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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특정 커뮤니티서 '김웅 좋아요'라고 할 때 정치 그만할 것"

[그사람] "특정 커뮤니티서 '김웅 좋아요'라고 할 때 정치 그만할 것"

'수사권 조정 靑 회의', 조국와 김웅의 엇갈린 기억 (※ 조국 인터뷰 포함)

윤춘호(논설위원) 기자 spring84@sbs.co.kr

작성 2021.05.29 09:08 수정 2021.05.29 15:1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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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인 김웅은 검경 수사권 조정이 낳은 아들이고 이 사람의 산파역을 맡은 사람은 조국 전 민정수석이다. 조국이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밀어붙일 때 이 사람은 대검찰청 형사정책단장으로 검찰측 실무 책임자였다. 김웅은 검찰의 힘을 빼고 경찰의 힘을 강화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집요하고 격렬하게 반대했다. 검찰의 특권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권이 추진하는 방안이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조국과 있었던 일을 말하는 이 사람 어투에서 조국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이 묻어났다.

"굳이 저를 안 불러도 되는데 청와대 회의에 저를 부르더라고요. 조국 수석이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마지막에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창 밖을 보고 있었더니 조국 교수가 대뜸 '국회에 왜 문건 뿌리고 다니느냐, 그 문건 김단장이 만드신 거 맞죠' 하길래 '예. 모든 문건은 제가 만듭니다' 그랬더니 '이런 거 가지고 다니면서 정부 하는 일에 반대하지 말라'는 말을 계속 하더라고요. 제가 참지 못하고 '수석님! 제가 검찰 형사정책단장입니다. 이 자리는 국민한테 불리한 수사권 조정안 반대하라고 있는 겁니다. 수석님은 수석님 일 하십시오. 저는 제 일 하겠습니다.' 그 말 듣더니 조국 수석이 '회의 그만합시다' 해서 회의가 끝났습니다. 그 이후로 저를 그렇게 싫어하더라고요."

조국의 기억은 사뭇 달랐다. 청와대에서 검경 수사권 조정 관련해 검찰과 회의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김웅을 일부러 부른 적은 없다고 했다. 그 때 검찰 측 파트너는 봉욱 대검차장이었고 김웅은 여러 배석자 중 한 명으로 참석했을 뿐이라고 했다. 배석자인 김웅은 자신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발언을 했을 수는 있지만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없다고 했다. 다만 김웅이 수사권 조정안에 강하게 반대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고 수석은 수석 일을 하고 자신은 자신의 일을 하겠다는 취지의 김웅 이야기를 박형철 반부패 비서관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말라고 한 사실은 있습니까.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검찰의 집요한 수사권 조정 반대 로비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회의 참석자들에게 검찰청과 경찰청의 상급 기관인 법무부와 행안부 장관이 협의를 하고 있으니 검찰 의견이 있으면 법무부에 의견을 보내면 되는 것 아니냐, 왜 국회의원 상대로 검찰이 개별 로비를 하고 비공개된 자료가 언론에 나가느냐고 지적한 것입니다."<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

조국 (사진=연합뉴스)
조국은 야당 정치인 김웅이 자신을 사사건건 공격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것이라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기억이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김웅이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결국 이 때문에 검찰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런 일 겪으면서 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구나…사표 쓰고 나오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추미애 장관이 들어와서 한술 더 뜨니까 검찰을 나온 거죠."

그런 그에게 유승민이 같이 정치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며칠 고민 끝에 유승민이 내민 그 손을 잡았고 지난해 총선에서 송파갑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정치를 하는 것은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김웅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대략적인 경위다.

지금 국민의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이다. 당대표 경선에서 신인들의 돌풍이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은 여론조사 1위에 이어 예비경선에서 선두를 차지한 이준석이지만 처음 불을 당긴 사람은 김웅이다. 이 사람의 초반 지지율이 10%에 육박하고 한동안 이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이 세대교체 돌풍의 도화선이 되었다. 28일 발표된 예비 경선에서 컷오프 되긴 했지만 김웅이라는 정치 신인의 초반 레이스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충분했다.

2. 이 사람을 만난 것은 5월 17일 월요일 아침이었다. 의원실 비서에게 이 사람은 검사로 재직할 때도 매년 5월이면 광주 5.18 묘역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번쩍 띄었다.

