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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북적북적]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297 :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거기 누워 있으니 30분쯤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지구는 45억 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자연사 박물관에 갔던 날이 나에게 그랬다."

낯선 숫자이기만 했던 2021년도 절반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지나간 모든 것도 순간이나 "덧없이 사라져 가지만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죠.  
 
저에겐 곰을 가까이서 봤던 그 순간이 꽤 근사했습니다. 트레일로 유명한 여행지를 방문했는데 먼저 다녀온 사람들이 곰을 봤다기에 저도 멀찍이서 보고 싶었습니다. 바로 전날 곰이 나왔다는 그곳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뱅뱅 돌았는데도 다람쥐 한 마리 나오지 않아 '나와는 인연이 없나' 했는데 막 차를 몰고 모퉁이 돌아 나오는 그때 나타났습니다. 차 유리창 왼쪽 위 구석에 자그맣게 보였던 갈색 털뭉치! 그렇게 저는 그날 곰을 봤습니다. 여행에선 매번 그렇지는 않지만 일상과 딱 구분되는 그런 순간이 종종 나타나곤 하죠. 
 
여기 무려 9년에 걸쳐 쓴 여행기가 있습니다. 2012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해 독일 아헨, 일본 오사카, 타이완 타이베이, 영국 런던까지 5곳. 조금 성기긴 하지만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해도 될 만한 이 여행기의 제목, 이번 북적북적의 선택은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입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 여행, 친구가 함께 가자 해서 떠난 여행, 엄마랑 같이 간 여행, 경품에 당첨돼 갔던 여행, 그리고 무려 신혼여행까지 있습니다. 첫 번째 여행은 뉴욕, 이때 2012년은 작가가 출판사 직원과 작가의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즉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회사를 관두고 전업작가의 세계로 뛰어든 그때입니다. 지금이야 그 선택이 옳았다는 걸 누구나 알지만 당시엔 인생의 큰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아무도 알 수 없던 그때, 뉴욕에서 공부 중인 친구 L을 만나러 떠나면서 이 여행기도 시작됩니다.(그 기록은 9년 뒤에 완성, 출간되고요.) 
"이 지난 여행의 기록들은 사실 여행 그 자체보다는 여행을 하며 안쪽에 축적된 것들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멀리 가서 맞닥뜨린,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을 마음속 거름망으로 걸러내 정리해두고 싶었다." 
 
"왜 소설이었을까? 둘 중에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것은 편집자로서의 커리어였다. 작가로서는 미미하기만 했는데 왜 소설을 택했을까? 
 
스물아홉 살의 내가 몰랐던 것을 지금의 나는 알고 있다. 사랑 때문이었다. 천 부도 겨우 팔렸지만 그때도 강렬하게 지지해주는 독자분들이 계셨다.... 독자와 작가 사이의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도 달랐다. 어떨 때는 커다란 방패고, 또 어떨 때는 완전연소하는 연료라서 한번 경험하면 다시는 그것 없이 살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선택해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 의기양양하실 수 있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여행 전에 사람들에게 뉴욕에 간다고 하면 잠시 머문 사람들은 기뻐하며 이것저것 알려주었고, 오래 살다 온 사람들은 어째선지 입을 꾹 다물었는데 시간 차를 두고 그 표정이 해석되었다. 뉴욕에 특별한 애착과 기억이 있어서 그것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큰 도시를,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자마자 맨 처음으로 때려 부수는 도시를 공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니 정말 매력 있는 곳임이 틀림없다." 
 
"사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최악을 각오하고 여행하는지도 모른다... 세계는, 인류는, 문명은 순식간에 백 년씩 거꾸로 돌아가기도 하고 그럴 때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견뎌야만 한다.  
 
같은 장소에서 언제나 같은 일들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지금이 그리 좋지 않은 시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
 
친구 집에 머물지만 주로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혼자 하는 여행, 작가가 느끼고 관찰한 뉴욕은 의외로 친절하고 다정한 곳, 그러나 관광객으로서 꽁하는 순간도 생깁니다. 코로나 시국엔 그마저도 사치이지만 이 여행은 2012년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죠. 지금 뉴욕의 관광객은 이전에 비하면 5분의 1, 혹은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 여행이 본격 재개되면 뉴욕은, 또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바뀔까요. 
 
"L이 데려가 준 가게들 중에는 간판 없는 가게들이 많았다. 낡고 어둑한 계단을 올라가면 아무 표식도 없이 가게들이 숨어 있었다... 밀어닥치는 관광객들을 피해 현지인들이 시간을 보내는 장소들이라는데, 백 퍼센트 순도의 관광객으로서 그런 가게에 앉아 있자니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관광객들이 그렇게나 밉나? 따돌리고 싶나? 아무래도 꽁하게 되었다. 
 
이 멈춤의 시간들이 끝나서 사람들이 내가 사는 곳으로 여행을 오면, 차갑지 않게 대하는 쪽이 되고 싶다. 언젠가 한국 사람들도 간판이 없는 음식점으로 관광객을 피해 숨어들까? 현지인들만 알 수 있는 비밀 공간들을 만들어나갈까? 어느 순간 허용 능력을 벗어나게 되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설렘과 애정을 품고 방문한 사람들을 너무 쉽게 미워하지 않으면서, 지켜야 할 것들을 망가지지 않게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여행에서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떨 때는 행운의 연속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어딘가로 여행을 다녀오고 또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 삶의 큰 행운이 아닐까, 요즘엔 더욱 그렇습니다. 인생은 그런 여행과 일상, 그리고 행운들이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클래식 영화 속 런던의 건물들이 그대로여서, 우리의 시대가 지나고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도 그대로겠구나, 우리가 건물들을 방문하는 게 아니고 건물들이 잠깐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다. 언제나 거기 있을 것과 잠깐 거기 있는 것들 사이를 누빌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행운이었다. 사람들이 다시 여행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행운들이 고르고 넓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9년 전, 7년 전 당시에 정세랑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이 책에 함께 담겨 있습니다. 작가가 다정하게 전해주는 글을 읽으면서 언젠가 다녀왔던 여행과 언제고 다시 떠날 미지의 그곳을 그려보면 어떨까요. 각 여행기에는 "(     )만큼 뉴욕/아헨/오사카/타이베이/런던을 사랑할 순 없어"라고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빈칸에 들어갈 말은 뭘까요. 정세랑만큼 뉴욕..을 사랑할 순 없어? 심영구만큼/너만큼/나만큼?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일까요.  
 
이 책을 읽고 낭독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저의 행운을 소비했습니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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