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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삼성 저승사자'는 왜 소득주도성장 비판에 나섰나

-원승연 전 금감원 부원장 인터뷰

2018년 5월, 원승연 당시 금융감독원 자본시장 담당 부원장은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혐의와 관련해 브리핑을 열고 설명했다. 금감원은 2018년 5월 1일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회계처리를 위반했다고 잠정 결론 내렸고 이런 내용을 담은 조치사전통지서를 삼성 측에 전달했다. 금감원이 사전통지서 전달 사실을 공개하자 삼성바이오는 크게 항의했다. 원승연 당시 부원장은 "시장에 가장 영향이 적고 투자자를 보호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공개한 것"이라고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금감원이 조치를 전달하자 삼성 수뇌부는 며칠 뒤인 5월 5일 '어린이날 회의'를 연다. 이 회의에서 분식회계와 관련된 증거 인멸을 모의했다는 게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났다.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 수사의 시작점에는 금감원의 강경한 조치가 있었다.

원승연 리사이징

당시는 전임 김기식 금감원장이 '셀프 후원' 의혹으로 18일 만에 사퇴했고, 후임 윤석헌 금감원장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원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금융감독원은 최대 이슈였던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사건을 조치했고, 그 중심에는 원승연 부원장이 있었다. 이 일로 원 부원장은 삼성 등 업계의 반발을 샀을 뿐 아니라 금융위와도 갈등을 빚었다. 사전통지서 공개를 금융위와 협의 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질러'버렸고, 그 후에도 자본시장 특사경 설립 등 금감원의 독립성을 이끌어내려다 금융위와 갈등을 빚었다. 금융위는 몇차례 원 부원장의 유임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0년 8월 원 부원장은 2년 7개월을 끝으로 퇴임해 학계로 돌아갔다.

3년이 지난 2021년 5월 14일, 서울사회경제연구소에서 진보 경제학자들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 중 한명은 원승연 교수였다. 원 교수는 소득주도성장을 설계한 홍장표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번 정부의 경제정책을 이끌어간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함께 공부해 가까운 사이다. 이번 정부의 감독당국 책임자로 몸담았던 원 교수는 왜 같은 이념을 가지고 함께 공부했던 이들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나섰을까. 6월 1일 명지대 연구실에서 원 교수를 만나 인터뷰했다.

원승연

-소득주도성장이 왜 잘못된 정책이라고 봤나.
 
소득주도성장의 내용 자체는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이 있다. 분배의 불평등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늘리려는 방향성은 옳다. 하지만 거기에 '성장 담론'을 연결시키는 바람에 잘못됐다는 거다. 경제 흐름이 피가 돌 듯 잘돌아야하는데 지금 한국 사회는 불평등과 불공정으로 흐름이 막혀있다. 그런 부분을 뚫어주는 것이 정부 역할인데, 그걸 뚫는다고 1~2년새 바로 경제성장률이 몇% 오르고, GDP가 오르지 않는다. 임금소득을 높이면 경제가 성장한다는 '소득주도성장'은 그래서 정치 슬로건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정부가 성장에 얽매이지 말고, 장기적으로 불평등을 개선하는 정책을 밀고 나가라는 뜻에서 공동연구를 통해 목소리를 내게 됐다.

-성장 담론을 버리는 게 가능한 일인가? 페달 밟기를 멈추면 경제가 쓰러지지 않을까? 맞는 방향이라 하더라도 집권하려는 정치 세력이 성장론을 내세우지 않는게 가능한가? 실제 소득주도성장은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한 문재인 캠프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성장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물론 쉽지 않다.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할 때부터 몇 년간 몇 퍼센트 성장하겠다는 목표에 매달려왔고, 그 수치에 익숙해져있다. 하지만 미국 바이든 정부도 성장을 얘기하지만 성장률을 몇 퍼센트로 목표로 잡진 않는다. 어떤 부분을 개선하겠다는 걸 목표로 내걸 뿐. 예전처럼 인구가 늘어나고 기업 투자도 많이 해서 정부가 정책을 통해 고용도 크게 늘릴 수 있던 양적 성장이 가능한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생산성을 높여야 성장이 가능한데, 이건 사회안전망을 갖추면서 천천히 먼 미래를 보고 해 나가야 한다. 성장률이 떨어졌다는 압력을 견뎌내고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번 정부가 1, 2년만 보고 정책의 방향성을 바꾸려고 하는게 문제다. 성장률에 목메는 건 이번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긴 하다.

-'최저임금 1만 원'을 목표로 삼은 것도 비판했는데.
 