-매년 5월이면 정말로 광주를 찾습니까.
"국내에 없었거나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 거의 매년 광주에 갔습니다. 서울이나 이런데 근무할 때는 5.18이 끼어 있는 주말에 갔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광주는 가장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매년 한 번 정도 그 곳을 찾아 의미를 새기곤 했습니다."

스니커즈에 콤비 정장의 김 의원, 국민의힘 의원의 똑같은 복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이다. 고향이 광주에서 멀지 않은 여수이긴 했지만 고향 가는 길에 마음 가볍게 잠깐 들른 것이 아니었다. 현직 검사 신분으로 매년 잊지 않고 광주를 찾았다는 것은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보여준다. 5 .18 항쟁 당시 계엄군의 헬기 사격설을 최초로 주장했던 조비오 신부는 이 사람이 다니던 성당의 주임 신부였다.

-'광주'의 역사적 의미를 잊지 않는 사들은 많지만 매년 광주를 일부러 찾아 참배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만.
"제게는 워낙 큰 사건이었습니다. 광주 항쟁 사진전을 처음으로 한 곳이 제가 다닌 저전동 성당이었습니다. 1984-85년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대학을 제외하면 저희 성당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조비오 신부님이 5월만 되면 약주 한 잔 하시고 괴로워하던 모습도 가까이에서 직접 봤고 그 때 이야기도 많이 들었으니 조 신부님 통해 광주를 간접 경험한 셈이죠."

호남 출신에 매년 5월이면 광주를 찾는 사람이 왜 보수 정당에 있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커졌다.

3. 온갖 질병을 몸에 달고 다니는 허약 체질이었고 초등학교 때는 교통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쳐 6개월을 병원에서 보냈다. 퇴원 후에도 거의 1년을 목발을 짚고 다녔다. 학교에서 거의 왕따 비슷한 존재였다. 청소년기 이런 경험은 이 사람 세계관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듯하다.

"운동도 할 수 없고 아무 데도 어울릴 데가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가서 또 수술을 받아서 극도로 허약했습니다. 그 상황이 되면 학교 내 위계 질서 안에서 제일 밑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 경험을 중학교 내내 겪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들어온 뒤 운동권 학생이 된 것은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교내 시위가 있을 때면 187센티미터의 훌쩍 큰 키에 바짝 마른 그의 모습은 남들의 눈에 쉽게 띄었다. 이 시절 자신의 모습을 '얼치기 사회주의자'라고 표현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아버지가 사준 그의 스쿠프 자동차는 용도가 특별했다.

"차 트렁크에 (화염병을 만들기 위한) 시너와 휘발유를 운반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차안에 늘 휘발유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1990년대 초반은 서경석 목사 등이 중심이 된 경실련이 새로운 시민 운동 세력으로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서울대에도 경실련과 맥을 같이하는 학생 운동 그룹이 생겨났고 김웅은 이 그룹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했다. 동구 사회주의 붕괴 등으로 기존의 좌파 혁명을 이야기하던 학생 운동이 아닌 개혁을 주장하는 학생들이 등장했고 김웅도 이 주장에 공감했다. 혁명이 아닌 개혁을 말할 때 어쩌면 그때부터 이 사람 머릿속에 보수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른다.

"이미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졌고 박세일 교수님 강의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죠. 경실련 처음 만들었던 분들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학생 운동 이야기를 빼고도 대학 시절 사연이 적지 않은 듯한데 그 때 기억을 굳이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하던 일이 옳은 일인지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번민하고 방황하던 시절이었다. 정신적인 방황과 건강 문제 등으로 휴학을 거듭하면서 입학한 지 6년 만인 1993년에 졸업했다.

"경실련에서도 일했고 대학교 안에서 경실련 대학생회도 만들고 거기에 후배를 총학생회 선거에도 내보내고 그랬죠. 그렇게 하다가 다 안되니까 그때부터는 아무 것도 안하고 농구만 하고 다녔죠. 대학을 졸업하고 시민운동도 안되고 이것도 저것도 안되고 농구만 하고 있는데 친구가 찾아와서 사법고시 준비를 하라면서 봐야 될 책과 문제집을 알려주더라고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담배는 세 갑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거울에 비친 바싹 마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저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람들 많은 곳에 가기를 꺼리고 밤에만 주로 움직였다는 것은 자신의 외모에 대한 불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모습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사람의 대학 시절은 건강하게 반짝반짝 빛나던 청춘과는 거리가 멀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스스로를 약자, 소외된 사람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자신을 폐인이라고 표현했다. 겉으로만 보면 부잣집 막내 아들에 서울대 출신이니 소외나 차별 천대와는 거리가 먼 삶일 거 같은데 그런 문제에 민감했다.

