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면 좋은 참고가 될 것입니다.) 이런 친구랑은 트고 지내는 게 좋다는 것을 이 책을 집어 들면 아마도 곧바로 공감하시게 될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아빠가 완벽한 건 아니다. 나를 응원하지만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가끔 부당한 주장을 하는 엄마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엄마 편, 나는 와이프 편이 되어주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건강한 가족 관계다. 그리고 항상 나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아빠가 나에게 힘을 실어주던 기억들이 나를 더 강하게 만들고, 힘든 일들을 이겨낼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준다.
물론 나를 지지함으로써 아빠가 얻어간 이득도 적지 않다. 어색하던 부녀 관계를 하루 만에 좁혔고, 나의 충성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동의하지 않더라도 아빠 말은 웬만하면 들으려고 노력했고, 문자를 보낼 때도 마음에서 우러나온 하트를 달기 시작했다. 유교적 사상이 옅어져 가고 효라는 가치가 바래 가는 21세기에 지지 선언 하나로 자식의 사랑을 얻다니 이 얼마나 큰 소득인가? 역시 내 영민함은 친탁했음이 분명하다.
내가 만약 자식을 낳게 된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아빠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식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위즈덤하우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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