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 주변국들이 통일을 원하지 않는 상태였고, 독일의 주권 또한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2차 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독일 내에서도 통일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통일을 가능하게 한 주요 요인 중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천금같이 다가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당시 서독 총리 콜의 리더십과 서독 국민들의 지지입니다.
콜, 통일의 기회를 잡다
하지만 동독 내의 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개방되는 단계로 발전하자, 콜 정부는 동독의 안정과 개혁이 아니라 동독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쪽으로 대동독 정책의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합니다. 서독은 동독에 경제 지원을 해주는 대신, 동독 정부가 정치범 석방과 자유선거 수용, 비판 야당의 인정 등 정치 개혁에 나설 것을 촉구했습니다.
콜 정부는 11월 28일 연방의회에 '독일과 유럽의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방안'을 제출하면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10개항 방안'의 핵심은 동독이 제안한 조약공동체를 우선 구성한 뒤 국가연합을 거쳐 최종적으로 연방통일국가로 간다는 것으로, 독일이 통일에 대한 주도권을 가지겠다고 선언한 조치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통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콜 총리는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통일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0개항'이 발표될 때까지만 해도 콜은 통일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콜은 회고록에서 이 당시 독일 통일이 3년이나 4년 뒤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적었지만, 이 무렵 콜이 했던 여러 언급들을 보면 통일까지 5년 내지 10년이라는 긴 기간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 통일의 분위기는 조성되고 있었지만,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전망도 여전히 불투명했습니다.
1990년으로 해가 바뀌는 국면에서 콜 총리는 다시 한번 방향을 전환합니다. 독일 통일까지 수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빠른 시간 내에 통일을 추진하기로 한 것입니다. 콜은 이 당시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가 예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고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드레스덴 방문 거치며 급속한 통일로 방향 전환
"통일은 이제 시작됐다. 더는 멈출 수 없다."
드레스덴 방문만으로 콜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이 무렵을 거치면서 콜이 급속한 통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콜은 1990년 1월 중순 동독 정부와 약속했던 조약공동체 구성 약속을 보류시키면서, 빠른 시간 내에 동독의 권력 교체를 추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가 이뤄질 때까지, 동독 모드로(당시 동독의 총리) 정부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모든 조치를 중단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콜은 동독의 선거를 그냥 지켜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개입했습니다. 콜의 기민당은 동독 지역의 정치적 동반자로 동독 기민당 중심의 '독일동맹'을 결성하게 한 뒤 선거에 개입해 승리했습니다.
콜은 특히 선거 직전에 동독 주민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1:1 비율의 동서독 화폐 교환 비율을 발표함으로써 '독일동맹'이 48%의 지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습니다. 콜이 통일 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지만, 콜의 승리가 빠른 독일 통일에 기여한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경제 현실에 맞지 않는 1:1 비율의 화폐 교환으로 독일은 상당한 후유증을 겪었는데, 콜른 회고록에서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의 자신의 결정을 다음과 같이 옹호했습니다.
"통일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지만, 그것을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달리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통일을 뒤로 미뤘을 경우 그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적 대가(결국 그것은 경제적 대가이기도 하다)는 통일을 서두름으로써 지게 된 재정적 부담보다 훨씬 큰 짐을 지워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베를린 장벽이 개방될 때에도 불과 11개월 뒤 일어날 통일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 상황은 유동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콜은 예상보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통일의 기회가 다가온다고 생각되자 지체하지 않고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좀 더 시간을 가지고 통일을 추진했더라면 독일 통일의 후유증이 작지 않았겠느냐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을 끄는 사이에도 과연 통일 열차가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겠느냐는 비판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콜의 통일 정책 지지해준 서독 국민들
하지만 콜은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며 이러한 이견들을 극복해갔고, 서독 국민들은 콜의 정책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만약 서독 국민들이 당장의 부담이 될 수 있는 통일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면 아무리 콜이 리더십을 발휘했더라도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통일이라는 '기회의 창'이 열렸을 때 통일의 성패를 가를 결정적인 요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통일 의지에 있습니다. 그러한 국면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통일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