-소수자에 대한 연민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제가 옛날에 폐인으로 1-2년 살아보니까 절대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운동 열심히 하면 나아질 거라고 하는데 절대 그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어요. 제가 경험해봤기 때문에 노력으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잘 알지요"

김웅 그사람
인터뷰 중간에 전라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몇차례 언급했다. 살아오는 과정에서 호남 출신이라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뜻이다.

"제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이 에어컨인가 공기청정기 A/S 해주는 분 이야기였어요. 자기는 일하러 가면 말을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전라도 사투리가 나오면 그때부터 사람들이 물건 없어진 게 없는지 뒤져본다는 겁니다. 근데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준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이라고 이 공정한 사회에서 피해 입은 거 뭐가 있어 그러는데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안 당해봤기 때문에 소외와 차별을 알 수 없는 겁니다."

어렸을 때 폐 수술을 받은 것 때문에 군대는 면제받았다. 대학 졸업 이후 한동안 이 사람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면서 책은 보지 않고 눈뜨고 일어나면 농구장으로 가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농구를 하면서 보냈다. 그렇게 보낸 시절이 일 년은 넘는다고 했다. 이렇게 살아서는 인생 폐인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고시원에서 고시 준비를 핑계로 뭉쳐 살던 친구들과 헤어져 본격적으로 고시 공부에 몰입한 것이 94년 무렵이었고 97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4. 처음부터 유능한 검사라는 말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구속 피의자를 계속해서 풀어줬다는 이유로 상사에게 '너는 검사 자격이 없는 놈이다'라는 말을 들었고 처음 부임한 인천지검에서는 업무 실적이 제일 나쁘다고 해서 '당청(當廳)꼴찌'라는 별명이 생겼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해 혼술, 혼밥이 더 편했고 회식은 질색이었다. 폭탄주 마시고 천하 대세를 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검찰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모지리' 검사였다. 초임 시절에는 특수부, 공안부 근처는 가보지 못했고 형사부를 맴돌았다. 잘 나가는 검사는 분명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집요한 검사였다. 자신에게 검사로서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잘 나가는 검사는 아니었지만 성실하고 집요한 검사였다.
오늘의 김웅을 있게 한 원동력은 2018년 이 사람이 쓴 <검사내전>이다.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책인데 '검사 김웅' 이야기로 시작해서 '인간 김웅'의 이야기로 끝나는 책이다. <검사내전>에서 그려지는 이 사람 모습은 전형적인 검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거악을 척결하는 특수부 검사의 모습도 아니고 정권에 맞짱 뜨는 '검찰주의자' 모습도 아니다. 이 사람의 사기꾼 잡은 이야기다. 거기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거물 피의자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찌질하지만 영악하고, 평범하지만 교활하고 때로는 대범하기 짝이 없는 사기꾼들이 나온다. 언론에 대서특필된 사건은 거의 없지만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지 않을 도리가 없을 만큼 흥미롭다.

검찰청은 인간의 분칠하지 않은 맨얼굴이 드러나는 곳이다. 추악하고 비열하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수없이 목격하면서 이 사람은 인생을 배우고 세상을 깨우친다. 그런 곳에서 2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기 때문일까, 이 사람에게는 판타지라는 것이 없어 보인다. 오직 차가운 리얼리스트의 모습이다. 충고를 할 때는 애정을 빼고 심장을 향해 칼을 뻗듯 명확하고 고통스럽게 찔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모델을 시켜주겠다는 사기범의 마수에 걸려 지옥 같은 수렁에 빠진 젊은 여성에게 해준 이야기를 들어보자.

