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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한민국 검찰, 실패자와 피고인이 승진하는 조직

[취재파일] 대한민국 검찰, 실패자와 피고인이 승진하는 조직
어느 회사에 승진을 눈앞에 둔 간부가 있었습니다. 이 간부는 좋은 뜻을 가지고 지금까지 누구도 해보지 못한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참여했지만 실무를 책임진 사람은 이 간부였습니다. 그런데 언론의 집중적인 보도까지 이어졌던 이 프로젝트는 법적 분쟁에 휘말린 끝에 사실상 좌초되고 말았습니다. 워낙 사회적 파장이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결국 이를 계기로 사장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회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해야 했습니다. 자, 과연 이런 상황에서 프로젝트 실무를 담당했던 문제의 간부는 과연 승진을 할 수 있을까요?
 

회장을 대국민 사과하게 만든 간부는 승진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회사라면 이 간부는 승진을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간부가 추진했던 프로젝트의 취지가 아무리 좋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성공했다면 전인미답의 업적을 세우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실패해서 사장이 물러나고 회장이 공개적으로 사과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 프로젝트의 실무자를 영전시키는 조직은 없습니다. 책임을 물어 징계를 하거나 좌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를 실패한 사람을 남들이 부러워하는 자리로 영전시키는 조직이 한 곳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검찰입니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24일 검찰 중간간부급 인사 발령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이번 인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특히 눈에 띈 것은 박은정 법무부 감찰담당관이 수원지검 성남지청장으로 영전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성남지청장은 검사장 승진 1순위로 꼽히는 자리입니다. 실제로 직전 성남지청장이었던 예세민 검사는 이달 초 검찰 고위간부 인사 때 검사장으로 승진해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에 임명됐습니다. 역대 성남지청장 중 검사장 승진을 하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소수일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 추미애 전 장관 시절부터 법무부 감찰담당관을 지냈던 박은정 검사가 가게 된 것입니다.

박은정 검사

그런데 박은정 검사는 지난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징계 청구 작업을 주도했던 실무 책임자였습니다. 심지어 직속상관인 류혁 법무부 감찰관에게까지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고 윤석열 징계 청구를 밀어붙이다가 감찰위원회에서 상관인 류혁 감찰관과 충돌하기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물론 이런 파열음 속에서도 징계 청구를 통해 법무부가 원하는 결과가 나왔다면 박은정 검사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실무자로서 승진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헌정사상 최초라는 검찰총장 징계 청구 프로젝트는 결국 추미애 장관의 사퇴와 문재인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라는 대참사로 끝났습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부각된 결정적 계기가 된 것도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대통령이 사과했지만…요직으로 영전한 박은정 검사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징계 청구가 정당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부당했다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 의견을 가진 사람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상식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헌정사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초유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대통령이 사과까지 하게 만든 행정부 공무원이 문책을 받기는커녕 영전하는 것은 정상적 조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점입니다. 잘한 일에 대해 보상하고, 실패한 일에 대해 벌주는 신상필벌은 보수든 진보든, 좌파든 우파든, 우리나라든 다른 나라든 조직의 최소한의 건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을 사과하게 만든 일의 실무적 책임자였던 박은정 검사를 영전시킨 이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번 검찰 인사에서 영전한 사람은 '실패자' 뿐만이 아닙니다. 검찰에 의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목된 '피고인'도 검찰에서 승진에 성공했습니다. 김학의 전 차관을 불법적으로 출국금지한 혐의로 기소된 이규원 검사가 부부장검사로 승진한 것입니다. 물론 검찰이 누군가를 기소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바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고인은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형사재판 절차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무죄 추정 원칙이 있습니다. 이규원 검사는 자신의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가기관인 범죄 혐의가 있어서 재판에 넘겨진 공무원을 승진시키는 경우는 검찰이 아닌 다른 국가기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일입니다. 

이규원 검사

더구나 이규원 검사를 형사재판에 넘긴 기관은 다른 곳이 아니라 검찰입니다. 검찰이 범죄 혐의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인물이 검찰 내부에서 승진에 성공하는, 논리적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 같은 경우가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다른 기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경우를 상상해보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국세청이 어떤 국세청 직원의 탈세 혐의를 적발해 형사고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얼마 후 이 사람이 국세청 내부에서 간부로 승진했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이런 일이 대한민국 검찰에서는 실제로 벌어진 것입니다. 조직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 목적이 범죄 혐의를 파악해 재판에 넘기는 것인 기관이 자기 기관에서 범죄 혐의가 포착돼 재판에 넘긴 인물을 자기 기관의 간부로 승진시킨 셈입니다. 조직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부정하는 성격의 인사라고 하겠습니다.
 

검찰이 범죄 혐의 있다고 결론 내린 사람이 검찰 간부로 승진

물론 이규원 검사가 기소된 후 승진하거나 영전한 첫 번째 케이스는 아닙니다. 지난해 이후로는 오히려 기소된 '피고인 검사' 중 거의 대부분이 승진에 성공했습니다. 한동훈 검사장을 독직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정진웅 검사는 기소된 이후 광주지검 차장검사로 승진했습니다. 김학의 불법 출국금지 의혹에 대한 수사에 압력을 가한 혐의로 기소된 이성윤 검사장도 얼마 전 서울고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검사는 아니지만 박범계 법무부 장관 역시 국회 패스트트랙 사건 관련 폭행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 신분으로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둘 만합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오히려 승진을 하려면 기소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 한동훈 검사장이 승진을 하지 못하고 한직을 떠도는 이유도 전직 채널A 기자의 강요미수 혐의의 공범으로 1년 넘게 수사를 받으면서도 기소가 되지 않아서 피고인 신분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박범계 법무장관-이성윤 서울고검장-정진웅 차장검사

박은정 검사나 이규원 검사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박은정 검사의 '개혁의지'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이규원 검사가 억울하게 기소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까지 하게 된 과정에 책임이 있는 공무원이 영전하는 일, 검찰이 범죄가 인정된다고 판단해 재판에 회부한 피고인 검사가 검찰 내부에서 승진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상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사권자인 대통령이나 법무부 장관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도드라지게 영전시킨 이유는 결국 '충성심' 때문일 것입니다. 업무적 무능력도, 형사적 범죄 혐의도 모두 눈감아 줄 정도로 '입증된 충성심'만이 유일한 인사의 잣대라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흠결이 있어도 충성하면 보상한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밝힌 것입니다.
 

몇 년 후 이번 검찰 인사는 어떻게 평가될까?

그러나 오로지 충성심만을 잣대로 인사를 결정하는 조직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에 대해서 역사는 우리에게 수천 년 동안 반복적으로 보여줬습니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개혁과 반개혁의 문제도 아닙니다. 큰 프로젝트를 실패해 조직에 큰 충격을 준 사람과 자기 조직이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결론 낸 사람을 적어도 승진을 시키면 안 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지난 25일 국회에 출석해 이번 검찰 중간간부 인사에 대해 "조화와 균형 있게, 공정하게 했다."라고 스스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박범계 장관과 함께 이번 인사 업무를 담당한 이정수 전임 법무부 검찰국장, 구자현 법무부 검찰국장, 김태훈 법무부 검찰과장도 박 장관과 마찬가지 생각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교훈이 다시 한번 반복될지 확인하기 위해서 시간이 지난 후 이번 검찰 인사를 주도한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1년 또는 2년 후 이 글을 다시 찾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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