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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3년이 지났고 죽은 이는 말이 없다

[취재파일] 3년이 지났고 죽은 이는 말이 없다

'비행 중 방사선' 백혈병 걸린 항공승무원 3년 만에 산재 승인

강청완 기자 blue@sbs.co.kr

작성 2021.05.31 08:54 수정 2021.05.31 09:2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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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디스는 천직(天職)이었다. 가냘픈 팔로 무거운 짐가방을 들어 나르는 일도, 이따금 까다로운 손님을 상대하는 일도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정갈한 유니폼을 입고 세계 곳곳을 누비는 일이 그에겐 즐겁고 자랑스러웠다. 지난 2009년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으로 입사한 A 씨의 이야기다.

입사 6년이 지난 2015년, 몸에 이상증세가 찾아왔다. 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건강은 점점 나빠져 갔다. 회사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결국 투병 2년 차인 2017년 초 사표를 냈다. 이듬해인 2018년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서를 접수했다. 승무원 생활로 인한 위해 요인과 특히 북극항로 비행으로 인한 우주방사선 노출이 백혈병 발병과 연관성이 크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다.

승무원 백혈병
산재 심사는 차일피일 미뤄지고 길어졌다. A 씨는 끝내 결과를 들을 수 없었다.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호흡을 이어가던 A 씨는 지난해 5월 숨을 거뒀다. 그로부터 1년이 더 지난 2021년 5월 17일에야, 근로복지공단은 A 씨에 대한 산업재해 판정을 내렸다. 최초 신청으로부터 약 3년, A 씨가 숨진 뒤 1년 만의 일이었다.
 

왜 이리 오래 걸렸나…핵심은 '우주방사선'

항공종사자 백혈병
'처음, 최초'와 같은 타이틀은 당사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늘 어느 만큼의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승자나 강자의 경우가 아닌, 소수와 약자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A 씨는 비행 중 우주(전리)방사선 노출을 주요 발병 원인으로 특정해 산재를 신청한 국내 첫 사례였다. 우주방사선은 그동안 한국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슈였다. 어렵고 생소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지난(至難)한 과정일 수밖에 없었다.

승무원 우주방사선  혈액암
말 그대로 우주에서 날아오는 우주방사선에 항공조종사 또는 승무원이 더 많이 노출되고, 그만큼 방사선으로 인한 질병 발생에 더 취약하다는 건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2015년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항공승무원의 연평균 피폭 방사선량은 약 2.2mSv로 CT나 X-ray 기기를 다루는 의료계 종사자는 물론 원자력발전소 직원 (0.6mSv)보다도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타이완(대만) 노동부 산하 직업안전위생연구소가 '10대 암 질병 노출 직종 보고서'를 통해 암 발생률이 가장 높은 직종 1위로 항공승무원을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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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지난 2019년 처음으로 대규모 연구가 이뤄졌다. 연세대 의대와 서울성모병원 연구팀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관련 조사를 실시했다. 항공운송산업 종사자 5만 9천751명의 암‧백혈병 발병률을 분석한 결과, 여성의 경우 전체 암 발병률이 공무원의 2.27배, 일반 근로자보다는 2.09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종사자는 암 발병률은 낮았지만 유독 백혈병 발병률만 공무원의 1.86배, 일반 근로자보다는 1.77배 높게 나타났다. 백혈병은 특히 우주방사선 노출과 연관성이 큰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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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산재'나 '보상' 같은 단어가 따라붙으면 문제의 성격이 달라진다. 과학적으로 유해하다는 걸 입증하는 것과 개인이 발병과의 연관성을 직접 증명하는 건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폐암 환자의 담배회사 소송 사례다. 흡연이 폐암의 원인이 된다는 건 상식이지만, 대법원은 (담배를 피우던) 폐암 환자들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폐암의 원인은 흡연뿐 아니라 생활환경, 건강 상태, 유전 등으로 다양한데 유독 '흡연으로 인해' 폐암 발생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걸 입증하는 건 매우 어려운 문제기 때문이다. 우주방사선과 백혈병 역시 마찬가지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방사선으로 산재를 인정받는 건 너무나도 어려웠다.
 