"수민씨는 인터넷에 올라가 있는 동영상만 없애 주면 사기범 일당에 대한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것도 금방 잊히고 곧 나아지겠지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낮에도 밤에도 벗어날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고,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질 것이며…" <검사내전 중>

수많은 전투를 치러본 사람이다. 이 사람이 상대한 사람들은 세계관이 다른 사람들, 악이라는 무기와 교활함이라는 방패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기꾼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피해자에 대해서도 어설픈 동정 따위는 없다.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입으로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그 많은 단체와 변호사들 역시 믿지 않는다. 고결한 덕목이 보상을 받는 것은 이상에 불과하고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는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믿는 사람이다.

5. 반골 기질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그렇게 순둥이 같이 생긴 얼굴로 검사 노릇 하겠느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지만 반골 검사이자 강골 검사였다. 인천지검에 초임 검사로 부임했을 때 지검장의 고향으로 단체 야유회를 갔다. 당시 검사장은 고향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던 인물이었다. 각 부 별로 건배사를 하던 중에 이 사람이 소속한 부서 차례가 되었고 부장은 이 사람에게 건배사를 맡겼다. 이런 행사를 왜 관내에서 하지 않고 이렇게 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와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가 "검사 놈들은 이래서 안돼."라는 말과 함께 야유회장에서 쫓겨났다.

"사람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왜 인천지검 야유회를 거기에서 하는지 거기 주민들이 모르겠습니까. 다 압니다. 그런데 검사라는 자들이 검사장에게 아부나 하면서 거기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 검사들의 결정에 대해 누가 신뢰하겠습니까. 그런데 선배들이 가만히 있으니 저 같은 초임 검사가 하는 겁니다. 법에서 검사 신분을 보장해준 것은 그럴 때 자기 목소리 내고 자기 소신 지키라고 해준 겁니다."

2007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국립묘지 안장 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주임 검사였다. 관련법에 따르면 살인이나 내란 뇌물 등의 전과가 있으면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법무실장은 두 사람이 사면을 받았으니 허용하는 쪽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이 사람은 끝까지 불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법무실장이 왜 그렇게 반대하느냐고 소리쳤다.

"그렇게 하면 죽을 때 제가 후회할 거 같아서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분이 원래 화를 낼 때도 웃으면서 화를 내는 분인데 그 때는 정말 폭발했습니다. 책상을 엎어버리면서 '사표 써! 그렇게 반대할 거면 옷 벗고 나가서 반대해!'라고 하더라고요."

소신을 지킨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순천지청으로 발령이 나 거기에 6년 동안 적을 두었다. 사실상 귀양살이었다. 그에게 분노를 폭발했던 법무실장은 이후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중앙지검장에 이어 검찰총장으로 승승장구했으니 이 사람은 서울 주변은 얼씬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반골 기질 가득한 후배를 그래도 아끼는 선배 검사들 덕분에 이 기간에 미국 연수도 다녀오고 외부 기관 파견을 나가는 것으로 시련의 시간을 견뎠다.

검찰은 말 그대로 폼생폼사 조직이다. 폼이 절반, 아니 99%인 조직이다. 현안이 터지면 실명으로 대차게 글을 써 들이받고 사표를 던지는 문화는 검찰 폼생폼사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람 역시 폼에 살고 폼에 죽을 사람이다. 검찰을 떠나며 쓴 글이 검찰에서는 물론 검찰 밖에서도 화제였다.

"…검찰 가족 여러분 그깟 인사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봉건적 명령에는 거역하십시오. 우리는 민주 시민입니다. 추악함에 복종하거나 줄탁동시 하더라도 겨우 얻는 것은 잠깐의 영화일뿐입니다. 그 대신 평생의 더러운 이름이 남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결국 우리는 이름으로 남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떠납니다. 살아있는 권력과 맞서 싸워 국민의 훈장을 받은 이때, 자부심을 품고 떠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사람은 여전히 검사 같은 마음으로 살고, 검찰에서 일하던 자세로 정치를 한다. 이게 맞다 싶으면 과감하게 뛰어들고 일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것은 촌스러운 짓이라고 생각한다. 당 대표가 되면 현재의 지역구를 포기하겠다고 했다. 당에 대한 헌신이자 희생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제 의원 당선된 지 갓 일년 됐고 다음 총선이 3년이 남았는데 재선이 어려울 것이라는 말도 했다. 누가 자기에게 다음 공천을 보장하겠느냐는 것이다.

