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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아니어도 괜찮아…'GV빌런 고태경' [북적북적]

오케이 아니어도 괜찮아…'GV빌런 고태경' [북적북적]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21.06.06 08:06 수정 2021.06.07 11:4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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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94 : 오케이 아니어도 괜찮아...'GV빌런 고태경'
 
고태경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반반 하자."
"네?"
 
고태경은 마치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반반 하자는 듯이 툭 말했다.
 
"자네도 살아야지. 어떻게 다 자네 책임이야. 반반 해. 상황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잖아. 네 탓만 하지 말고 세상 탓도 절반 하자고."
 
고태경에게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을 줄은 더욱 몰랐다.
 
"비싼 수업료 치른 거로 생각해. 실패도 못 해본 사람들이 수두룩해. 실패에 자부심을 가져."

영화관에 마지막으로 갔던 게 언제였나요? 저는 작년 8월이었습니다. 마스크 쓰고 조심하면서 갔는데 관객이 거의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코로나 탓에, 그보다 앞서 넷플릭스를 위시한 OTT가 많아지면서 영화 보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더불어 온라인 GV도 많아졌죠.
 
GV는 많이들 아시다시피 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말합니다. 감독이나 주연 배우가 나와 관객을 상대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죠. 그리고 '빌런', 이 말 종종 들어보셨죠. Villain, 주로 히어로물의 악당을 가리키는 말인데 일상에서도 악당 같은 짓을 하는 이를 '빌런'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GV와 빌런의 만남, 오늘 북적북적의 책은, 정대건 작가의 <GV빌런 고태경>입니다.
 
정 작가는 사실은 영화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다큐멘터리 한 편과 극영화 두 편을 연출한 경력이 있는 반면, 소설은 이번이 첫 작품이었으니까요. 이력을 알고 보니 자기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재로, 정말 잘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얼마간 작가의 모습이 반영됐을 듯한,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독립 장편영화까지 만들어 개봉했던 신예 감독 조혜나입니다. 그리고 이 조 감독이 어쩌다 참석하게 됐던 GV에서 처음 맞닥뜨린 빌런이 고태경, 공동 주연이라고 해도 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입니다.(소설 제목도 GV 빌런 고태경.)
 
관객과의 대화에 등장해서 분위기를 흐리는 GV 빌런은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
 
"우선 영화 잘 봤습니다."
느릿하면서도 묵직하고 울림 있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
 
"두 번째 영화 <히치하이킹> 말인데요. 콘티는 그리고 촬영했습니까? 콘티 없이 찍은 것 같은데요?"
공격적인 어조는 아니었지만, 질문의 내용은 나를 날카롭게 찔렀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종현과 시선을 교환했다. 관객석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GV 빌런의 등장이었다.
...
 
"컷들이 튀지 않습니까. 시선도 안 맞고. 남녀 주인공이 공원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 180도 라인은 일부러 넘긴 건가요? 왜 편집에서 그대로 남겨뒀죠?"
...
 
유튜브 영상은 인터넷에서 꽤 화제가 됐다. 그렇게까지 많이 볼 영상이 아닌데 짤방으로 캡처되어 영화 커뮤니티와 SNS에 돌아다니면서 유튜브 조회수는 하룻밤 만에- 내 영화 관객수의 세 배가 넘는- 3천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GV 빌런에 대한 전설적인 소문과 증언들이 인터넷에 속출했다.

어쩌다 참석한 GV에서 전설의 GV 빌런을 만나게 된 조 감독. 그런데 이 빌런의 정체를 알고 나서 크게 놀랍니다.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이끌어 준 인생 영화 <초록 사과>의 조감독이 그 빌런이었다니! 어떤 사연이 있기에 50대에 접어든 나이에 (아직까지) GV 빌런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 조 감독은 그, 고태경을 주인공으로 한 빌런 다큐를 찍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설득에 나서는데... 여러 모로 고민이 깊어갑니다.
 
GV 빌런, 프레임 밖에 있던 그에게 카메라가 돌아가면 어떨지 재미있겠다. 그 혹은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더라도 낄낄거릴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화끈해지도록 일침을 가하고 싶었다. 그 덕에 극장까지 청정해진다면 더 좋고. 모처럼 새로운 일을 도모할 때의 에너지가 샘솟았다.
...
 
"난 진짜 궁금해서 그래.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데, 세상의 인정조차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을 왜 계속해나가겠어? 보상심리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런 삶을 응원할 수 있어, 너?"
 
나는 윤미의 그 질문이 고태경에게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르페 디엠이니, 욜로니, 그렇게 살고 싶어도 감독 지망생뿐만 아니라 입시생들이, 취준생들이, 모든 청춘들이 유예된 삶을 살고 있다. 그중에서도 영화는 더더욱 기약도 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일이다.
...
 
나는 고태경과 나를 동일시하는 동시에 고태경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인생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이, 20년 넘게 자기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는 초보 감독. 조 감독(조혜나)이 <초록 사과> 조감독(고태경)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를 찍고 있으며 20년의 시차는 있으나 둘 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고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 이 둘은 공통점이 매우 많습니다. 조감독(고태경)은 조 감독(조혜나)의 어쩌면 암울한 미래일 수 있다는 것이죠.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다큐는 완성되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의 GV에 참석한 GV빌런이, 정작 자기는 묻지 못하고 질문을 답해야 하는 장면은 어쩌면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은 좀은 우울할 수도 있는 상황을 시종 경쾌한 문체로 이어갑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부터 토렌트라든가 최근 트렌드를 잘 반영해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황당하거나 껑충 널 뛰는 극단적인 전개 없이, 편안하게 매듭짓습니다. 아마 본인이 감독이기도 한 작가가, 시나리오 쓰듯 소설을 써서 그랬을까요? 소설을 다 읽고 나니 2시간짜리 잘 만든 장편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습니다.
 
꿈을 좇는 이들, 주로 청춘을 응원하거나 격려하거나 조언하는 말과 글에 요즘은 영상까지 넘쳐납니다. 이들이 갖지 못한 걸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기성세대가, '나 때는 더 힘들었어', '아프니까 청춘이야' 하는 식으로 던지는 위로는 좀 그렇죠.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세상 탓, 네 탓을 절반씩 하자는 고태경식 위로,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꿈을 향해 노력하고 있고 세 번의 큰 좌절을 맛보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성실하게 준비하는 고태경의 삶은, 누구에겐 비웃음거리일 수도 있지만 뜻밖에도 위로엔 '효과가 있'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작품 완성하려고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지? 그런 거 아무나 못해. 난 말이야, 이제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무릎 꿇는 거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부끄러운 건 기회 앞에서 도망치는 거야."
 
고태경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출판사 은행나무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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