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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당신의 질투는 선한 가요, 악한 가요

이보영│전 요리사, 현 핀란드 칼럼리스트 (radahh@gmail.com)

[인-잇] 당신의 질투는 선한 가요, 악한 가요
"뛰어난 분들을 시기, 질투하는 게 내 재능입니다"

최근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이승윤은 처음 등장할 때부터 스스로를 질투심에 '배 아픈 가수'로 칭해 눈길을 끌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핀란드 사람들을 떠올렸다. 핀란드 사람들 또한 자칭타칭 '질투심 많은 사람들'로 불리기 때문이다. 역사적 맥락을 살펴 보면 핀란드는 과거에 다른 유럽 국가와 달리 신분 계급이 뚜렷하게 나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왕국이었던 적이 없었다. 귀족 계급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차례 식민 지배를 받을 때 핀란드인들은 그저 같은 피정복민일 뿐이었다. 모두 가난하고 비천했지만 적어도 그들 사이는 평등했다. 이런 평등한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는 '평등'(핀어: tasa-arvo)이다. 이 단어는 오늘날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이다. 경제적으로 누진세 등 빈부 격차를 줄여주는 사회 복지국가의 여러 장치 덕분에 소득 불균형이 심하지 않고, 사회 구조도 수평적이다. 직장에서 갑질하는 상사 역시 찾아보기 힘든데 '갑질'이라는 단어조차 핀란드에는 없다.

이렇게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이지만 거꾸로 그로 인해 취약한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점이다. 핀란드를 방문한 한국 사람들은, 상점 점원이나 호텔 카운터 직원이 화난 표정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그러나 이들은 화난 게 아니라 추운 나라 사람이라 표정에 많은 변화가 없는 것이고, 손님과 자신이 기본적으로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작정 낮추며 과잉 친절을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핀란드를 포함해 북유럽 사람들은 대체로 평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북유럽의 공통된 행동 강령으로 '얀테의 법칙(Law of Jante)'이라는 것이 있다. 만일 북유럽 사람을 만나서 '얀테의 법칙'을 안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놀랄 것이다. 은밀한 자신들의 내면을 들켰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우리들보다 더 괜찮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우리보다 더 훌륭하다고 상상하지 마라/ 당신이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우리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를 비웃지 마라/ 누가 당신을 돌봐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핀란드에선 '행운을 숨겨라'는 속담이 있다. 행운을 주변에 알리면 누군가가 빼앗을 것으로 생각해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로또 당첨자가 주변에 당첨 사실을 알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변의 시샘과 질투를 받지 않으려면 '얀테의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에 하루는 어쩔 수 없이 '행운'이 만천하에 드러나야 하는 날이 있다. 매년 11월 1일, 핀란드 국세청은 모든 국민의 한해 수입을 전격 공개한다. 이날 모든 뉴스의 헤드라인은 최상위 소득자 리스트와 유명인의 수입 내역으로 도배된다. 당초 이 제도의 취지가 질투를 부추기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지하 경제와 세금 포탈을 막아 투명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생긴 제도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날은 핀란드 사람들이 가장 질투감에 불타오르는 날이 되었다. 그래서 '국민 질투의 날'로 불리기도 한다.

2020년 국세청이 발표한 핀란드 최고 소득자, 핀란드 게임업체 '슈퍼셀' 최고 경영자(CEO) 일카 파나넨.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면 이웃과 친지의 수입까지 직접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의 수입이 씀씀이와 차이가 난다고 판단되면 세금 포탈 신고를 서슴지 않는다. '설마 이웃을 그렇게 쉽게 신고할까…..' 싶어 언젠가 핀란드 국세청을 방문했을 때 물어보았다. 그런데 직원이 "이웃이나 지인의 수입을 묻는 문의가 많고, 세금 포탈 조사 요구도 많다"고 대답하는게 아닌가. 고발정신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고 질투 어린 행동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핀란드에서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기 이름과 사는 동네를 남에게 쉽게 알려주지 마라'는 얘기가 있다. 이런 간단한 정보만으로도 수입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얀테의 법칙' 마지막 항을 기억하는가? '당신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의 수입은 공개된 비밀이다! 이런 수입 공개 전통은 1700년대 스웨덴에서 처음 시작됐으며 당시 스웨덴의 식민지였던 핀란드와 노르웨이도 같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개인의 수입을 다 공개하는 나라는 북유럽 외에 거의 없다. 2008년 이탈리아 재무부 장관이 세금 포탈을 줄여보려 모든 국민의 수입을 전격 공개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 사생활 침해로 인정돼 해당 정보가 몽땅 비공개로 전환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행복의 정복』이란 저서에서 행복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질투를 꼽았다. 그러나 2011년, 네덜란드 틸스부르흐 대학교 닐스 판데 벤(Niels van de Ven) 교수는 질투가 부정적 감정만은 아니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논문을 발표해 주목받았다.

그는 질투를 '선한 질투'와 '악한 질투'로 구분했다. 구분 기준은 질투하는 대상의 '자격 여부'다. '악한 질투'는 인맥이나 연고, 혹은 정당치 못한 방법을 통해 지위나 재물을 얻는 사람을 볼 때 생기며, 동경만은 아닌 '비아냥거림'이 함께 섞여 있는 감정이다. 이에 비해 '선한 질투'는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대상이 정당한 방법으로 결과물을 취득한 것을 바라볼 때 생기는 감정이다. 스포츠 선수들이 선의의 라이벌과 경쟁을 통해 좋은 성적을 내듯, '선한 질투'는 우리를 독려하고 자기 계발의 동기를 부여한다.

이승윤은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 뒤 TV 인터뷰에서 "자신은 여전히 배 아픈 가수이며 질투는 창작자에게 감사한 요소"라며 질투가 성장의 원동력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핀란드 사람들의 질투심 또한 이런 구분법에 의하면 누구나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평등 사회에 뿌리를 둔 '선한 질투' 쪽에 가깝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선한 질투심은 한 '무명 가수'를 '유명 가수'로, 북쪽 변방의 춥고 어두운 나라를 '가장 행복한 나라'로 만든 힘이었는지 모른다.
인잇 이보영 네임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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