-정치를 오래 할 생각은 없습니까.
"오래 할 거 같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피들이 계속 수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언제까지 새로운 피겠습니까. 국회의원이 다선이 목표가 되면 비참해질 거 같아요. 제가 이루어야 할 목표나 비전이 다했다고 생각되면 제가 정치를 계속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웅 그사람
자신의 당 대표 출마는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초선은 초선대로, 중진은 중진 의원들 대로 그렇다는 것이다.

"초선이 갑자기 나오면 모든 사람에게 불편한 겁니다. 같은 초선도 불편하고 재선 삼선도 불편한 겁니다. 자기들은 가만히 뚜벅뚜벅 가고 있는데 초선이 갑자기 뛰쳐나가면 모두가 뒤쳐지는 효과를 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번 재선은 어렵다고 봅니다. 적도 많이 생겼고요. 그렇지만 내일을 생각하면서 살아본 적은 없습니다."

백 미터 달리기를 하 듯 정치를 한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리겠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기에게는 내일도 없고 어제도 없고 오직 오늘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당대표 경선을 통해 국민의힘 변화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 말이 단호하게 들렸지만 성급하게도 들렸다.


6. 오랫동안 '민주당 빠'였고 지역 연고로 보나 학연으로 보나 운동권 경력으로 보나 이 사람이 정당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민주당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민주당에 수두룩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 일까.

"국민의힘 사람들은 잘못을 지적하면 그래도 수긍을 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그런데 민주당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듯싶어요. 제가 '이것은 잘못된 거 아냐'라고 말하면 '야, 새누리당은 여당일 때 더 했어', '너 검사 되고 변했어'라는 식으로 반응하는데 제가 정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왜 민주당이 아닌가에 대해서 이 사람 설명이 길고 상세했다. 그의 긴 설명을 한 마디로줄이면 민주당이 변했다는 것이다. 지금의 민주당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던 이전의 민주당이 아니라고 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안 갈등에서 촉발된 현 집권 세력에 대한 실망, 어설픈 선의와 입으로만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의 행태에 대한 반감이 이 사람을 보수당으로 이끌었지만 촛불집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 사람 머리 안에는 꽤 일찍부터 보수의 싹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까.
"한 번 가봤습니다. 이 게 커질지 안 커질지 궁금해서 가봤어요.

-그 집회의 대의에 동의해서 간 것이 아니구요?
"저는 정치에 그렇게 관심 없었어요. 옛날부터 공안부 검사하면서 집회가 크게 될지 안 될지 그런 것만 관심 있었어요."

보수에 대한 가치를 두고 제법 긴 대화가 이어졌다.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 경쟁에서 1등을 차지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1등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보수주의라고 설명했다. 그런 것이 왜 보수만의 가치인지, 그런 것은 진보 역시 추구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남았다.

김웅 그사람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는 추상적인 언어로 설익은 이론을 말할 때가 아니라 국회 표결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국민적 공분을 샀던 정인이 사건과 관련해 아동 학대사범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에 252명의 국회의원이 찬성했을 때 이 사람은 홀로 반대표를 던졌다. 법을 고쳐 형량을 높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게 반대의 핵심 이유다. 국민 정서 모르고, 감수성 떨어지는 정치인이라고 악플이 '어마어마하게' 달렸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이번에 똑 같은 사건 일어나서 아이가 죽어갔어요. 정인이법 통과됐는데 뭐가 달라졌습니까. (형량 높인다고) 아무런 작용 안되는 겁니다. 그런 걸로 국민 속이고 있는 거예요. 마치 국회의원들이 엄청 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말이죠.

김웅 그사람
대중이 원한다고 정치인이 그 요구에 무조건 따르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목소리의 크기만으로 옳고 그름이 정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고나서 단 한 건의 법안도 발의하지 않아 '0건 중진'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최근 경찰에서 정보 관련 권한을 떼내는 법안을 발의했다.

"좋은 국회의원은 법을 만드는 의원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만들지 못하도록 애쓰는 의원입니다. 어떤 민주당 의원은 의정보고서에 지금까지 1200건의 법안을 발의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드는 법안이 다른 법들과 균형이 맞는 걸까요. 대부분이 보여주기식, 실적 쌓기용 법안 제출입니다."

