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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통일은 이제 시작됐다. 더는 멈출 수 없다"…기회를 잡은 콜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통일은 이제 시작됐다. 더는 멈출 수 없다"…기회를 잡은 콜

우리는 통일에 준비돼있는가

안정식 북한전문기자 cs7922@sbs.co.kr

작성 2021.06.16 09:25 수정 2021.06.16 15:0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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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이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당시 동독은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많은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등 위기를 맞고 있었지만, 서독과 동독이 한 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 주변국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 상태였고, 독일의 주권 또한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2차 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독일 내에서도 통일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한 주요 요인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천금같이 다가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당시 서독 총리 콜의 리더십과 서독 국민들의 지지입니다.

안정식 취파-독일 통일

콜, 통일의 기회를 잡다

1989년 중후반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과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서독은 통일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동독이 혼란해지는 상황에서 동독 내부가 폭력적 상황이나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게 유도하는 것이 서독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하지만 동독 내의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는 단계로 발전하자, 콜 정부는 동독의 안정과 개혁이 아니라 동독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대동독 정책의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서독은 동독에 경제 지원을 해주는 대신, 동독 정부가 정치범 석방과 자유선거 수용, 비판 야당의 인정 등 정치 개혁에 나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콜 정부는 11월 28일 연방의회에 '독일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방안'을 제출하면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10개항 방안'의 핵심은 동독이 제안한 조약공동체를 우선 구성한 뒤 국가연합을 거쳐 최종적으로 연방통일국가로 간다는 것으로, 독일이 통일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겠다고 선언한 조치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콜 총리는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통일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0개항'이 발표될 때까지만 해도 콜은 통일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콜은 회고록에서 이 당시 독일 통일이 3년이나 4년 뒤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적었지만, 이 무렵 콜이 했던 여러 언급들을 보면 통일까지 5년 내지 10년이라는 긴 기간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통일의 분위기는 조성되고 있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전망도 여전히 불투명했습니다.

1990년으로 해가 바뀌는 국면에서 콜 총리는 다시 한번 방향을 전환합니다. 독일 통일까지 수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빠른 시간 내에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것입니다. 콜은 이 당시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고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드레스덴 방문 거치며 급속한 통일로 방향 전환

콜의 방향 전환에 영향을 미친 주요한 사건은 1989년 12월 19일 드레스덴 방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고 2만 5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곳으로 전쟁의 아픔을 안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콜은 이 방문에서 동독 국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습니다. 콜은 회고록에서 독일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경험한 핵심 체험이 드레스덴 방문이었으며, 동독 국민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는지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12월 19일 저녁 수행원들을 드레스덴의 호텔방에 부른 자리에서 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통일은 이제 시작됐다. 더는 멈출 수 없다."

드레스덴 방문만으로 콜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무렵을 거치면서 콜이 급속한 통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콜은 1990년 1월 중순 동독 정부와 약속했던 조약공동체 구성 약속을 보류시키면서, 빠른 시간 내에 동독의 권력 교체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가 이뤄질 때까지, 동독 모드로(당시 동독의 총리) 정부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모든 조치를 중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콜은 동독의 선거를 그냥 지켜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콜의 기민당은 동독 지역의 정치적 동반자로 동독 기민당 중심의 '독일동맹'을 결성하게 한 뒤 선거에 개입해 승리했습니다.

콜은 특히 선거 직전에 동독 주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1:1 비율의 동서독 화폐 교환 비율을 발표함으로써 '독일동맹'이 48%의 지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습니다. 콜이 통일 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지만, 콜의 승리가 빠른 독일 통일에 기여한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경제 현실에 맞지 않는 1:1 비율의 화폐 교환으로 독일은 상당한 후유증을 겪었는데, 콜른 회고록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의 자신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습니다.
 
"통일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지만, 그것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달리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을 뒤로 미뤘을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대가(결국 그것은 경제적 대가이기도 하다)는 통일을 서두름으로써 지게 된 재정적 부담보다 훨씬 큰 짐을 지워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개방될 때에도 불과 11개월 뒤 일어날 통일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 상황은 유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콜은 예상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통일의 기회가 다가온다고 생각되자 지체하지 않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통일을 추진했더라면 독일 통일의 후유증이 작지 않았겠느냐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끄는 사이에도 과연 통일 열차가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겠느냐는 비판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안정식 취파-독일 통일

콜의 통일 정책 지지해준 서독 국민들

독일 통일 국면에서 콜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콜의 리더십이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서독 국민들이 콜의 통일 정책을 전반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독 내에 반대의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민당과 녹색당 등 야당들과 좌파 지식인들은 동독의 개혁을 바라면서도 동독의 존속을 주장했고, 독일의 미래는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형태가 아닌 국가연합 형태의 결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콜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며 이러한 이견들을 극복해갔고, 서독 국민들은 콜의 정책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만약 서독 국민들이 당장의 부담이 될 수 있는 통일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면 아무리 콜이 리더십을 발휘했더라도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통일이라는 '기회의 창'이 열렸을 때 통일의 성패를 가를 결정적인 요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통일 의지에 있습니다. 그러한 국면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통일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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