최저임금을 올리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급하게 올리려고 했던 '속도'가 문제다. 사람들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고 준비를 할 수 있게 만들어서 자영업자들의 충격을 완화해야 했다. 최저임금을 인상할 때 속도를 조절하면서 일자리가 축소되지 않도록 근로장려금을 확대하는 등 다른 정책으로 보완을 해야했다. 이제 예전과 달리 민간 영역이 커졌기 때문에, 정부가 경제정책을 강하게 추진해도 정부 의사대로 되지 않는다.

-한국형 뉴딜, 일자리 80만 개 창출 같은 경제정책도 부정적으로 봤다. 관(官)이 주도하는 산업정책을 폐기한다고 발표했는데, 시장의 자율에 맡기자는 건가?
 
정부 역할은 공정한 시장 질서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의 공적 기능에 잘못된 게 너무 많다. 이미 경제가 성장해서 시장을 무시할 수가 없고 존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옛날처럼 경제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하면 백전백패다. 정부가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개입 방식을 달리해야 한다. 예전에는 정부가 중화학공업 등 4대 산업 육성한다면서 산업정책을 주도했다. 지금은 대기업이 이미 그런 걸 잘하기 때문에 정부가 먼저 지정해주는게 큰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부의 한국형 뉴딜을 지적한 거다. 정부가 친환경, 전기차 등 육성할 산업을 정하는게 아니라 인프라를 깔아주거나 인센티브를 주는 식으로 되어야 한다.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지금 사람들이 부동산 때문에 화나는 건 갑자기 세금을 올리고, 갑자기 정책이 변하는 것 때문이다. 사람들한테 5년, 10년의 플랜을 주는게 중요한데 정부가 지금 당장을 모면하려 하다가 문제가 생긴 거다. 소탐대실이라고 본다. 시장과 민간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은 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살지 않나. 2주택자도 다 이유가 있다. 공직자가 아니라면 다주택자를 비판할 이유가 없다. 다주택자도 시스템 안에서 자기 입장에서는 자신의 부를 잘 활용한 거니까 그걸 잘못됐다고 정부가 얘기하면 안 된다. 정부는 시스템을 이제 이렇게 바꿉시다라고 얘기해야 부드럽게 정책이 진행되고 부작용도 적다.

-김상조 전 정책실장, 홍장표 전 경제수석과 함께 '학현학파'로 분류되는데 실제로 인연이 깊은지?
 
1980년대에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공부할 때, 한국 경제가 어떻게 해야 민주화되고 개발독재시대의 문제점을 극복할까 고민을 했었다. 당시에는 미국 유학을 안 가고 서울대에서 박사까지 공부를 하면서 한국 경제를 공부해야 되겠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렇게 같이 공부한 게 김상조 전 정책실장(원 교수의 2년 선배)과 홍장표 경제수석(4년 선배)이다. 소득주도성장을 설계할 때 나는 문재인 캠프에 참여도 하지 않았고 안식년이라 쉬고 있어서 관여는 하지 않았다. 소득 분배로 불평등 구조를 없애고 이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그게 바로 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에는 동의를 못해서 꾸준히 홍장표 수석 등에게 사적으로도 지적해 온 바 있다.

-언론에서는 이번 정부 경제정책 설계에 '학현학파'가 깊이 관여했다고 보는데, 학현학파가 실체가 있는 것인지.
 
학현학파는 변형윤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제자들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내부에서 서로 다른 견해도 있고,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다만 경제에서 분배의 중요성, 경제 민주화에 대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공통점은 있다. 그걸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하느냐의 방법론은 학자마다 각각 다르다. 학파라고 하면 공통된 이론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전통이 있는 건 아니어서 학문 집단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원승연

원 교수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공정성과 투명성을 자주 강조했다. 공정하고 투명한 자본시장을 만들면 시장은 스스로 굴러가고, 시민들은 스스로 판단할 것이라고 믿었다. 정부와 기관의 역할은 원칙대로 일관되게 일을 처리하면 된다고 봤다. 학자로서 '원칙'을 말하는 것보다 책임자로서 실행하는 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원승연 교수는 책임과 권한이 있는 직책에 있었을 때 원칙대로 일을 처리했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업계나 관료들의 반발은 컸고,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한국 사회에는 사람의 지위가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같은 편이냐 아니냐에 따라 법과 원칙이 들쭉날쭉하게 적용된다는 의심이 팽배해있다. 원칙주의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다. 강하고 영향력 있는 집단에도 추상같이 대하고, '같은 편'이라도 고언을 망설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원 교수는 자신을 포함한 586세대는 옛날 방식에 젖어 있어 변화가 힘들다고 말한다. 젊은 사람들이 나서서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며, 이제 자신은 후배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도록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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