무슨 일만 터지면 '누구누구 법' 이런 식으로 법 만들고 형량 높이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도를 변화시키는 데는 늘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보수주의라고 설명했다. 이 설명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김웅 그사람
"모든 풀에는 독이 있다고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모든 법에는 국민에게 독소가 되는 조항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호조항이 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장벽이 되는 겁니다. 법이 많아지면 법률가만 좋아지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수시로 들어가본다. 그런 곳에서 많이 배운다고 했다.

"(그런 커뮤니티에 가보면) 지금 사람들이 너무 많이 화가 나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기 대신 욕해주고 미워해주는 정치인을 좋아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사람들의 그런 욕구대로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클리앙이나 보배, MLB 같은 데서, FM코리아도 마찬가집니다만 '김웅 너무 좋아요' '너무 시원시원해요'라고 할 때면 나는 정치 그만해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것은 곧 제가 중심을 잃었다는 뜻이니까요."

사람들은 늘 진실을 원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분노할 대상이 필요한 것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대중의 목소리는 잘 분별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거기에 편승하거나 그 목소리를 부추겨서는 안된다고 믿는 태도 역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언론에 대해 혹독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검사 생활하면서 언론이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도하는 것은 거의 본 적이 없고 사건 가운데 정말 자극적인 부분만 보도하는 것을 봤습니다. 검찰의 사건 수사 발표 가운데 본질이 아닌데도 그 시기에 가장 첨예했던 갈등 문제로 끌고 가는 것도 봤고요. 명백한 오보가 났는데도 그 뒤에 정정하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언론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한국 언론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나요.
"사실 검찰도 그 전에는 언론에 부화뇌동한 게 있었죠. 수사하기 전부터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 버리고 낙인 찍는 것을 언론도 좋아하고 대중도 좋아하고 검사도 좋아하고…지금도 그것은 잘 안 사라지고 있는 거 같고요."

7. 재산 신고액이 1억 2천만원으로 국회의원 중 최하위권이다. 아버지는 술도가를 해서 부를 이루고 신용금고 이사장을 지낸 지역 유지였고 이 사람이 대학생 시절 자동차를 사줄 정도의 재력가였다. 검사가 된 이후에 아버지는 이 사람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자가에서 전세살이를 하다가 한동안 월세로 살았다. 지금은 전세로 살고 있다.

-왜 그렇게 재산이 적습니까.
"제가 검사를 하는 동안에 아내와 딸을 유학 보냈습니다. 공무원 월급으로 그 비용을 감당해야 했으니 돈이 있겠습니까. 빚이 있었는데 명예 퇴직금으로 갚았습니다. 제게는 돈이 모이지 않습니다. 제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벽이 단단해도 벽에는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김웅 그사람
미국에 있던 여동생이 4년 동안 투병했는데 그 비용을 이 사람이 댔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도왔던 여동생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싶다. 여동생 이야기도 그렇고 최근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는 아내 이야기도 그렇고 개인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려 들지 않았다.

처음 의원회관에서 만났을 때 이 사람 복장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스니커즈에 콤비 정장 차림이었다. 1970년생, 올해 우리 나이로 52살인데 복장 때문인지 훨씬 젊어 보였다.

-양복 정장 입은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입는 건가요?
"국민의힘 국회의원 하면 항상 정해진 옷이 있잖습니까. 머리 모양부터 구두까지 다 똑 같은 형식인데 그것 좀 벗어나고 싶어요. 여의도만의 사고 방식이 있고 여의도만의 문화가 있더라고요. 그 규범을 그대로 따라 갈 거면 제가 굳이 정치를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저는 늘 그 규범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게 과연 맞나'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남들과는 다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검사 시절 한 번도 구두를 신은 적 없고 무릎이 나오는 찢어진 청바지 종종 입고 다녔다. 검사 명패를 방에서 치워버렸다. 끊임없이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의 규범을 의심하는 사람이자 새로운 균열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진보의 갑옷으로 무장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굳이 보수의 아성에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자신을 던져 보수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이 사람의 도전은 경선에서 컷오프 되면서 일단 미풍으로 끝났지만 봄을 알리는 한 마리의 제비 역할까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 인터뷰는 지난 5월 17일과 21일 두차례에 걸쳐 국회의원회관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1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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