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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3백년 뒤를 본다"는 고 민병갈 원장의 나무사랑, 한국사랑

[취재파일] "3백년 뒤를 본다"는 고 민병갈 원장의 나무사랑, 한국사랑

이용식 기자 yslee@sbs.co.kr

작성 2021.06.24 07: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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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크보다 김치와 고추장이 입에 잘 맞고, 침대보다 온돌을 좋아했던 귀화 한국인이 있다.

50년 전 척박했던 충남 태안 천리포 해안에 나무를 심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 중 하나로 가꾼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미국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지만 "내 전생은 한국인"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 그는 천리포수목원 설립자 고 민병갈 원장이다.

한국이 좋아 나무를 심고, 나무가 좋아 나무와 결혼을 했다는 고 민병갈 원장의 땀방울과 숨결이 수목원의 나무와 꽃은 물론 흙과 물, 공기에 오롯이 담겨 있다. 1921년생인 민 원장은 만 50세인 1971년에 천리포수목원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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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은 민 원장 탄생 100주년이자 천리포수목원 설립 50주년을 맞는 해다. 지난 21일 민 원장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민병갈 식물도서관'이 천리포수목원 힐링센터 1층에 문을 열었다.

[취재파일] '3백년 뒤를 본다
1백52㎡ 규모에 보존서고, 식물전문서고, 열람 공간을 마련했다. 고 민병갈 원장의 평생 손때가 묻은 귀중한 도서 3천4백여 권을 포함해 보유 장서는 1만 7천여 권이다. 식물관리일지에는 수목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처음 2년간은 민 원장이 직접 썼고, 그 다음엔 직원들이 이어받아 30여 년간 기록했다. 날짜별로 나무 종류와 생장 기록을 적었고 나무 심은 장소는 찾기 쉽게 그림을 그려 표시했으며 병든 나무는 병력까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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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원의 1호 식물은 후박나무다. 민 원장이 1970년 전남 완도군에서 1년생 어린 묘목을 가져와 심었다. 잎이 넓은 상록 활엽수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울창한 가지에 사시사철 푸른 잎이 넓은 그늘을 만들었다. 수목원의 터줏대감이다. 수액이 달콤해 후박나무가 많은 울릉도에서는 수액을 졸여서 후박엿을 만들었다고 한다. 수액 채취를 금지하면서 호박을 이용한 호박엿으로 대체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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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민병갈 원장은 1962년 1.5ha(14,850㎡)의 땅 매입을 시작으로 10여 년 뒤 1971년 천리포수목원을 설립했다. 현재 수목원 면적은 59만여㎡, 축구장 80여 개 크기다. 지난 5월 기준 이곳에서 1만 6천939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가장 자랑할만한 나무는 자연교잡종 '완도호랑가시나무'다. 1978년 민 원장과 직원들이 완도로 식물 탐사를 갔다가 처음 발견했고, 서식지의 이름을 따 '완도호랑가시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리포수목원의 또 하나의 자랑은 목련이다. 붉은 자줏빛 목련인 '벌컨'을 비롯해 다른 목련보다 일찍 눈송이 같은 하얀 꽃을 피우는 '얼리버드', 자줏빛 꽃송이가 와인잔을 닮은 '라즈베리아이스' 등 무려 8백71종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품종을 보유한 곳이다. 목련 사랑이 남달랐던 민 원장은 지난 2천2년 별세한 뒤 흰 꽃잎이 손바닥만 하게 크고 우아한 태산목 '리틀젬'아래에 영원히 잠들었다.

도서관에서는 민 원장이 6·25전쟁 직후부터 1970년까지 서울과 부산 등 전국을 다니면서 직접 찍은 사진도 볼 수 있다. 도심거리를 행진하는 군인들과 부산항 언덕길을 오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포함해 당시 한국인의 생활을 생생하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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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공부를 하기 위해 민 원장이 수집했던 귀중본 서적 중에는 1805년 영국에서 출판된 'The Practical Gardener'가 있는데 보유한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서적이다. 또 1937년 출간된 '조선식물향명집'은 한국 최초로 외국 식물명을 한글 식물 이름으로 정리한 값진 책이다.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식물도감 초판본 '한국식물도감 하권 초본부', 그리고 1936년에 지리산, 금강산, 제주도 등지의 식물을 세밀화로 그려 1천 권 한정판으로 펴낸 'Flowers and Folk-lore from far Korea'도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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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해군 일본어 통역장교였던 민 원장은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인천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한국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 뒤 재입국해 은행과 증권 등 금융회사에 근무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수목원을 가꾸는데 일생을 바쳤다.

식물을 사랑한 민 원장의 외길 인생은 값진 열매를 맺었다. 천리포 수목원은 지난 2000년 4월 10일 국제수목학회로부터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됐다. 아시아 최초다. 별세하기 한 달 전 2002년 3월 11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천리포수목원에 가면 부드럽고 따뜻한 얼굴을 한 고 민병갈 원장의 좌상을 만날 수 있다. 수령 50년가량 된 '버들잎참나무' 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버들잎참나무는 민 원장이 1974년 4월 미국에서 씨앗을 들여와 심은 건데 반세기 만에 지름 1m, 키가 40여m 가량 되는 아름드리 거목이 됐다.

[취재파일] '3백년 뒤를 본다
​"나는 3백년 뒤를 보고 수목원 사업을 시작했다. 나의 미완성 사업이 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이어져 내가 제 2의 조국으로 삼은 우리나라에 값진 선물로 남기를 바란다."

민병갈 원장이 생전에 남긴 말이다. 민 원장의 유언처럼 천리포수목원은 2009년 산림청으로부터 수목원 전문가 교육과정 인증을 받았고, 2010년에는 국내 수목원으로는 유일하게 농어촌공사로부터 관광명소의 하나로 선정됐다. 지금도 수많은 관람객의 발길이 사계절 내내 이어지고 있고, 천리포 수목원이 배출한 인재들이 전국 각지의 수목원으로 퍼져 민 원장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2271년은 수목원 설립 3백년이 되는 해다. 민 원장의 기대와 소망이 어긋나지 않게 천리포수목원은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관광명소로 우뚝 서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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