느슨했던 정부 규정, 뒤에 숨은 기업

지난 2018년 6월 11일, 언론 보도(한겨레21)로 A 씨의 사연이 처음 알려진 이후 학계와 노동계, 의료계와 국회 등 다양한 영역에서 관심과 노력이 이어졌지만 변화는 더뎠다. 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 다른 나라에 비해 턱없이 느슨한 규정을 고집하는 정부(국토교통부)와 그런 정부에 기대 "규정을 준수하고 있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온 항공사 측 대응도 진전을 더디게 한 걸림돌이었다. 정부의 편의주의와 기업의 이익 앞에 '근로자의 건강권과 알 권리'는 너무 미약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그 사이 A 씨는 숨을 거뒀다. 사망 후 1년이 지나서야 산재가 승인됐다. A 씨의 산재를 심사한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는 "A 씨의 누적 방사선량이 방사선 의료 종사자 등과 비교할 때 낮은 수준으로 볼 수 없고, 비교적 젊은 나이인 31살에 백혈병이 발병한 점 등을 고려할 때 질병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항공사가 기존에 사용하던 방사선 노출량 예측 프로그램에 상당한 오차가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공교롭게 산재 판정 일주일 뒤인 지난 5월 24일, 국토부도 관련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항공승무원의 피폭방사선량 관리기준을 기존의 연간 50mSv에서 연간 6mSv로 낮추고 관련 기록 보관기간도 기존 5년에서 마지막 운항일로부터 30년으로 연장했다. 기본적으로는 다른 나라 기준에 맞춘 것이지만 SBS가 지난 2018년 11월 보도를 통해 지적했던 방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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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 유족 "너무 오래 걸렸다"

승무원 백혈병
산재가 승인되고 제도가 바뀌었지만 A 씨는 끝내 이를 보지 못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A 씨의 죽음이 헛된 것만은 아니다. 당장 A 씨 외에도 같은 이유로, 산재 판정을 기다리는 4명의 전·현직 항공조종사와 승무원들이 더 있다. 노동계에서는 비슷한 산재 신청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산재 신청을 대리한 김승현 노무사는 "(A 씨의 사례를 통해) 저선량의 우주방사선이라도 암(백혈병)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인정됐기 때문에 현재 신청된 건이나 앞으로 유사 사례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A 씨의 사례는 역사적인 선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3년이나 걸렸지만, 한편으론 3년 만에 이렇게 규정이 대폭 바뀐 경우가 매우 드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자력과 우주과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가 얽혔고 거대 항공사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달린 만큼 변화까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란 관측이 많았다. 기자 역시 3년 전 공청회나 토론회를 다니며 이 사안을 취재하고 여러 관계자들을 만났지만 이렇게 변화가 이뤄지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유족에게는 잔인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모두 A 씨가 쏘아 올린 공이다.

그 과정에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도 있었다. 이후에도 관련 연구를 이어간 과학계나 의료계뿐 아니라 국회의 역할도 컸다. 주로 민주당을 중심으로 2018년 이후 매년 국정감사 때마다 문제를 제기하고 공청회나 토론회를 열어 이 이슈가 묻히지 않도록 끊임없이 '새로고침' 하고 정부와 기업이 긴장을 놓지 않게끔 한 분들이 있었다. 기자가 기억하는 선에선 민주당 변재일, 노웅래, 김철민, 박상혁 의원실 등이다.

세상이 나아지는 건 많은 이들의 선의와 연대,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비극과 죽음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A 씨 유족은 인터뷰를 삼갔다. 대신 대리인을 통해 "너무 오래 걸렸다"는 짤막한 소감을 전해왔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고인은 돌아오는 법이 없다. 자신의 일을 사랑했던 만큼, 본인의 아픔을 보상받고 싶어 했던 고인의 명복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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