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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회의는 짧게, 인생은 길게

표정훈 | 비문학 작가, 책 칼럼니스트

[인잇] 회의는 짧게, 인생은 길게
이런저런 회의에 자주 참석한다. 독후감 대회 심사회의, 공공 기관의 출판 지원 대상 선정회의, 우수 도서 선정회의, 그밖에 다양하다. 그런 나 자신을 스스로 이렇게 불러보기도 한다. '프로 회의참석러.' 여기에서 '프로'는 두 가지 뜻이다. 전문성을 갖췄다는 점에서 프로다. 회의 참석이 생계 수단의 하나라는 점에서도 프로다.

그렇다고 회의 참석 사례비가 후한 법은 없다. 얼마 전 참석한 회의는 왕복 4시간 걸려 오가야 했다. 전날 4시간에 걸쳐 회의 자료를 미리 검토해야 했다. 사례비는 20만 원이다. 이처럼 미리 회의 자료를 검토하고, 회의에서는 최종 확정만하는 경우가 있다. 사전 검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회의 시간 자체에 대해서만 2시간 기준 20만 원 또는 30만 원을 준다. 그래도 고맙다. 회의에 불러준다는 것은, 아직 업계에서 쓸모가 있다는 뜻이니까.

회의 참석자 가운데는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여기 왔을까?', 이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피곤해진다. 첫째, 길이 막혀 늦게 도착해 송구하다고 말하는 사람. 미리미리 서두를 것이지, 구차하게 길 핑계나 대는 사람이다. 둘째, 다른 일정 때문에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그럴 거면 애당초 왜 왔을까? 두 가지 일정 가운데 하나만 택하든가 할 것이지.

셋째, 회의 취지와 목적 자체를 자꾸 문제 삼는 사람. 그럴 거면 회의 참석 요청을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한다. 넷째, 뭘 하는 회의인지 잘 모르고 와서, 주최 측에 기본적인 질문을 계속 하는 사람. 다른 참석자들도 주최 측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다섯째, 참석자 소개할 때 인사말 한 뒤론, 회의 내내 거의 침묵하는 사람. 바꿔 말하면 '마네킹 참석자'다.

여섯째, 회의실을 강의실로 착각하는 사람. 회의 주제에 관한 각종 지식을 대방출하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잘난 척한다. "제가 예전에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회의를 자기 자랑 무대로 삼는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한 번 말하기 시작하면 좀처럼 끝날 줄 모르는 사람. 노래방에서 마이크 독차지하는 사람 비슷하다고 할까.

이런 사람들이 회의 시간을 괴롭게 만든다면, 즐겁게 해주는 것들도 있다. 회의 참석자들 앞에 놓인 과자, 초콜릿, 00파이, 사탕, 음료수 등이다. 회의에 따라선 과일이나 떡, 빵이 놓일 때도 있다. 한 끼를 간단히 해결하기 충분하다. 나는 회의 끝나고 다른 참석자들이 손대지 않은 간식을 가방에 다 담는다. 집에 가져와 아내에게 보여주고 칭찬 받는다. 예전 "잘했군 잘했어" 노래도 떠오르며 기분이 좋아진다.

간식, 초콜렛, 사탕, 비스켓, 과자

회의 참석자 앞에 놓인 볼펜, 플러스펜, 연필 등 필기구도 나를 즐겁게 한다. 다만 내 앞에 놓인 것만 가져온다. 한 번 먹으면 없어지는 간식에 비해 필기구는 제법 오래 쓸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 놓인 필기구가 제법 고급이면, 회의 끝나고 다른 참석자들 것까지 다 챙긴다. 그럴듯하지 못한 핑계를 대자면, 그 정도 고급 필기구를 회의에 내놓을 정도면 먹고살만한 기관이라 보기 때문이다.

간식이나 필기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내 계좌번호를 적는 시간이다. 회의 참석했을 때 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시간이다. 계좌번호 적은 서류를 주최 측 담당자에게 건네기 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서류를 보며 계좌번호를 들릴 듯 말 듯 읊조린다. 심지어 서류를 담당자에게 건네는 도중에 "잠깐만요!" 말한 뒤, 계좌번호 적은 부분을 다시 본다. 사실 불필요하다. 설령 내가 틀리게 적었더라도 주최 측이 계좌이체하다가 오류를 발견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굳이 계좌번호를 바르게 적었는지 두세 번 확인한다. 이 절실함이라니.

그렇다면 회의할 때 나는 무엇에 주안점을 두는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회의라면, 나는 대체로 악역을 맡는다. 다른 참석자가 의견 내놓을 때마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 "거기에 드는 돈은 어떻게 하지요?" "그걸 과연 누가 맡아야 할까요?" "구체적인 효과가 뭔가요?" "일정 상,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나요?"

내 생각엔 가장 중요한 네 가지다. 돈, 사람, 결과, 시간. 바꿔 말하면 예산, 인력, 효과, 기한이다. 아이디어 회의라고 하니까 참석자들 대부분은 '무엇을 어떻게 할까'에만 집중한다. 이런 질문은 던지지 않는다. '얼마를 가지고 누가 언제까지 어떤 성과를 낼까?' 회의 주최 측이 공공기관이나 정부 부처라면, 여기에 규정이나 법령에 관한 질문을 더한다. "이게 규정이나 법령 상 가능할까요?"

목표를 이루기 위한 물적, 인적, 시간적 자원을 고려해야 한다. 목표를 이루면 누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손해 보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을지, 미리 생각해둬야 한다. 회의에서 내가 던지는 저런 질문들은, 사실 주최 측이 던지고 싶어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참석자들에게 차마 던지지 못한다. 그런 질문을 내가 대신해주는 셈이니, 주최 측은 나를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회의에 또 불러준다. 고마운 일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기쁨'이다.

모든 회의의 목표는 무엇일까? 내 생각엔, 정해진 시간보다 10분에서 30분 정도 일찍 끝내는 것이다. 회의가 짧아지느냐 길어지느냐는 다음 네 가지에 달렸다. 첫째, 주최 측의 준비와 회의 담당 실무자의 능력. 둘째, 회의 참석자들의 능력과 성향과 태도. 셋째, 진행자, 그러니까 임시로 정한 위원장의 능력. 넷째, 회의를 빨리 마치고야 말겠다는 하나 된 뜻.

이 네 가지가 잘 맞아떨어지면 거의 모든 회의는 1시간 안에, 심지어 30분이나 40분 안에도 마칠 수 있다. 다행히 최근 내가 참석한 모든 회의는 1시간 안팎으로 마쳤다. 수고비는 2시간 기준으로 받으니 이득이다. 인생은 짧은 데 회의가 길어서야 되겠는가. 회의는 짧고 인생은 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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